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22.국제로타리 3650지구 월례회 아가페로타리클럽(김형주 회장)
*2012,8,22,수,07:00~하이얏트호텔
*德을 베풀어라!(강진김씨, 정읍 평사리)
*정감록, 전국풍수지리 길지(명당터)
德을 베풀어라!(강진김씨, 정읍 평사리)
@기부의 아름다움 “살아오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기부하는 것이었다”
“노점상 할머니 유양선! 그는 주지 못하는 마음이 가장 가슴이
아팠다면서 전액을 기부하였다”
“태릉시장 노점상들이 20년째, 매일 1000원씩 모아서 기부하는
이유는 우리보다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서이다”
“어떤 구두쇠 부부는 350억원을 기부하고, 26평 실버타운으로...”
“경남 함양 할머니는 염소 팔아 전액을 기부하고 산속에서 살아...”
@楊朱(양주: 제자백가)의 인생관
.輕物重生(경물중생): 외물(名利)을 가볍게 여기고, 生命을 중시한다
.生命보다 중요한것은 세상에 없다는 이론이다
.풍우란(馮友蘭)은 경물중생을 보충 설명하였다(중국철학사)
.돈(財物)과 벼슬에 집착하여 몸을 망치지 말라는 충고이다
.개인의 自由와 生命을 존중하다보니, 大自然을 찬미하는 쪽으로 기울어
無爲自然의 道家思想은 오늘날 반전 사상가, 생태학자, 여성운동가...
風水사상과 사람들의 정서와 부합되기 때문이다
.朝鮮의 대표적인 道士는 정북창, 이토정, 류겸암, 남사고...
@정감록의 십승지(十勝地)란?
“風水的 유토피아를 말한다”
1)경북 풍기: 수리바위 금계 동쪽골짜기(소백산 두물 사이에 있다)
2)화산(안동의 옛지명): 소라국 옛터 청양현
(봉화 동쪽마을 지나서 들어간다)
3)보은 속리산 증항 일대(亂을 만나 몸을 숨기면 다치지 않는다)
4)남원 운봉 행촌
5)예천 금당실(이 땅에는 病禍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王의 수레가 닦치면 그렇지 않다
6)공주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 둘레가 200리가 되어 피난할만 하다
7)영월 정동(연하리): 亂을 피해 종적을 감출만하다
그러나, 수염없는 사람? 승려가 먼저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8)무주 무풍산 북쪽 동방상동: 어느곳을 막론하고 피할만 하다
9)부안 호암밑: 가장 기이하다
10)합천 가야산 만수동: 둘레가 200리로써 오래토록 몸을 숨길수 있다
동북쪽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도 亂을 피할만한 곳이다
@3가지 공통점(최어중 이론)
1)精神的으로 오랜 시간동안 土俗信仰의 聖地였던 곳이다
(풍수적으로 吉地이었다)
2)經濟的으로 食糧을 自給自足할수있는 넓은 農土가 있는 마을이다
(약초, 산삼도 넉넉한 곳이 많다)
3)戰略的으로 험준한 道나 郡의 경계부근으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다
(다른 십승지와 쉽게 연결될수 있는 지형으로,
官軍의 攻擊을 받아도 주민들이 인접 십승지로 피할수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동학혁명, 6.25사변에도 피해가 없었다
.반란 사건(이인좌, 홍경래, 이괄, 이필제, 정여립, 정희량)을 피하고
.각종 明火的 출몰이 있었고, 염병(장티푸스),호열자(콜레라)도 피해갔다
.정도령이 출현을 고대했던 術士, 전국을 떠도는 죄인의 피신처,
체제에 탄압받아 도피하는 知識人들의 안식처였다
.山과 生命을 중시했던 道家들은 風水圖讖(풍수도참)의 대표적 秘訣書는
정감록, 격암유록을 꼽을수 있다
@정읍의 陰宅(회음산)과 陽宅(평사낙안, 平沙落雁)
.평사리의 風水地理(4대요소 명당)
1)오지마을(전주, 정읍에서 70~80리 내륙, 노령산맥의 깊은 산골)
2)風水圖讖(도참)에 의해 선택받은 明堂이 많은 동네이다
3)산골인데도 自給自足 할수있는 넓은 平野가 있다
4)구한말~일제시대(사회적 혼란기), 客地에서 많은 이주를 해왔다
.일제시대 八道村으로 변화하였다
.平沙落雁이란?
“평평한 모래밭에 기러기가 내려와 앉은 형국, 陽宅(명당 집터)”
@평사리의 혈터(규당 김영채 古宅, 1000석꾼)
.이서구(전라감사, 1754~1825)는 평사리의 3군데 혈터를 예언하였다
상대(上垈): 공자, 맹자와 같은 道學君子가 배출되고,
중대(中垈): 천하문장이 탄생하고,
하대(下垈): 천하갑부가 태어난다
.평사리는 직경 4km의 좁은 공간에 많은 명당터를 가졌다
1)死稚穴(사치혈): 죽은 꿩을 나무에 걸어놓은 형국
당시, 소문난 양대吉地 死稚穴(사치혈)은 원산과 평사낙안을 꼽았다
2)玉女織錦(옥녀직금):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
옥녀직금~직금실~지금실로 칭한다
*평사리는 김개남이 태어난 동네이다(東學농민혁명 3대장군)
.6세 무렵, 母親을 따라 木花밭을 갔는데, 지나던 道僧이 한숨쉬었다
“좋긴 좋다마는 時運을 못타고 났구나...” 母親의 고민이 깊어졌다
.전봉준(녹두장군)도 평사리 동곡마을에서 신혼초에 거주하였다
3)蜈蚣穴(오공혈): 지네 형국
김동수 古宅은 전형적인 부잣집 저택이다
(1700년대 후반에 10년간의 정성으로 건축)
4)蓮花倒水(연화도수): 연꽃이 물가에 피어있는 형국
*박효수 가문
평사리 내능(內菱)에 박효수는 해남의 富者였으나 이사해온 것이다
그는 史記(司馬遷), 東洋古典, 풍수도참에 해박한 지식층 인물이다
동생(박철수)은 전남도지사
아들(박동희)은 중소기업은행장, 주택은행장을 역임하였다
*도화동에는 호남의 명문 창평고씨(장흥)들이 이주해 왔다
*진계마을에는 송정근(여산송씨)의 가문이 살았다
*운전마을에는 김병호(대구 갑부, 만석꾼)이 찿아 들어왔다
@전라북도는 民族宗敎가 태동한 발상지이다
.동학, 원불교, 보천교(정읍 입암산 대흥리), 도교, 풍수도참, 방술...
.모악산 금산사 아래 구릿골, 원평 일대에 모여 들었다
“상도(전라북도)로 가자”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김제 만경평야의 풍부한 곡식으로 術士들이 寄生(기생)하였다
@규당 김영채(강진김씨, 옛지명: 도강김씨))
.구한말, 전주 慶氣殿(태조 이성계의 영정)의 참봉, 낮은 계급이었으나,
學行과 德望으로 주변에서 尊敬받은 인물이다
.칠보, 태인에서 500년간 鄕班(지방 양반)으로 내부적으로 실속이 많았다
@入鄕調 중조 김덕방
이방원 사태(태종, 1413, 민무구와 민무질의 처형/처남)를 피하여
南落하여 남전마을(정읍 칠보)에 정착하였다
김덕방의 父親(김회련)도 당시 참살을 당하였던 것이다
김덕방의 부인(여흥민씨)은 원경왕후(1365~1420)와 집안이었고,
울산김씨(민씨 할머니, 여흥민씨 집안)도 이 무렵 한양을 떠나
전남 장성으로 피신하였다
김덕방의 손자 김윤손이다
김윤손의 아들(3명)은 8명의 아들을 낳아 “三希八若”라고 칭하였다
김윤손의 셋째아들 김희석(希자 항렬, 호조좌랑)의 후손이 번창하였고,
손자세대는 若(약)자 항렬이었기 때문이다
父子가 동시에 書院에 배향되는 명예를 키웠다
김희석의 2째아들(김약묵, 양주목사)은 淸白吏, 칠보 무성서원에 배향
(무성서원: 태인태수를 지냈던 고운 최치원을 모신 書院)
김약묵의 아들(김복억, 충청도 홍부목사)은 태인에 살면서
일재 이항(1499~1576)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남고서원(정읍 북명)에 배향되었다
@祖父 김기혁(1825~1898)
.鄕班으로 財産을 증식한 김기혁은 철저한 근검 절약으로
“밥님(飯任), 돈님(錢任)”으로 부를 정도였다
논두렁에서 이삮을 주워 도포자락에 담았고,
개똥, 소똥을 주워 인근 논밭에 비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절약과 積善(적선)을 몸소 실천한 가문으로 평가받는다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쓰기란 더 어렵다
@김기혁의 孫子(김영채, 1000석꾼 富者)
.대대로 거주하던 칠보를 떠나 평사리로 이주하였으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베풀었다
.1928~1929년 戊己대흉년(무기년)에 산외면 주민들의 세금을 대신
납부하면서 “나는 이동네의 어른이자, 富者인 나의 책임이다”
.주민들은 “山高海深(산고해심)”라는 은혜를 칭송하면서
현재 칠보면 파출소자리에 “시혜비”를 건립했으나,
“보기에 민망하다. 살아있는 사람의 비문을 세우는 법이 아니다.
철거하여 땅에 묻어라... ”
.주민들은 잠시 땅속에 묻어뒀다가 죽은이후 세운것이다(1971)
.김영채는 스승이자 의병장이었던 김영상(1836~1911)의 가족생계를
평생동안 책임져온 사람이다
@김영상은 면암 최익현과 함께 무성서원에서 호남의병을 일으키는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가 일제시대 체포되어,
.군산형무소로 강제 이동중, 만경강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가족들이 생활고에 시달리자 논밭을 구해주었고,
일제의 보호막 역할을 다한 義人이다
@규당 김영채의 아들(김윤술, 1903~1958)
.인근 섬진강 상류에 칠보발전소가 있었지만, 마을에는 電氣가 없었다
.당시 발전량(1945년 완공)은 조선전체의 1/3을 차지하였다
.7km 전기유입 공사를 주관하여 비용일체를 부담하기 위하여
논 100마지기(2만평)의 사재를 동원하였다
.김윤술이 죽은뒤 공덕비를 세웠다(1966년, 산외면 양로당 뜰)
@김영채의 집터 平沙落雁
.칠보에서 子女敎育 때문에 전주로 이전하였다(1923)
.일제치하 불안으로 풍수도참의 吉地(평사리)로 이사한다(1940)
.古宅정면(우측), 둥글둥글한 산봉우리 “기러기가 내려앉은 모습”
.無情物과 有情物이 상호 互換(호환)될때, 비로소 산세가 눈에 들어온다
山은 無情物, 사람이나 동물은 有情物이라 한다
.風水에서 날짐승(鳳凰, 기러기, 金鷄/닭)에 해당하는 산봉우리의 모습은
둥그렇게 생긴 모습이 특징이며, 바기자/철모처럼 둥글둥글하다
둥그런 봉우리가 크면 鳳凰으로 보는데, 크기가 핵심이다
.飛鳳抱卵형(비봉포란)은 둥그란 봉우리가 中央에 있고,
양옆에는 작은 봉우리가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큰봉우리는 鳳凰의 머리, 양옆의 山은 날개를 상징한다
.기러기는 봉황보다 작으면서 둥그런 봉우리가 6~7개 가량으로 많다
그중에서 중앙이 가장 높고 날개부분은 낮은편이다
기러기는 鳳凰(상상의 새)과 함께 선비들이 좋아했던 吉鳥로써
저녁노을에 떼지어 날아가는 모습에는 질서를 지킨다
따라서, 儒敎的 질서를 강조하는 三綱五倫를 비유하기도 한다
*규당의 집터 뒷산은 자그마한 금체(둥그런 모형)가 연달아 이어져있다
古宅 앞에는 넓은 들판이 전개되어 있으게 특징이다
*조선의 地管들은 山마다 地靈이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山은 神靈스러운 존재로 평가하였다
*죽전박씨(남원 호음실)의 사랑채(몽심재)의 접집이다
찿아오는 많은 과객을 한꺼번에 사랑채에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규당 김영채(1883~1971) 강진김씨 古宅은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
.古宅은 2000평, 40칸 집으로 1940년에 건축하였다
최초 60칸 규모였으나, 현재 사랑채와 안채만 남아있다
.장손(시산 김환재)이 주말에만 거주하면서 관리를 하고있다
.안채의 堂號 “소고당(紹古堂: 옛것을 잇는다)”
5칸 접집이다(접집이란? 앞뒤 마루와 앞뒤 방이 있다)
前後退(전후퇴)라고 부르며, 마루 135cm(4자), 방(10칸)이다
.소고당은 안채를 접집으로 건축함은 婦女子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男女同權, 후천개벽 세상에 개방적, 실용적, 파격적(1930년대 후반)
.소고당 三神器(삼신기)도 볼만하다
“아기 출산후 健康하고 무사함을 三神에게 기원했던 그릇이다”
출산후 이레(7일째) 빌고, 이후 7일 간격으로 총7번 기원하였다
49제와 같은 간격으로 出生~死亡이후 49일간을 말한다
.長孫은 집안의 家風으로 學校에 매년 쌀 한가마니를 보낸다
22년째(1982~), 산외면, 산내면, 칠보면의 중학교 1개를 선택한다
부인(고단)은 창평고씨(고봉 고경명 후손) 출신이다
.富漢(부한)이란? “부자 쌍놈”을 칭하는 말이다
@규당 김영채의 3째아들 김택술은 2대~3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손자 김명균은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한 명문가문이다
김회련은 개국원종공신으로 그 녹권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관은 도강(강진의 옛 지명이름)이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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