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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동우회(2014-2015)

2016-0629.회장동우회 회장 이취임식

by 조흥식 2023. 4. 24.

2016-0629.회장동우회 회장 이취임식(신현종, 김동한, 리베라호텔)

늦봄의 단상

 

 

 

 

늦봄의 단상

@홍경모(洪敬謨 1774~1851), 관암전서(冠巖全書)

창고를 점고하다 보니 유춘헌이란 편액이 있었는데, 이는 조부가 쓰신 글씨였다.

어느 곳에 걸려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창고에 방치된 물건이 되었기에

먹을 다시 칠해서 향설헌 앞쪽 문미에 걸었다

 

어느 누정의 편액을 유춘이라 했으며 조부님 글씨가 먼지에 묻힌 세월이 몇 해나 됐을까

이렇게 내가 편액을 발견하게 된 것 우연이 아니어라 처마 끝에 높이 달고 보니 먹빛이 새롭구나

3월 꾀꼬리가 노래하는 어느 새벽 꽃이 핀 지 얼마 안 됐건만 또 꽃이 지네

향설헌 문미에 유춘이란 편액을 새로 거니 이제 봄빛이 느릿느릿 흘러가겠구나

 

@안변(安邊) 관아에 누정이 있었다.

이름은 향설헌(香雪軒)으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

부사(府使)로 재직할 당시에 관아 건물을 지었는데,

그 뜰에 배나무를 심고 누정을 지은 후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했다.

이백여 년 후 부사가 된 홍경모가 배꽃이 만발한 어느 봄날

이곳에서 노닐었는데, 그때 지은 시의 주석에 이런 내력이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봄이 끝나가는 3월 어느 날 안변 관아의 창고에서

홍경모는 선조부(先祖父)인 홍양호(洪良浩 1724~1802)직접 쓴 편액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는 한창 만발해 있던 꽃잎이 져가고 있던 차였다.

꽃잎이 한 장씩 땅에 떨어질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서 봄이 한 걸음씩 떠나가고 있었다.

그에게 꽃은 곧 봄이었다.

변심한 정인이라면 소매라도 붙들고 잡아보련만 꽃은, 봄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나타난 것이 바로 선조부의 친필 편액이었으니,

어쩌면 하늘이 그를 기다려 편액이 나타나게 한 뜻이 있었을까.

편액을 보니, 같은 피를 가진 분이라 그의 마음을 먼저 알았던 것일까.

봄이 떠나가는 것을 만류하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과 꼭 같은 뜻의 글귀였다

 

@하긴 그와 선조부는 여느 다른 조손(祖孫) 사이와는 달랐다.

겨우 세 살 때 부친을 여읜 그에게 선조부는 때론 엄한 아버지요, 때론 자애로운 할아버지였으리라.

문형(文衡)을 지낸 선조부는 자칫 고아라고 괄시당할 수 있었을 그의 든든한 뒷배였을 터였다.

그런 분을 이십 대 후반에 잃고 또 십여 년이 흘러 그도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이젠 무감각해질 만도 하건만 꽃이, 봄이, 그리고 세월이 떠나가는 것이 아쉽고 서글프다.

아니, 그런 마음은 오히려 더해만 간다.

선조부가 저 편액을 몇 세 때 썼는지 모르겠지만,

선조부가 세상을 떠날 당시 홍안의 청년이었던 그도 어느덧 손주를 볼 나이가 되었다.

선조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편액을 새로 칠하고 이화우(梨花雨) 흩날리는 향설헌에 높이 건다.

배꽃이 비오듯 떨어지는 그 슬프도록 눈부신 광경앞에 눈앞이 아득해진다.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서글프기도 하지만 든든하기도 했으리라.

 

@이제 사람은 가고 향설헌은 북녘 땅에 있어 존재유무조차도 알 길이 없다.

그저 시 몇 줄만이 남아 그들의 봄을 증거 해 줄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이 봄은 무엇이 증거 해 줄 것인가.

내 마음인 듯 활짝 피었다 진 꽃잎을 바라보며 쓸쓸히 몇 줄 끄적여본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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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