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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갑총재(2020-2021)

2021-0308. 박인억 발전위원 모친상

by 조흥식 2024. 1. 28.

2021-0308. 박인억 발전위원 모친상(강동성심병원)

필암서원(하서 김인후)

 

 

 

 

 

필암서원(하서 김인후)

@호남의 孔子,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호남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18(동국18)에 배향된 인물이다

장성 필암리 맥동마을 입구에는 암석문 필암이 세워져있다

.栗谷(이이)이 하서 김인후의 절의와 지조를 극찬하였다

.인종의 사부로써 대나무 그림을 선물받고, 시를 적었다

통곡대에서 승하하신 인종께 통곡을 하며 절을 올린곳이다

.임금을 그리워하며 충절로써 신하의 도리를 하며며 자기성찰 하였다

제자 송강(정철)은 스승을 위한 시를 적었다

 

@필암서원(筆巖書院)

.1590, 장성읍 기산리에 처음 건축하였으나,

.1599, 정유재란에 화재로 소실되어

.1624, 재건축되어

.1662, 필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672, 현 위치로 옮겨졌으며

.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47)에서 제외된 전남 지역의 유일한 서원으로

입구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하서 김인후와 사위인 고암 양자징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200년 은행나무는 학문과 많은 인연이 있다(성균관, 서당, 서원, 향교마다 은행나무를 식목하였다)

 

.확연루(2층누각)1층은 천정이 낮아 허리를 구부려야 한다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필체이며 군자의 가르침은...”

.청절당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교류하던 공간이다

 

@필암서원의 강학공간의 구성은 다른 서원과 다르다.

.대부분 기숙사(동재, 서재)가 앞에 있고, 강학당이 뒤에에 있으나,

필암서원은 반대로 강학당이 앞에 있고 기숙사가 뒤에 있다.

., 정문~누마루~동재와 서재의 마당~강학당~사당 순으로 있으나,

필암은 누마루~마당~강학당~동재와 서재의 마당~사당 순이다

 

앞의 경우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강학당으로 둘러싸인 자형(위에 ㅡ획이 강학당이다) 마당은

별다른 기능이 없이 작고 관념적이다.

그러나 필암서원의 경우 강학당과 동재와 서재로 둘러싸인 자형(아래 ㅡ획이 강학당이다) 마당은

그 위쪽의 사당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갖는다.

제향의 기능이 강화된 17세기 서원건축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필암서원은 제향 중심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사당을 중심으로 강학공간의 마당을 놓으면서,

출입을 해결하기 위해 자 아래 다시 자로 마당을 두었고, 누마루인 확연루(廓然樓)를 세웠다.

그래서 확연루와 강학당인 청절당(淸節堂) 사이의 마당이 오히려 일반적인 서원의 마당처럼

별 기능 없이 관념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확연루를 들어서자마자 확연한 마당이 펼쳐지는 것이다.

 

확연루는 군자의 가르침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다는 정자(程子)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서원의 출입이 마치 살림집의 안채로 들어가듯 청절당의 옆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는 것도 특이하다.

이 특이함이 새롭지는 않은 것은 거기에서 조선 성리학의 쇠락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훈몽재는 하서 김인후 선생이 인종의 스승으로서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여

삼대정치의 큰 꿈이 좌절되자 명종 3년에 순창 점암촌에 은거하면서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이다.

처음에 하서 선생이 훈몽재를 지은 곳은 대학암 위쪽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훈몽재를 선생의 5대손인 자연당 김지서에 의해

1680년경 원래의 터 인근에 "자연당"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가 퇴락하였다.

 

삼연정은 순창군이 2003년부터 추진한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2009년에 현재의 위치에 신축한 훈몽재의 정자로서

하서 김인후 선생이 산()()() 삼자연을 노래한 "자연가"에서 그 명칭을 따왔다.

 

양정관은 하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관이다.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신축한 양정관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다.

 

훈몽재 지석묘는 조선시대의 유현인 하서 선생이 은거 강학하였던

훈몽재 앞마당 가운데 있는 지석묘로서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청동기시대에 정치권력이나 경제력을 가진 족장 등 지배층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으로 이 곳 훈몽재 터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자연당은 훈몽재 소실 후 하서 김인후 선생 5대손인 김시서가 복원한 강학당이다.

 

훈몽재

하서 김인후 선생이 인종의 스승으로서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여

삼대정치의 큰 꿈이 좌절되자 명종 3년에 순창 점암촌에 은거하면서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으로 순창군에서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2009119일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훈몽재 터, 하서 김인후 선생이 처음 훈몽재를 건립했던 곳이다.

 

대학암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백방산 아래 추령천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도 3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평평하고 넓은 바위이다.

이 바위가 유명한 이유는 냇가쪽에 "대학암"이라는 암각이 되어 있어서다.

바위에 희미하게 "대학암"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대학암은 하서 김인후 선생의 문하생이었던 송강 정철이 친필로 이 바위에 암각되어 있다.

 

대학암은 하서 선생과 송강 정철이 대학을 강론했다고 전해지는 바위이다.

하서선생은 송강 정철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에게 대학을 강의했다고 하며

송강 정철은 훈몽재에서 13세까지 공부하였다고 한다.

백방산과 추령천 주변 풍광이 너무나 아름답다.

 

순창군에서는 하서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되살리고

역사적 가치 재조명과 예절, 유학 등 전통문화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2009119일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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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