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07.청운산악회 예봉산
*2012,7,7 팔당역 예봉산 예빈산(견우,직녀)
*다산 정약용(목민심서 등)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18년간 공직~18년간 강진 유배~18년후 사망하였다
.신유사옥(1801년, 순조1)은 대비김씨의 사학금령(邪學禁令)으로 천주교도 300여명을 처형했다
.3째형(정약종)은 천주교관련 책(비품)을 옮기던중 발각되어 사헌부에서 국문을 받았다
정약용(승지), 이가환(공조), 이승훈(천안현감)...
.서소문에서 참수형: 정약종, 이승훈,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고문 옥사(이가환, 권철신...)
.유배: 정약용(포항 장기현), 정약전(강진 신지도)
.정약종의 장남(정철상)도 참수되고, 청나라 신부(주문모)는 의금부에 자수하였으나 처형되었다
@황사영 백서사건
.제천(배론 토굴)에 도피중이던 황사영이 중국(프랑스 선교사)에게 비단편지를 보낸것이 발각되었다
(선교사들이 개입해달라...탄원서, 靑황제가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여 천주교 박해를 중단해 달라!)
.황사영은 즉각 체포되어 능지처참으로 처형되었다
.황사영(16세, 장원급제)은 정약용의 조카사위(큰형, 정약현의 딸)
(황사영의 모친:거제도, 아내:제주도 종살이, 아들:추자도,3세)
.정약용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갖힌뒤...강진으로 18년간 유배
@정약용 강진 초당 유배지에서 많은 인문학 유산을 남겼다
.초당에서 목민심서등 실학서적 집필에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漁父之利이란? 고사도 생겼는데 황새~조개와 양보없는 결투로 노인의 일거양득을 비유했다
.흑산도(정약전 유배)의 상소도 유명하다 “제발 유배를 보내지 말라”
백성들이 유배자들의 뒷바라지가 어려운 형편을 고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정약용보다 24살 연하로써 존경했다
.다산은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 혜장(백련사 주지)과 인연을 맺는다
.호(100여개)를 보담재(寶覃齋)는 스승(覃溪 翁方綱 담계 옹방강)을 “보배롭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옹방강은 소동파를 “보배롭게 모신다”는 의미로써, 서재를 보소제(寶蘇齊)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茶山 語錄 淸賞 (요약)
.경세(警世)...정신을 맑게하는 이야기
.수신(修身)...몸과 마음을 닦는 공부
.처사(處事)...대인접물의 바른 태도
.치학(治學)...공부의 방법과 태도
.독서(讀書)...책을 어떻게 읽을까?
.문예(文藝)...시문 창작과 문예론
.학문(學文)...학문의 엄정함,토론과 연찬
.가거(家居)...거처의 규모와 생활의 법도
.치산(治産)...재산증식과 경제활동
.경제(經濟)...경국제세와 경세치용
@청상(淸賞)이란?... “맑게 감상한다”는 뜻이다
.경세(警世)란?... 정신을 맑게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초서(金少 書)란?... 그저 읽지않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요긴한 대목을 베껴 기록하는 독서법이다
.물고기 그물을 쳐 놓았는데, 기러기가 걸려들면 어찌 버리겠는가? 책을 읽고 메모함은 그러한 이치이다
.책을 읽는것은 “뜻을 구하기 위함”인데, 자칫 멋대로, 함부로 읽으면 사람잡는 선무당이 될수도 있다
古典은 잔재미에 빠지지 말고, 큰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수진본(袖珍本)은 작은 소형책이다
.18c경 소매속에 휴대 가능한 작은 책자(경전)이 인기가 많았다
.수진본(袖珍本)은 누워서 경전을 보면 안되기에 수입을 금지시켰다
@내게 없는 물건을 바라보고 가르키며 “저것”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내게 있는것을 깨달아 굽어보며 “이것”이라 한다
.이미 내몸에 지닌것 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것이 천하의 공통점이다
.기쁨은 먼데 있지않고, 즐거움은 코 앞에 있으므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시비(是非)는 옳고 그름의 저울이고,
.이해(利害)는 이로움과 해로움의 저울이다, 삶의 등급인 셈이다
.첫째는 옳은일을 하다가 이롭게 되는것...이런 행운은 매우 드물고,
.둘째는 옳은일을 하다가 해롭게 되는것...그래서 누구든지 싫어하며,
.셋째는 그른일을 하다가 이롭게 되는것...하던중에 결국 잘못되고만다
.넷째는 그른일을 하다가 해롭게 될까봐 늘 걱정이다
@소일(消日)은 “날을 소비한다”는 늙어서 할만한 일거리도 없고
.의욕도 사라졌을때, 속으로 울면서 하는 말이다, 할일이 없어 하루 해(日)를 써 버리는가?
.심심해 죽겠다?...뭐 좋은거 없어?...참으로 한심한 표현이다
@열복(熱福)은 권력을 다스릴 계책을 듣는 福을 말하지만,
.淸福이란? 세상을 잊고 욕심을 지우며,마음을 닦는 해맑은 福이다
.초야에서 백학 한쌍을 기르며, 거문고와 고경을 쌓아두고
산승이나 羽客(우객)이 왕래하여 세월이 가는줄도 모른다
朝野(조야)가 잘다스려 지는지? 어지러운지? 듣지도 않는거지요
@그때는 죽고 못살 줄 알았다,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다
.다 건너와서 돌아보니, 그때 내가 왜 그랬나 싶었다
.마음이 하는일을 낯빛이 닮아간다, 즉 얼굴은 얼의 꼴(마음의 모습)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온며, 괴로움은 즐거움의 씨앗(뿌리)이다
.애이불비(哀而不悲)?... 슬퍼하되 비탄에 빠지지마라
.낙이불음(樂而不淫)?... 즐거워도 道를 넘어선 안된다
.호연지기(浩然之氣)?... 하늘을 우러러 땅을 굽어 떳떳한 마음이다
마음에 부끄러운일이 없고, 거짓이 없을때에만 깃드는 거룩한 기운 사람의 떳떳한 윤리는 오직 지성(至誠)뿐이다
.그래서 옛 성현은 개과(改過),“허물을 고치는것”을 귀하게 여겼다
@유분(幽憤)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하며 분수만 지키는 것이다
.유분을 품은 사람은 당세에 쓰이지 못하고, 오직 필묵에 남겨
.후세에 펼치기를 바라며, 감내와 침묵속에 가슴속에 서린 분노...
.그 분노를 마음속으로 삭이는 마음을 “고심(苦心)”이라 한다
@百無千計처럼 부질없는 것은 지나친 자손 걱정이다
.누에 고치는 열흘만에 집을 버리며, 제비는 여섯달 후에 둥지를 버린다
.까치는 자기의 둥지를 한해 동안만 사용하고 버린다
@君子는 남의 잘못을 보고 바르게 일러주고,
.따끔하게 일깨워 함께 나가자는 것이 君子의 길이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고요히 몸을 자연에 맡기고 내면으로 침착할뿐 원망하지 않는다
.小人은 남을 헐고 약점을 잡아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소인배이다
.내가 하는대로 남이 나를 대접한다
.남이 나를 함부로 하거든 스스로를 돌아보라
@君子는 이 세상에서 이름과 함께 살아간다
.자신의 이름을 숨길때 “逃名(도명)”
.이름을 남긴다 해서 “양명(揚名)”
.이름이 이르지 않았는데, 이름을 구할 때 “요명(要名)”이다
.이름을 구하는 “요명(要名)”은 너무 천박하여 군자가 하지않으며
.이름을 숨기는 “逃名(도명)”은 너무 높은지라 군자가 하지않는다
@사람에겐 형기(形氣)가 있다
.뉘우침에 따라 狂人(광인)이더라도 능히 생각하면 聖人이 될수있고,
聖人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狂人(광인)이 된다
.따라서, 생각한다는 것은 뉘우침을 말한다 “인색하다”함은 뉘우치지 않음을 뜻하지요...
@“나는 저런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목표를 세우고 공부해야 한다
.똑 같아지기 전에는 멈추지 마라, 이것이 勇氣이다
.순임금은 어떤 사람인가?
.경제의 학문을 하려면, 주공을 닮기위하여 흉내(연습)을 해야 하고
.문장가가 되려면, 유향(劉向)과 한유(韓愈)를 닮아야 한다
.명필가가 되려면, 王羲之(왕희지)와 왕헌지의 필체를 숙달해야 한다
.부자 되려면, 도주공(陶朱公)과 의돈(倚頓)은 어떤 사람인지 연구하라
@사람이 문장을 지님은 초목에 꽃이 피는것과 같다
.바탕없이 꽃만 피운다면, 향기가 없어 나비와 벌이 모이지 않는다
.科文은 과거시험에서 쓰는 글로써,가장 어렵고 실용과는 거리가 멀다
.吏文(이문)은 아전들이 행정업무에 쓰는 실용문으로 요령이 필요하다
.古文은 삶의 지혜가 담긴 글로써, 배우기는 가장 쉽다
@당동벌이(黨同伐異)?
.같으면 패거리 짓고,다르면 공격하는 소인들이다
.안동답답(安東沓沓)이란?... 곧이 곧대로 하던대로만 하는것이다
안동 양반들의 옛것만 고집하는 답답한 표현이다
실험정신~도전정신이 없다는 의미이다
.易經은 보약도 되고, 독약도 된다(시련은 위기이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반관(反觀)은 뒤집어 보는 삐딱한 정신, 모든걸 거꾸로 보는거지요
@論語를 연구하지 않는자는 四書의 밭에 더 이상 이삭이 없다고 한다
.굉보 이강회(紘父 李鋼會)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경학과 예학을 공부하여 억은 결과,
“여기에도 남은 이삭이 있고, 저기에도 빠진 이삭이 있습니다”
.성리학을 하는자를 隱士(은사)라고 부르며, 이것을 공부한 한양사람도 산으로 들어가 버린다해서 山林이다
隱士 때문에 조선은 망했다, 山林 때문에 학문도 모두 죽었다
@勤勉함 속에서 항심(恒心)이 싹튼다, 항심은 삶의 든든한 뒷심이다
.오늘 할수있는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아침나절에 할 일을 저녁까지 늦추지 않는다
@조선은 양반족보를 가짜로 만들어 타지로 이사를 하였고,
.공부를 하지않고 과거시험장에 들락거림은 내가 양반임을 보여준다
.군포를 폐지해고 특권을 없애지 못했다
.조정에서 벼슬하는자를 士라 부르며,들에서 밭을 가는자는 農이다
.農은 園圃(원포)로써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진기한 과실을 심는것은 園(원), 좋은 채소를 가꾸는것은 圃(포)...
@중국에는 생원, 조선에는 양반이 있었다
.고정림은 온 천하사람들이 생원이 될까봐? 걱정을 했다
그러나, 생원은 과거에 참여해야 호칭을 얻지만,
양반은 과거와 상관없이 대물림을 받는 빈 이름 뿐이었다
.생원은 정한 인원이 있었지만, 양반은 한번 얻으면 놓지않는다
.결국, 조선은 양반제도 때문에 백성은 궁핍하고, 나라는 망한다
@양반의 분류
.사환양반은 공적인 직책을 부여 받은자
.행검양반은 효제를 실행하는 자
.문한양반은 글, 공부에만 정진하는 사람이다
.사록은 지방관직으로, 정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망기는 유림 선비로써 서원,향기에서 후손을 가르쳤다
.행봉은 행사를 집전했다
@鄕吏(향리)는 탐욕이 심했다
.범은 포악한 짐승이지만, 배가 부를때면 사슴,돼지를 거들떠 안보며
.사나운 매도 횃대에 앉아 있을때면 날마다 먹이를 사냥하지만,
배가 가득차면 꿩을 만나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전들은 일정한 봉급이 있고,자주 교체되지 않아 큰 욕심이 없었다
.그러나, 鄕吏는 급여도 없었고, 5~6년씩 뽑지도 않아
횡포가 심하여 매우 잔혹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문제는 향리의 판단에, 관례가 사람을 잡는다
예전에 하던대로 하면 핑계를 대기도 좋고, 책임전가도 편하다
더 큰문제가 생기면 감당이 안되므로, 그냥 하던 그대로만 한다
.因循姑息(인수고식)의 태도가 발목을 잡았던 거지요
@다산 정약용의 부인과 딸
.딸의 혼인(윤창모, 강지 대부호 윤광택의 孫子, 1812년)
.부인(홍씨)가 보낸온 헌치마 6폭을 잘라, 4帖(첩)은 두 아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
붉은치마는 결혼시절 입었던 綠衣紅裳(녹의홍상)으로 판단된다
@다산 정약용의 18년간 강진에서 유배공간을 4회 옮겨진다
.1800, 정조 승하, 유배길에 오른다
.1801, 동문밖 주막집(밥집 오두막 노파)
.1805, 寶恩山房, 고성유배
.1806, 鶴來의 집
.1808, 귤동마을, 다산에서 11년간 유배
.호(茶山)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100년후 여유당(종합 모음)에서 사용
.정약용을 大毒으로 여겨 破門壞墻(파문괴장)할 때, 주막에서 돌본다
4년간 머문 四宜齋(사의재, 샘거리)는 “마땅히 지켜야할 네가지”
@다산초당, 백련사(만덕산) 혜장스님(1772~1811)
.윤종진(묘소)의 조부는 정약용 외가친척의 인연으로 다산으로 왔다
.목민심서는 유배종료 5년전에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초당은 팔작기와 지붕(정면;5칸, 측면;2칸)이다
.다산의 바위글씨 “정석(丁石)”
.유배 해제 3년(1821, 회갑),자신의 묘지명을 쓰다
“自撰墓誌銘(자찬묘지명)”에 초당의 모습을 글로 남겼다
.넓은 바위를 茶竈(다조; 차를 다리는곳)라 했다
.현판 “茶山艸堂”은 추사글씨를 집자하였고
“寶丁山房”의 예서는 추사의 친필은 중년의 명작으로 解配후에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으로 추즉된다
.초당옆, 茶山東菴(다산동암)은 정약용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1813, 북어국 백반체 “매화와 새”는 외로움을 새에게 함께 살자고 했다
翩翩飛鳥 息我庭梅 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았네.
有烈其芳 惠然其來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
爰止爰棲 樂爾家室 이제 여기 머물며 너의 집을 삼으렴.
華之旣榮 有蕡其實 만발한 꽃인지라 그 열매도 많단다.
.天一閣, 탐진강 구강포가 내려다 보이는 정자, 天一閣은 당시에 없었다
@초당부근 유일한 친구(벗): 백련사 혜장스님(1772~1811)
.백련사는 바다를 향하고 있다(김제 망해사, 강화도 정수사...)
.대웅전은 팔작다포형(안동 봉정사), 萬景樓와 배롱나무...
.839, 無染선사 창건(성주사문, 충남 보령)
.정약용이 유배당시 혜장스님이 백련사의 주석이었며,
대흥사 12 大講師로 기록된 큰스님이다
@불교의 結社운동이 高麗 무인정권의 정치적인 이념을 받쳐주는데,
.지눌(보조국사)는 송광사(조계산)에서 修禪결사를 맺으며 선종을 개혁하여 조계종을 확립한다
이때, 圓妙스님(원묘, 속명;徐了世 서료세)은 지눌대사의 친구로써
백련결사를 조직해서 교종 천태종의 법맥을 이어간다
.圓妙스님은 지방호족 출신이다
.최씨정권과 밀착하여 강진지방 호족(최표,최홍,이인천...)후원으로 백련사를 중건하였다(1211~7년간, 80여칸)
.이후 120년간, 8명의 국사를 배출한 명찰이었다
.왜구의 잦은 출몰로 햬안부근 40리까지 사람이 살 수 없어 폐사되었다
.구강포 맞은편, 고려청자의 가마터도 문을 닫는다
@백련사는 민간신앙으로 전락한 불교시대에 行乎스님(행호)이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중창을 하였는데,이때 금산사, 법주사, 화엄사도 중창된다
.효령대군(이보)은 망원정(한강변)을 세우고, 현재 방배역 부근의 청권사가 사당~묘역이다
.태종(이방원)의 둘째 아들로써, 태자가 폐위되자 욕심을 내었으나
양녕대군의 설득으로 불교입문으로 90세까지 장수하였다
@백련사 효령대군의 사적비는 조종저(홍문관 수찬)가 찬하고,
.왕손중에 명필이었던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의 필체이다
.비액의 전(篆)은 그의 동생 낭원군(朗原君) 이간(李간)이 쓴다
.받침대 돌고북과 머리지붕은 원묘국사비(명문장 최자의 글임)은 깨어 없어진 그대로 남아있다
.行乎스님은 백련사를 중창할 때 왜구방어를 위하여 토성을 축성하여 행호산성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눌 12호)으로 가려진 곳이다
.1760년 화재소실되어 2년간 중건되어 현재의 모습이다
.대웅보전, 만경루의 현판은 圓嶠 李匡師의 필체이며 후불탱화, 삼장탱화도 이때 봉안된 것이다
정약용과 황상(아름다운 인연을 배워라!)
@삶을 바꾼 만남(스승과 제자), 다산 정약용과 황상의 인연
“어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지금의 내 눈으로가 아닌 당시의 시선에서
볼 때도 그랬다. 이름 없는 시골 아전의 아들이 멋진 스승과 만나
빚어낸 조화의 선율은 그때도 많은 사람을 열광케 했다.”
@황상(1788~1870)은 잘 알려진 사람이 아니다.
.벼슬길에 오르지도 않았고 이렇다 할 학문적 업적도 없었다.
.그러나 스승과 두터운 정을 쌓은 모습은 역사에 남을 만했다.
.황상에게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라고 가르친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이 죽기 며칠전 18년만에 찾아온 제자 황상에게 써준 선물 목록
“황자중에게 준다. 규장전운 한권, 중국 붓 한자루. 중국 먹 한 개, 부채 한자루, 연배 한배, 여비 돈 두냥...”
.마지막까지 제자에게 면학을 당부한 다산의 마음이 절절하다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은 편지와 시문이 현재까지 전해온다
@책, 인연을 만드는 기술(진실하고 선하고 인내하기)
.황상과 스승 정약용, 정약용의 맏아들 정학연 세 사람의 이야기
.아름다운 인연은 기다림의 미학이라 이름 붙여도 지나치지 않다.
편지 한통 보내놓고도 몇달씩 기다려야 했다.
.황상은 “살아서는 네 편지를 다시는 받아보지 못하겠구나” 하는
스승의 편지를 받고 7년이 지나서야 정약용을 찾아온다.
.정약용의 병상을 지키던 맏아들 정학연이 찾아온 황상을 몰라보고
“뉘신지요?” 하였으나, 황상이란 걸 뒤 늦게서야 알고서
“이 사람아! 이 사람아! 이게 누군가, 이 사람아! 이 무심한 사람아!”
.감격해하는 장면은 어떤 사극보다도 심금을 울린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 공부를 게을리하던 황상에게 다산이 편지를 보냈다
.이때 혼낸게 아니라 “내외가 따로 자라”고 했다.
“네 말씨와 외모, 행동을 보니 점점 태만해져서, 규방 가운데서 멋대로
놀며 빠져 지내느라 문학 공부는 어느새 까마득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한다면 못나고 어리석은 인간이 된 뒤라야 그칠 것이다.
텅 비어 실지가 없으니 소견이 참으로 걱정스럽구나.
내가 너를 몹시 아꼈기에 마음속으로 슬퍼하고 탄식한것이 오래다.
진실로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뜻을 고쳐, 내외가 따로 거처하도록 해라.
마음을 오로지하여 글공부에 힘을 쏟을 수 없다면,
글이 안 될 뿐 아니라 병약해져서 오래 살 수도 없을 터.”
@스승 편지에 황상은 화들짝 놀라 마음을 다잡고 승방에 올라가 공부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란 사생활 개념을 초탈한 듯하다.
.스승은 제자의 해이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못할 말이 없었다.
.전혀 몸을 사리지 않는 정약용의 글에서 제자를 책임지려는 진실한 마음이 읽힌다.
.훗날, 황상에게 후사가 없자 정약용은 안쓰러운 마음에 황상에게
보약을 처방하고, 황상은 얼마 안 가 아들을 얻는다.
@유배중에 둘째아들 정학유가 생계를 위해 양계를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정약용은 아들에게 “양계는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양계에도 또한 우아하고 저속하고, 맑고 탁한 차이가 있느니라”며
농서를 익혀 좋은 방법을 가려 시험해보고,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묘사해보기도 하라고 편지를 보낸다.
.이익만 따지고 의리는 못 보거나, 운치는 모르면서 기르기에만 골몰해
이웃 채마밭 노인과 다툴까 걱정하는 등 도덕도 강조한다.
.병아리가 협력해 개를 막아내는 모습을 보고 우애의 도리도 가르친다.
“세상에 공부 아닌 것이 없다”는 게 정약용의 지론이다.
@맏아들 정학연이 오랜만에 만난 황상에게 시문을 남긴다
“남북의 명산을 함께 노닐고, 그 광경을 시문으로 남겨 흉금을 터놓을 수
있다면, 잠깐 살다 가는 세상에서 이보다 상쾌한 일이 있겠는가?”
@다산 정약용의 고아한 정신세계를 엿볼수있는 시
.꿈속에서 미인이 추파를 던지자 깨어나서
“이 마음은 금강의 쇳덩이로 되었나니, 풍로가 있다 한들 네가 나를 어이하리”
.귀양살이 대한 감회도 털어 놓았다
“하늘이 욕심 많음 깨뜨리려고, 내게 3년 귀양살이 내리셨구나”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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