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17.동봉라이온스클럽 성기선회장 이취임식
정조, 역사 보존의 전통을 잇다
정조, 역사 보존의 전통을 잇다
@일성록
“진시(辰時)에 주상[정조]이 성정각(誠正閣)에 나아갔다.
유현(儒賢)인 성균관 좨주 송덕상(宋德相) 등이 입시한 자리이다.
*송덕상 이 말하였다
“경종실록(景宗實錄)을 이제 다 바로잡았으니, 구본을 나란히 보존하는 것은 참으로 필요치 않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수정본이 나온 뒤에는 구본을 물불 속으로 던져 넣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주상(정조)이 말하였다
“우리 조정 선왕들의 실록 중에도 수정본을 만든 뒤 구본까지 아울러 보존한 전례들이 있다.
송나라 때 범조우(范祖禹)가 편찬한 신종실록(神宗實錄)도 그러하였다.
다 완성된 본을 장돈(章惇)과 채변(蔡卞)이 다시 개정하였는데,
그 후에 범조우의 아들 범충(范冲)이 다시금 바로잡았으면서 이전의 내용까지 나란히 보존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주묵사(朱墨史)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두 본을 모두 보존하는 것이 또한 옛 규례이다.”
*송덕상이 응답하다
“이 실록의 일로 조정 신하들도 의견 차이가 커서 김종수(金鍾秀)는
둘 다 보존해야 마땅하다 하고 유당(柳戇)은 구본을 물불 속으로 던져 넣어야 좋다고 합니다.
이제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으니 두 본을 아울러 보존하는 것이
또한 옛 규례를 따라 행하는 데 좋을 것 같습니다.”
@영조 초기에 간행되었던 경종실록을 50여 년이 지난
정조 초기부터 다시 수정하여 경종수정실록으로 완성해 가는 단계에서
송시열(宋時烈)의 현손(玄孫) 송덕상과 정조가 나눈 대화이다.
당초 경종실록은 경종 재위 기간[1720~1724]의 국정 기록을
영조 2년(1726)부터 8년 사이에 15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당시 편찬 중이던 숙종실록이 영조 4년에야 끝났을 뿐만 아니라
영조 초기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편찬의 관점을 정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6년이나 걸렸다.
@세제(世弟 훗날의 영조) 책봉을 이뤄낸 뒤 대리청정까지 추진하다가
실패한 老論과 이를 반대하며 옥사를 일으켜 노론 사대신(四大臣)을 죽음으로 몰고
경종 때의 정국을 주도한 소론(少論),
그리고 소론의 사관들이 기록해 남긴 시정기(時政記) 논란 끝에
영조는 탕평의 관점에서 소론의 손으로 편찬을 마무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노론쪽의 문제 제기가 끊이질 않았지만, 그래도 이내 수그러들곤 하였다.
@그러나 정조 즉위 후 영조실록을 편찬하게 되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탕평을 지향하면서도 결국 경종 때의 노론을 충(忠),
소론을 역(逆)으로 규정한 영조의 실록을 편찬하면서
충과 역이 완전 반대로 기록되어 있는
경종실록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영조 때 사관으로서 실록을 포쇄(曝曬)하러 갔다가
경종실록 내용을 살핀 경험이 있던 노론의 전 좌랑 이사렴(李師濂)이
포문을 열고, 대사간 유당(柳戇)이 재촉한 것을 계기로 수정 작업이
시작되어 정조 3년 이때 완성되어 갔다.
이후 이 경종수정실록은 영조실록과 함께 정조 5년 7월에 가서
5권 3책으로 정식 간행되었다.
이날 정조가 만난 송덕상은 수차례의 관직 임명을 모두 사양하다가
유현에게 주는 성균관 좨주라는 직함으로 이 자리에 등장한 터였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바로 경종수정실록만 남기고
경종실록은 영구히 폐기하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선조실록(宣祖實錄)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과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가
모두 나란히 보존되었던 과거 실록의 역사를 모를 리 없는데도 말이다.
@송나라 신종실록의 주묵사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신종실록은 범조우가 편찬한 본을 장돈과 채변이 개정한 뒤
40여년 만에 범조우의 아들 범충이 다시 개정하였는데,
범충은 기존 본에서 남겨둘 부분은 검은색,
자신이 첨가해 넣은 부분은 붉은색,
삭제할 부분은 노란색 글씨로 적어서 모두 남겼으니,
이를 주묵본(朱墨本), 주묵사라 하였다.
@송덕상은 이런 전통과 전례를 잘 알면서도
노론의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려 이렇게 무리하게 청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론 내부에도 유당처럼 영구폐기를 주장하는 의견이 있는 반면
정조의 스승으로서 의리 탕평론을 폈던 김종수처럼
보존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음을 알았기에
정조의 설득에 곧바로 동의하였다.
@정조는 세손 때부터 해동신감(海東臣鑑), 송사전(宋史筌),
명기제설(明紀提挈), 전사전평(全史銓評)』등을 직접 편찬할 정도로
역사에 깊은 관심과 조예를 지니고 있었으니,
이때 경종실록의 보존은 고민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경종실록이 영구히 폐기되고 3분의 1로 축소된 경종수정실록만 남게 되었다면
경종때의 국정을 균형있게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이며,
‘기록과 보존의 전통’을 생명으로 하는 조선의 실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는 데 큰 흠이 되었을 것이다.
목숨 걸고 당론(黨論)을 고수하던 정치 풍토속에서 분명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 기록임을 알면서도 있는 그대로 남기는 데 동의한 신하들,
그렇게 하도록 설득한 정조, 역사는 후대의 귀감이자 길잡이며 그 평가는
훗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유한한 자신들의 삶을 살아나간 선조들, 새삼 고개 숙여지는 오늘이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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