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28.종로상공회 북한산 야간등산
*2012,7,28 우이동 도선사~용암문~동장대~대남문~구기동계곡
*隱者(숨어사는 知慧~빙의)
*채미헌(백이, 숙제), 논공행상(수양산 개자추)
*거칠현동(고려칠현, 두문불출), 죽림칠현
*은사(남명 조식), 거창 선천재(소부, 허유), 청맹과니
*안동김씨 김수증
*자하 신위(란)
隱者(숨어사는 知慧, 빙의)
@하수상할때 잘못 나서면 뒤끝이 좋지 않다.
.그래서 세상을 피해 숨는 은자(隱者)들이 있었다.
.隱者는 야은(野隱)과 이은(吏隱)으로 나눈다.
야은(野隱)은 초야에 숨어 살고,
이은(吏隱)은 낮은 벼슬이나 장사등을 하면서 세상속에 숨어 살았다
.이제, 스스로에게 바쁜 고삐를 풀어주는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老子는 그것은 “허정(虛靜)의 시간” 이라고 정의했다
@채미헌(採薇軒) 고죽국 왕자: 백이+숙제(不事二君)
.周문왕(서백)을 덕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찿아갔으나,
이미 죽은 직후였다
.殷주왕(달기, 강여상, 봉신방)을 토벌하러 진군하는 말고삐를 잡고,
상나라 벌주 토벌을 반대했으나, 목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수양산으로 은거하며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죽었다
.백이와 숙제 묘비에는 글씨가 없다(白碑)
수양산 청풍대(연암 박지원의 사신로에 있다, 열하일기)
@개자추, 논공행상을 거절하다(춘추시대)
.개자추는 진문공(중이, 19년간 10국)이 유랑시절
.주군에게 엉덩이살을 떼어서 고깃국을 대접하였다
.진문공이 즉위후, 논공행상을 거절하고 면산으로 은신하자,
.3일간 수색후 산불을 피워 하산을 촉구했으나 끝까지 거부한다
.모친과 함께 불에 타죽은 개자추를 위해 불을 못 피우도록
목탁으로 백성들에게 알리고, 찬밥을 먹으며 추모하였다
*寒食의 유래: 3일간 찬밥과 대추죽을 먹었다...사당도 세우다
*면산을 禁山(불못피우는..), 개산(개자추 산)으로 개칭하였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天地變化, 草木蕃, 天地閉, 賢人隱
“하늘과 땅이 변화하면 풀과 나무가 무성하지만,
하늘과 땅이 막히면 어진 이가 숨는다”는 뜻이다.
@孔子는 14년간 주유(周遊)하던 시절에 여러 隱者를 만났다.
.자로에게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는가?” 라고
조롱했던 걸닉(桀溺)이 野隱(야은)이라면,
孔子를 “안 될것을 알면서도 하는 사람이다?” 라고 비웃었던
성문지기는 吏隱(이은)이었다.
.孔子는 자로에게 걸닉(桀溺)의 조롱을 전해듣고 크게 낙담하면서도,
“새, 짐승과 무리지어 살수 없으니, 내가 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라고 반박했다.
@남사(南史) “도홍경 열전”
.양(梁) 무제(武帝)가 모산(茅山)에 隱居한 도홍경(陶弘景)을 부르자,
소 두마리 그림으로 거절했다.
한 마리는 수초(水草) 사이에서 노니는 소였고,
한 마리는 머리에 금롱(金籠)을 쓰고 채찍을 맞는 소였는데,
양무제가 웃으면서 등용을 포기했다고 한다
.隱者들은 단순히 세상 꼴보기 싫어서 隱居한 것이 아니라,
天地의 氣運이 막힌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서(漢書) “왕공양공포 열전”을 열어보라!
.촉(蜀)땅의 엄군평(嚴君平)이란 복사(卜師)도 吏隱이다.
.그는 “점치는 것은 天業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준다”면서
하루 100전(錢)만 벌면 문을 닫고 노자(老子)를 공부했다.
@죽림칠현(竹林七賢, 魏~晉 전환기)
.칠현(七賢): 완적(阮籍), 혜강(嵆康), 산도(山濤), 상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
.정치 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7명의 自己韜晦(자기도회) 선비들이다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이 근본 사상이었다
(언제나 竹林아래 모인 士君子는 거칠것 없이 술을 마셨다)
@隱者(은자)라고 모두 고종명(考終命) 하는것은 아니다.
.위(魏) 혜강(?康)은 “죽림칠현(竹林七賢)” 이었지만 사형을 당했다
죽기 직전 “내가 죽은 후에는 이 곡(曲)이 전하지 않을 것” 이라면서
광릉산(廣陵散)을 연주한 일화가 유명하다.
@忠武公 이순신이 “露粱海戰에서 죽지 않고 神仙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소인배들의 世上과 맞지 않았던 그의 운명에 안타까움이 만든 말이다
.지금 세상에서 필요한 人才는 누구인가?
.그럴듯한 명분으로 권력욕을 드러내는 似而非 隱者가 아니라,
孔子처럼 조롱을 당하면서도 “이 사람들과 더불어” 조롱받는
自身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孔子나 忠武公(이순신)이 자기 한 몸만 건사하려 했다면,
세상은 어찌 되었겠는가?
.숨은 隱者보다 묻힌 人才들을 알아보는 사회가 되기를 바랄뿐이다
.요즘 세상은 붓 한자루에 사해(史海)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徵士(징사), 명재 윤증
@朝鮮의 徵士(징사)는 명재 윤증(파평윤씨)이다
.명분없는 벼슬을 20여번 거절한 선비로 유명하다
이를테면, 인생말년에 벼슬과의 戰爭이었다
.81세, 右議政 사양 상소를 8회 올리고,
.83세, 判中樞府事 사임상소를 9회 올린다
.인조~효종~현종~숙종: 임금얼굴을 한번도 보지않고
立身揚名을 성취한 대표 선비로 칭한다
@윤증 遺言 “제사상의 크기를 90cm이상 하지마라”
“묘비에 徵士(징사)만 써라”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던 선비를 말한다
.55세(숙종9년, 1683, 庚申還國이후), 벼슬을 응하려 했었으나 포기한다
정3품(호조참의)를 제의받고 漢陽으로 上京하던중,
과천 나좌량(동문수학)의 집을 방문하여 남계 박세채와 담판하였다
懷尼是非(회니시비, 1684)가 일어나기 1년전에 만난 이유는
윤증의 입궐여부를 놓고 밤새워 討論을 한것이다
.만난 이유는 숙종이 三人同事(삼인동사)를 하명했기 때문이다
.三人同事란? 3명(송시열, 윤증, 박세채)에게 政權을 맡긴셈이다
.성격이 전혀 다른 3명에게 협력정치를 주문한것이다
@입각 3대 명분(南人관련)
1)西人은 南人의 쌓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2)外戚(외척)의 勢道를 막지 않으면 안된다
3)당이 다른자는 배척하고, 당에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지금의 잘못된 인사풍토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첫째조건은 南人(嶺南學派)의 차별과
地域感情을 解消하는 방안이었다
*박세채는 3가지 조건이 不可能하다고 結論을 내린다
명재 윤증의 조건을 本人의 힘으로 풀어줄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3가지 조건이 不可能하다면 나도 벼슬에 들어갈수 없다”
.남계 박세채도 공감하고, 출사를 포기하고 집으로 落鄕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송시열도 속리산(괴산 화양동계곡)으로 落鄕한다
.다음해, 西人이 분열된다(노론 송시열~소론 윤증...)
處士, 남명 조식
@朝鮮時代 대표적인 處士(처사)는 남명 조식이다
.지리산 덕산(德山)의 위대한 處士, 山天齎(서재), 德川書院
“왕비 배출가문보다 대제학 가문이 높고, 그보다 문묘 배향자 가문이
더 높고, 處士를 배출한 가문은 가장 높았다”고 평가하였다
.휴대품: 방울(경계심)+칼(욕심 제거), 생각+행동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처가(김해, 외가)로 내려와 山海亭을 짓고 제자를 양성한다
.회재 이언적과 退溪의 추천으로 등용되었으나, 거절한 백면 서생이다
.정통유학, 백가사상, 노장사상을 통달하였으며,
“한유(閑遊)하는 공자” 별칭을 얻는다
@회갑(61세), 덕산에 山天齋를 짓고 詩(산천재 주련)를 지었다
.周易에 산천재를 인용하였다(강건하고 독실하여 그빛이 날로 새롭다...)
.덕천강가 산천재의 벽화가 남아있다(정면벽화: 노인4명 바둑놀이)
.우측그림(농부가 소를 몰고가는 모습)
巢夫와 許由가 복거할 때 “관직에서 나오라”는 전갈을 듣고,
“귀 버렸다”하면서 냇가에 내려가 귀를 씻는 모습과,
귀씻은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수 없다고 끌고 올라가는 모습이다
@許由(허유)와 巢夫(소부)이야기
堯(요)임금은 許由(허유)에게 양위를 원했으나 거절하였다하며,
결국, 순(舜)~우(禹)에게 물려준다
“許由(허유)가 귀를 씻었다”는 소문을 巢夫(소부)가 낸것이다
@묘소는 명당(二水三山),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제자들이 호화로운 비문을 4개를 세웠으나, 3개는 쓰러져 있다
.평소 겉치레, 허명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빙의(삶의 향기, 고난의 유익함)
@빙의(憑依)란 무엇인가?
“다른 것에 몸이나 마음을 기댐” ~ “靈魂이 옮겨 붙음”
.옷을 통해 옮겨가는 건 靈魂이 아니라 靈感이다
.처지가 다른 사람에게로 상상이 벽을 타고 넘는다면 그것이 빙의다
@“산 넘어 산”이란? 고행을 의미한다
“If I were you”이란? “내가 너라면?” 무슨 느낌을 가질까?
.요즘 대통령 출마 선언이 요란한데, 슬로건도 십인십색이다
.빙의 장면에도 배경음악은 보약이다
@귀한것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천한 것일 수도있고 흔한 것일수도 있다.
.중요한 건 흔한것이 천한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기도 흔하고 물도 흔하지만 그것들은 천하지 않고 귀한 존재들이다
.흔한 게 귀한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세상은 음악소리로 가득 차게 된다.
연강재(練江齋) 문후(文後)
@연강재(練江齋) 문후(文後)도 處士이다
.남명 조식의 제자로써, 남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것이다
.壬辰倭亂과 丁酉再亂때문에 과거시험를 포기하고
.29세, 금성리 덕천강가에 연강정을 짓고 평생 학문에 매진하였다
.연강정은 練江齋 文後(문후)가 29세(1602년)에 연강정을 세웠다
일생 동안 벼슬하러 나가지 않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하기 위함이다
여러번 중수하여, 현재의 모습은 1991년에 재건한 형태이다
.최초 송로정(送老亭)이라 부른것은 벼슬하지 않고, 노년까지 보내겠다는
의미였으나, 훗날 연강정으로 개명한것은 정자 주변의 자연환경 때문이다
高麗七賢(居七賢洞)
@고려말기 충신들의 “杜門不出”(두문불출, 72명)
.개풍군 두문동에서 草根木皮, 회유실패하자 불바다로 살육하였다
.三隱(절의를 지킨 3처사), 공주 동학사 경내 “삼은각비문(三隱閣碑文)
.목은 이색(牧隱 李穡),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야은 길재(冶隱 吉再)
@居七賢洞(거칠현동)
.황해도 개풍군 두문동을 떠나 깊은 산중으로 몸을 숨겼다(隱居 7인)
(1)어주 전오륜(漁洲 全五倫 1631-1720)은 정선군으로 낙향한다
.전오륜(7현)의 조상의 故鄕(정선전氏 시조...정선군 남면 낙동리)
.採薇軒(채미헌)으로 연명한다 “고사리를 뜯어 먹고 사는 사람”
*당시 용궁현감 이지석(李志奭)이 전오륜의 효행을 듣고,
“내무당(萊舞堂)” 현판을 써 주었다
(周나라 효자 “노래자(老萊子)”가 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해
70세에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 놀이를 하며 춤을 추던 집)
(2)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은 원주로 은거, 목은 이색과 자주 만난다
.原州원氏 중시조(90세), 한사(寒士), 끝까지 충신의 절개 志節
.이성계, 정도전과 절친했지만 不事二君 隱者이다
.치악산에서 개성을 생각하며 草根木皮(솔잎, 껍질, 술)
.태종(이방원)은 스승을 직접 찿아 갔지만 피한다(1415년, 太宗臺)
(3)야은 길재(冶隱 吉再): 선산에 은거하며...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
.정종(2대)~태종(3대)이 입궐을 요청했으나 정중히 사양한다
.선산출신으로 이방원과 성균관 동문수학 동창이었다
.유별나게 청렴하여, 새벽닭이 울면 의관을 차리고 사당을 찾았다
(4)송은 구홍(松隱 具鴻)
.두문동기(杜門洞記) 杜門目靖 德配殷仁 七十諸賢 壹體同心
(문 닫고 스스로 진정하니 그 덕이 은인(殷仁)과 짝 하네.
70명의 제현(諸賢)들 한 몸에 같은 마음일세)
(5)목은 이색(牧隱 李穡)은 여주로 낙향, 원천석(원주)과 절친했다
.제자들의 結黨謀亂으로 유배된다(제자: 권근. 김종직. 변계량...)
(6)충제 최문한(忠濟 崔文漢)은 강릉으로 은거(좌시중: 영의정급)
.江陵최씨 중시조, 숭명공주와 혼인(27대 충숙왕의 딸, 사위)
.고려말, 소나무 8그루 싣고 강릉으로 피신하였다
(7)서견(徐甄)은 이천으로 유배되었다(淸白吏), 이천서씨 중시조
.관악산 연주암에 은거하면서 개성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의상대사가 의상대(연주암)를 창건후 수도하였다(문무왕, 677년)
이어서, 관악사도 창건하였다
.고려말 충신(서견, 강득룡, 남을진)이 은거하였다
의상대에서 송악(고려왕조)을 쳐다보며, 그리워 연주대로 칭했다
.양녕대군, 효령대군의 유랑길에 관악사에 은거하였다
40칸의 현위치에 관악사를 창건하고, 한양궁궐을 바라 보았다
의상대를 연주대라 칭하고,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불렀다
김수증(先안동김씨)
@김수증(김상헌의 손자)은 서예, 금석문에 명성이 높다
.동생(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
벼슬을 버리고, 화천에서 농사지으며 은일한다
.은둔의 삶속에서 멋을 추구했던 朱子의 행적을 모방한 것이다
.谷雲이라 칭하고, 조세걸(평양출신 문인화가)에게 경치좋은 9곳을 정해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를 그리게 하였다
(띠집, 백성들의 농사짓는 모습, 닭, 개, 소, 나귀, 가축, 동물...)
.김수증은 조세걸과 일일이 계곡을 답사하면서 어떻게 그릴것인가?
일일이 지도하면서, 거울에 반사되듯 사실적으로 그리게했다
.당시 지식인 층에서 九曲圖도 유행이었다
.朱子를 흠모했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의 無爲九曲圖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많은 사람들이 그린것이다
.栗谷도 해주 석담(황해도)을 담은 고산구곡을 그리게 하였으나,
구곡도에는 조선의 산천을 사생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김창협(김수증의 조카)의 곡운구곡도 발문을 보면,
“곡운구곡도를 통하여 김수증의 진경산수의 개념을 실천으로
보여줬다면, 김창협은 이렇듯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것이다”
청맹과니(靑盲)
@당달봉사(눈뜬장님):정치에 등을 돌리고 처신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눈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상대가 아무리 그래봐도 끄떡없다)
@조운흘(강릉부사): 광주에 은거하였다(조선초기)
.첩은 진짜 장님이 된줄 알고, 그의 아들과 불륜을 즐겼다
.몇년후, 조선이 안정되자 눈을 비비면서 눈병이 낳았다면서
첩을 강물에 던져 죽여버린다
@이맹권(세조정란 생육신), 선산 강정리로 은둔하였다
.30년간 청맹과니, 가족들도 임종시에 눈뜬 장님임을 알았다
.가세가 기울어 “수저가 부족해 돌아가며 식사를 했다”
.그는 임금(수양대군)쪽으로 앉지도 않았다
@구인문(세조정란, 집현전 학자)은 해미(서산)에서 청맹을 했다
.성삼문이 찾아와 문안을 하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장님이 사용하는 지팡이를 짚고, 온천 나들이도 했다
@靑坡 奇虔(청파 기건, 청백리, 세종~세조)
.淑明女大 청파동(靑坡) 유래가 된것이다
.제주목사 시절, 海女의 노고때문에 3년간 전복+해삼을 먹지않았고,
.연안부사 시절에는 붕어찜을 사양했다
.청렴결백+강직한 처신으로 世宗의 신임을 받은 상민출신 대사헌,
.청파동(靑坡)에서 초헌(가마)을 멀리하고, 창덕궁까지 걸어다녔다
.단종(端宗)이 폐위되자,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며 장님행세를 하였다
.오고초려(五顧草廬), 수양대군이 직접 5번 찾아갔지만 거절한다
일부러 바늘로 눈을 찔러보았지만, 눈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紫霞 申緯(1769~1845)
@隱居하러 떠나는 친구를 보내며
“問君何事厭囂塵 盡室坡山訪隱淪 酒熟茶香花月夕 忘年記否舊東隣”
(問君何事厭囂塵 盡室坡山訪隱淪 酒熟茶香花月夕 忘年記否舊東隣)
“자네는 왜 俗世를 싫어하여, 家族을 데리고 파주로 隱居하려 하는가?
술익고 茶 香氣로운 꽃피는 달밤이면,
친구여 옛 이웃인 나를 記憶하려나?”
.친구는 俗世가 싫어졌다며 家族들을 데리고 이사를 간다고 한다
.꽃이 만발한 봄날에 함께 달 아래서 술을 마시고 茶를 마시던 친구!
.이젠 그에 관한 모든 것들을 追憶이라는 空間에 넣어두어야 한다
.追憶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울수록 離別후의 심정이 더욱 애절하게 된다
당시 紫霞 申緯(자하 신위)는 70세가 넘은 老年이었으니까...
@과천향교는 무학대사의 제자 10명이 세웠다
.과천향교 계곡을 따라 오르면 연주암이 있다(3.2km, 약80분 소요)
.이 계곡은 조선말기 詩書畵에 능했던 紫霞 申緯의 집이 있다
.자하 신위의 호를 인용하여 “紫霞洞天”이라 불린다
@紫霞 申緯, 난초그림을 보면서...(題錦城女史藝香畵蘭)
.畵人難畵恨 사람은 그려도 恨은 그리긴 어렵고
.畵蘭難畵香 난초는 그려도 香氣는 그리기 어렵네
.畵香兼畵恨 香氣를 그린데다 恨마져 그렸으니
.應斷畵時腸 이그림 그릴때, 그대 애가 끊겼을테지...
@지족당 권만두의 詩(1674~1753)도 볼만하다
“老去漸知讀書好 竆來偏覺結交難”(로거점지독서호 궁래편각결교난)
“늙어 갈수록 점차 책 읽는 재미를 알겠고,
궁해 질수록 친구 맺기 어려움을 실감하네”
.사람이 늙고 궁해지면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레 멀어지게 마련이고,
결국 진정한 친구 몇몇만이 내 곁에 남을 것이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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