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2. 동두천 소요산
우암 송시열(괴산 화양동계곡, 西人)
우암 송시열(괴산 화양동계곡, 西人)
1.우암 송시열(83세)이 賜藥을 받다(1689. 숙종15년, 정읍 수송동)
.유언(朱子가 죽기전에 “곧을 直”을 알려준자)
.선조40년 출생~장원급제(인조11)~봉림대군의 스승(효종:1649즉위)
.제주도 유배(숙종,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원자 책봉반대)
2.우암 송시열(1607~1689, 83세) 西人
.화양동서원, 송우암유허비...8세 공부(송준길) 선조40년 출생
中國 朱子의 “무이구곡”을 본뜬 화양동계곡, 암서대 정자
만동묘(명나라 태조~신종~의종의 사당)
.한천정사(서원, 1910 재건), 남간정사
.부친, 주자, 이이, 조광조, 사계 김장생(1548~1631. 성리학, 예학)
.29세 생원시 장원급제(인조11년. 주역 논술), 繫辭上傳(계사상전)
一陰一陽之謂道(일음일양지위도: 순환하여 움직이는것이 道)
.봉림대군의 스승(효종즉위 1649)
.병자호란후 낙향, 정계복귀후 북벌계획(효종 1649)
.예송논쟁(효종사망: 1659, 5월), 西人들의 몰락
*조대비 복상문제(1674)
*효종비 사망 2차 예송논쟁(1674)
*1689년 1월, 숙의장씨 아들(경종)의 세자책봉 반대
(제주 유배, 6월 한양으로 압송중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는다)
*1694년 갑술환국에 西人집권으로 명예회복한다
3.우암 송시열의 유배
.노론의 영수, 조선실록에 3000번 이상 기록된 인물
.1674년, 덕원에 유배(효종이 죽은뒤, 효종의 모친“조대비”의 복상문제)
.1675년(숙종1년), 장기곶에서 5년간 위안리치 유배(오도천의 집)
.매일 손자(주석)와 토론하였다
.위리부근에서 “산책길에 혹시 위리를 넘어건적이 있었느냐?”
.손님들이 위리를 넘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남쪽지방에는 학질이 많았다
.학질환자 손님이 위안리치에 들어오면 깔끔하게 나았다
.송시열이 떠난후, 환자의 등에 “송대감” 글씨를 써붙이면 완쾌되었다
.1679년, 거제도 유배지 이동
.栗谷의 기호학파로써 儒學의 영남학파와 쌍벽이었다
.孔子, 孟子처럼 松子로 불렀다
.아내의 임종, 사위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한 비운의 정치가
.아내 빈소에 손자(희석)를 통하여 제문을 보낸다
4.흥선대원군(이하응)
@화양동서원 방문하여 문전박대(충북 괴산)
.萬東廟(명나라 의종, 신종을 모신 사당...임진왜란 파병)
@서원철폐(1865. 47개 사액서원 제외, 600여개 폐쇄), 노론세력 제거
“백성을 괴롭히면, 공자가 살아나도 용서를 안한다” 초강경 입장
.안동김씨 세력 척결(김사근,김흥근,김병식,김병기...석파정을 빼앗아)
세도정치 단절(노론~안동김씨)
정읍(우암 송시열)
1.정읍 수송동에서 賜藥을 받다(1689. 숙종15년)
.유언(朱子가 죽기전에 “곧을 直”을 알려준자)
2.우암 송시열(1607~1689, 83세) 西人
.화양동서원, 송우암유허비...8세 공부(송준길) 선조40년 출생
中國 朱子의 “무이구곡”을 본뜬 화양동계곡, 암서대 정자
만동묘(명나라 태조~신종~의종의 사당)
.한천정사(서원, 1910 재건), 남간정사
.부친, 주자, 이이, 조광조, 사계 김장생(1548~1631. 성리학, 예학)
.29세 생원시 장원급제(인조11년. 주역 논술), 繫辭上傳(계사상전)
一陰一陽之謂道(일음일양지위도: 순환하여 움직이는것이 道)
.봉림대군의 스승(효종즉위 1649)
.병자호란후 낙향, 정계복귀후 북벌계획(효종 1649)
.예송논쟁(효종사망: 1659, 5월), 西人들의 몰락
*조대비 복상문제(1674)
*효종비 사망 2차 예송논쟁(1674)
*1689년 1월, 숙의장씨 아들(경종)의 세자책봉 반대
(제주 유배, 6월 한양으로 압송중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는다)
*1694년 갑술환국에 西人집권으로 명예회복한다
3.우암 송시열의 유배
.노론의 영수, 조선실록에 3000번 이상 기록된 인물
.1674년, 덕원에 유배(효종이 죽은뒤, 효종의 모친“조대비”의 복상문제)
.1675년(숙종1년), 장기곶에서 5년간 위안리치 유배(오도천의 집)
.매일 손자(주석)와 토론하였다
.위리부근에서 “산책길에 혹시 위리를 넘어건적이 있었느냐?”
.손님들이 위리를 넘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남쪽지방에는 학질이 많았다
.학질환자 손님이 위안리치에 들어오면 깔끔하게 나았다
.송시열이 떠난후, 환자의 등에 “송대감” 글씨를 써붙이면 완쾌되었다
.1679년, 거제도 유배지 이동
.栗谷의 기호학파로써 儒學의 영남학파와 쌍벽이었다
.孔子, 孟子처럼 松子로 불렀다
.아내의 임종, 사위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한 비운의 정치가
.아내 빈소에 손자(희석)를 통하여 제문을 보낸다
7.비겁하지 않게 원수를 대하라!
@숙종시절, 명신 허미수와 송시열은 서로 대립하는 사이였다
.허미수는 송시열에 의하여 한 때 좌천되기도 했었으며,
.입장이 바뀌자 허미수는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자고 주장했었다
.먼훗날, 송시열이 병에 걸려 온갖 약을 써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허씨 집안 전통으로 전해 내려오는 비방이 아니면 고칠수없는 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송시열은 허미수에게 약처방을 얻고자 하지만 집안에서 모두 반대했다
.반대하는 이유는 허미수가 송시열을 해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허미수는 우리의 政敵이지만 병든 사람을 해칠 사람이 아니다”
.어쩔수없이 허미수에게 요청하자, 처방을 지어주며 물었다
“이 처방대로 약을 지어드릴 수 있겠는가?”
.송씨 집안의 사람들이 대답을 하지 않고 돌아와 처방전을 펴보니
과연 그 처방전에는 비상을 넣도록 되어 있었다
.송시열은 “그대로 지어라. 허미수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비상만은 처방전보다 조금 적게넣은 약을 먹고 완쾌된다
.송씨 집안에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허미수를 찾아간다
.허미수가 물었다 “처방전대로 약을 지어드렸느냐?”
.송씨 집안의 대답은 “비상만은 조금 적게 넣었습니다”
.허미수가 크게 웃으면서
“허허, 그래? 그 정도라도 넣었으면 앞으로 살아가기에는 큰 문제는 없을 것일세....”
Ti-story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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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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