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8.종로상공회, 주왕산 무박산행(청송)
*청송심씨 山訟, 退溪 李滉 이함형에게 편지를 하다
청송심씨 山訟, 退溪 李滉 이함형에게 편지를 하다
@청송의 자랑, 심부자집
*김주영(객주, 아라리난장), 청송교도소, 청송사과, 청양고추(청송+영양)
*송소 고택(심호택 처사, 영조)은 1880년 건축하였다
.9대에 걸친 만석꾼(경주 최부자집: 12대 만석꾼)
.도적 침입시 안방마님이 창고를 풀어주다(사람을 다치게 하지마라)
.남은 재산으로 고택을 지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退溪(이황)의 6대祖父 금계포란형(청송 음택명당)
.5대 조부가 모시던 진보현 원님“계란을 묻어라, 자시에 닭이 울것이다”
.장난으로 일부러 곪은 계란을 묻으니, 병아리 울음소리가 없었다
.원님이 漢陽으로 떠난뒤, 계란을 슬쩍묻으니 자시에 병아리가 태어났다
.그곳에 父親의 장례를 지냈지만 자꾸만 屍身이 튀어나온 것이다
.漢陽까지 상경하여 옛 원님을 찿아 이유를 물었더니
“그곳은 벼슬이 높은 사람의 묘이다, 官服을 입혀 장례를 지내라”
.관복을 선물받아 묘지를 세웠더니, 훗날 6대손자 退溪(이황)가 태어났다
윤관~심지원 山訟
@윤관의 묘(파평윤씨)와 심지원의 묘(청송심씨), 가문의 결투
.1765년(영조41), 영조는 깊은밤 경희궁 흥화문으로 행차할 때,
옥당관 김노진(당직근무)의 만류에 遞職(체직)하고 강행하였다
.심정최(청송심씨)와 윤희복(파평윤씨)의 양대가문의 대표자를 만나
직접 심문하였으나 한치의 양보도 없는지라 고집을 꺽지 못하여
진노하고 刑杖(형장)을 가하고 유배령을 내렸다
.칠순이 넘은 老軀(노구)의 윤희복은 며칠후 귀향길 도중에 죽었다
@高麗 시중 윤관(파평윤씨)
.윤관(고려 예종, 여진족 격파, ~1111년)의 묘는 失廟되었으나,
18c초기, 파평윤씨 가문에서 집요하게 墳墓(분묘)를 소수문을 하여
동국여지승람에 “파주 분수원 밑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흙속에서 비석조각 墓碣(묘갈: 둥그스런 작은비석)을 발견하여,
현위치에 장묘했던 것이다
.공교롭게 100년전, 심지원의 묘(청송심씨 1593~1662)가 버티고
있었는데, 심지원은 영의정(효종, 3회)을 지낸바 있는 거물급이었다
청송심씨 顯祖(현조: 이름을 높힌 조상)으로써 효종이 승하한뒤,
어린 현종의 院相으로서 國喪을 총괄하여 정무를 보좌하였다
아들(익현)은 숙명공주(효종의 딸)의 부마로써 신임이 두터웠다
.파평윤씨 가문에서 심지원의 묘를 이장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산송의 시작은 고양~파주~교하에서 진행되었으나
.소송 당사자와 3고을의 수령이 인척관계로 해결되지 못하고
경기 관찰사를 거쳐 조정까지 확산되어 영조가 직접조정에 나섰다
.1764년(영조40), 윤관~심지원의 묘에 모두 祭祀를 下賜하였다
“고려시중 윤관과 상신 심지원의 묘에 賜祭
(사제: 죽은 臣下에게 祭祀를 下賜)를 명하였다...
윤씨가 먼저 入葬하였으나 해가 오래되어 묘를 잃어버리고,
심씨가문에서 외손으로써 그산을 점령하고 묘를 썼다...
각기 그묘를 수호하고 서로 침범하지 마라!... ”
.고려 재상~조선 재상을 우대하여 똑같이 致祭(치제)한 것이다
영조는 어느 한쪽에 치우칠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250년간 山訟이 시작되고, 400년후 청송심씨의 양보로 종료되었다
.윤씨가문에서 심지원의 묘앞의 階砌(계체: 무덤앞 돌계단)를 해체하자
심씨가문에서 몰려와 집단폭행을 가하였다
.양측은 잇달아 上言과 擊錚(격쟁)을 왕에게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여
.영조가 직접 국가의 기강과 풍화를 바로잡겠다며 흥화문에 행차하였다
.파주 윤관묘의 곡담이 날로 높아져 결국 심씨묘가 이장을 택하는데,
.당시, 유관의 묘 제사시 심지원의 무덤이 내려다 보는 지형이라
곡담을 계속 높혀 나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3단~7단~12단)
결국, 뒤편의 묘(심지원)가 보이지 않게된 현재의 모습이다
.2010년, 파평윤씨가 청송심씨의 선산을 제공하여 심지원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퇴계(이황), 이함형(李咸亨)에게 편지
@퇴계집(退溪集) 편지 한통
.이황(李滉)이 어린 제자 이함형(李咸亨)에게 보낸 것으로,
부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이함형에게 간곡히 충고하는 내용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가정사를 들어가면서 자상하게 타이르는 스승의 편지에
이함형은 깜짝놀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부부 금슬이 다시 좋아졌다
@어린제자에게 보낸 편지
*공자(孔子)왈
“천지가 있고 난 뒤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고 난 뒤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고 난 뒤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고 난 뒤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고 난 뒤에 예의를 베풀 곳이 있다.”
*자사(子思)의 말씀에도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니,
지극함에 이르면 천지에 밝게 드러난다”고 하셨다네
*詩經 “처자 간에 잘 화합함이 금슬(琴瑟)을 연주하는 듯하다”
.공자님은 “이렇게 되면 부모가 편안하실 것이다”고 하셨다고 하였네.
부부의 도리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니, 마음이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홀하고 박절하게 대해서야 되겠는가?
*大學에느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지엽이 다스려지는 자는 없으며,
후하게 할 데에 박하게 하면서, 박하게 할 데에 후하게 하는 경우는
있지 않다.”고 하였으며,
*孟子왈 “후하게 할데에 박하게 한다면 박하게하지 않을데가 없을 것이다”
.아! 사람됨이 박하고서야 어떻게 부모를 섬길 수 있겠으며,
어떻게 형제, 친척, 이웃과 잘 지낼 수 있겠으며,
어떻게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부릴 수 있겠는가?
공(公)이 금슬이 안 좋다고 내 들었는데,
무슨 이유로 그런 불행이 생긴 것인가?
.세상을 보면, 이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
아내의 성품이 나빠 고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아내의 얼굴이 못생기고 우둔한 경우도 있고,
남편이 방종하여 행실이 좋지 못한 경우도 있고,
남편의 호오(好惡)가 괴상한 경우도 있네.
경우들이 많아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네.
.그러나 대의로 말한다면, 그 중 아내의 성품이 나빠 교화하기 어려워
스스로 소박을 당할만한 죄를 지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편이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고 애써 아내를 잘 대해주어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않으면 되네.
.그렇게 하면 부부의 큰 인륜이 무너지는 데 이르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박하게 하지 않을 데가 없는” 지경에 빠지지 않을 것이네.
“성품이 나빠 고치기 어렵다”는 것도 몹시 패역(悖逆)하여
인륜의 도리를 어지럽힌 경우가 아니라면 역시 상황에 따라 대처하고
갑자기 인연을 끊어버리지 않는 게 좋네.
.옛날에는 아내를 버려도 아내가 다른 데 시집갈 수 있었기 때문에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저지르면 아내를 바꿀 수 있었네.
.그러나 오늘날의 아내는 거개가 한 지아비만 끝까지 따르니,
어찌 정의(情義)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남처럼 대하거나
원수처럼 대하여, 한 몸처럼 살아야 할 사이가 서로 반목하게 되고
한 이부자리에 기거하면서 천리나 떨어진 것처럼 되어,
가도(家道)가 시작될 곳이 없고 만복(萬福)이 길어질 뿌리가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
*大學 “자신에게 잘못이 없는 뒤에 남의 잘못을 지적한다.”고 하였으니,
이 부부간의 문제에 대해 내가 예전에 겪은 것을 말해주겠네.
나는 두 번 장가들었는데 하나같이 아주 불행한 경우를 만났네.
그렇지만 이러한 처지에서도 감히 박절한 마음을 내지 않고
애써 아내를 잘 대해준 것이 거의 수십 년이었네.
그 동안에 마음이 몹시 괴로워 번민을 견디기 어려운 적도 있었네.
그렇지만 어찌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해서 부부의 큰 인륜을 무시하여
홀어머니께 걱정을 끼칠 수 있었겠는가.
*후한(後漢), 질운(郅惲)은 말하였네
“부부간의 정은 아비도 아들에게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참으로 인륜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간사한 말이니,
이런 말을 핑계 삼고 공에게 충고하지 않을 수는 없네.
공은 반복해 깊이 생각하여 잘못을 고쳐야 할 걸세.
.이런 잘못을 끝내 고치지 않는다면, 학문은 어떻게 하겠으며,
행실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함형(李咸亨 1550~1586)의 子: 평숙(平叔), 호: 산천재(山天齋)
.전주이씨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서울 사람인데 처가집 順天에서 살았다
.1569년, 退溪(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을 모신 기간이 매우 짧았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과 함께 심경(心經),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에 관하여 제자들이 묻고 이황이 답한 것을 모아 심경석의(心經釋義),
주자서강록(朱子書講錄)을 펴내었다. 실로 독실한 제자였다.
.이 편지를 보낼 때 이황은 70세, 이함형은 21세였다.
그리고 이 해에 이황은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말은 주역(周易)에 보이고, 子思의 말은 모두 中庸에 보인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죄 없는 곽황후(郭皇后)를 폐위할 때
질운(郅惲)에게 의견을 묻자,
질운이 “신이 듣건대 부부의 정은 아비도 자식에게 어찌할 수 없는데,
하물며 신하가 임금에게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런 말이 있다고 해서, 부부간에 사이가 좋지 않은 이함형을
그대로 두고 충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퇴계(이황)은 周易~中庸~詩經~大學 등 경서를 두루 인용하여,
.부부의 사이가 만사의 근본이며, 만복(萬福)의 근원이라고 하면서
아내의 성품이 아주 못되어 고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부부의 인연을 쉽게 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 이유로 옛날에는 여인들은 개가(改嫁)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고 오직 일부종사(一夫從事)하게 되어 있으니,
아내를 버리면 아내는 갈 곳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매우 간곡한 설득이요 충고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황은 자기의 불행한 과거사를 털어놓는다.
이황은 21세에 진사 허찬(許瓚)의 딸과 혼인하여 금슬이 좋았으나,
27세에 상처(喪妻)하고 말았다.
.그리고 30세에 봉사(奉事) 권질(權礩)의 딸과 두 번째 혼인을 하였다.
허씨(許氏) 부인은 그녀의 조부가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賜死되고,
부친 권질도 그 일로 거제도로 유배가게 되었다.
그녀는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권질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복권되었으나 기묘사화 때 다시 집안이 화를 당하여 숙부는 사사되고
숙모는 관노가 되고, 권질은 이황의 고향인 예안(禮安)으로 귀양 간다.
.거듭되는 집안의 참화(慘禍)를 겪으면서 허씨 부인은 심한 충격을 받아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고 한다.
.이황이 예안으로 귀양 온 권질을 찾아갔을 때,
.권질이 이황의 인품을 믿고 자기의 온전치 못한 딸을 부탁했던 것이다
@권씨부인에 관해 재미있는 일화
.제사상을 차리다 떨어진 배를 권씨부인이 치마 속에 감추자,
그 모습을 보고 친지들이 웃었는데,
이황은 손수 배를 깎아 부인에게 먹였다고 한다.
.이황이 조정에 급히 입고 나갈 도포를 빨간 헝겊으로 기웠다
대학자 이황의 배필로는 모자라도 많이 모자라는 여인이었다
.그런나 이황은 1546년 권씨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년간 변함없이 그녀를 감싸주며 부부의 도리를 다하였다.
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인가?
@자기 부부간의 불행한 과거사를 털어놓는 것은 사대부의 집안 범절이
.삼엄한 조선시대에는 친구나 주변에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49세나 어린 제자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과사를 솔직히
얘기하면서 부부간의 도리를 다하라고 간곡히 타이르고,
아내를 박대하는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학문도 쌓을 수 없고
행실도 닦을 수 없다고 간절히 충고한 것을 보면,
이황의 인품이 얼마나 너그럽고도 진솔하였으며
제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가를 넉넉히 알 수 있다.
@편지를 읽은 이함형은 잘못을 고쳐 다시 부부 사이가 좋아졌고
.소박맞을 뻔했던 이함형의 부인은 이황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 3년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종로상공회, 종로산악연맹(종로구 등산연합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1104.종로상공회 가을체육대회 (0) | 2023.01.02 |
---|---|
2012-1103.종로구 등산연합회(삼청공원, 북악팔각정) (0) | 2023.01.02 |
2012-1021.종로구 등산연합회 한국주얼리산악회, 운악산 (1) | 2023.01.02 |
2012-1017.종로상공회(JCA 8기), 삼악산 (0) | 2023.01.02 |
2012-1009.종로상공회(JCA12), 공명선 (0) | 2023.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