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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상공회, 종로산악연맹(종로구 등산연합회)

2012-1017.종로상공회(JCA 8기), 삼악산

by 조흥식 2023. 1. 2.

2012-1017.종로상공회(JCA 8),  춘천 삼악산   

  *朝鮮의 묘지 訴訟(山訟)

 

 

 

朝鮮의 묘지 訴訟(山訟)

@조선 사대부(양반), 산송(山訟)에 목숨을 걸다!

   .詞訟이란? 민사소송으로 원고와 피고가 법정에서 말로써 다툼을 말한다

   .조선후기 3詞訟(사송)은 노비, 전답, 묘지 소송이다

       전체 소송의 절반이 조상의 묘소를 둘러싼 다툼이었다

       삼국시대와 高麗, 일본, 중국에는 없는 사회적 골칫거리가 되었다

   .山訟이란? 산과 관련된 민사 소송이지만, 묘지 소송을 의미한다

      선산(先山) 영역을 위해 관아에 제출된 청원서의 70% 차지하였다

   .所志(소지: 청원서, 고소장)의 대부분을 차지한 셈이다

 

@高麗는 화장 장례문화였으나, 朝鮮儒敎중심의 사상으로 변질되어

   .조상이 죽은 이후에도 섬기는 士大夫名譽로 부상된 것이다

   .불교중심의 분위기로 조상의 묘를 소중하게 지키지않아 실묘한 것이다

       혼인풍습 男歸女家婚으로 죽은뒤 처가 묘역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부계 조상의 분묘가 흩어져 古冢(고총)이 되어 실묘되었다

   .조선 성리학 宗法 질서가 확립되어 부계의식이 강화되어

       유교식 장례문화가 확산되어, 조상의 분묘를 단장하게 된다

   .16c부터 儒敎 이념()의 부각으로 묘지 조성이 시작되었는데,

       묘지()의 소유권은 없고(국유지로 관리),

       점유권만 백성들에게 인정해 준것이다

    .17c 후기부터 종산(선산), 문중, 조상의 묘관리가 시작되었다

       吉地(음택명당)를 찿아 조상의 묘를 안장하는 분위기가 팽창되어

       묘지 주변(左靑龍, 右白虎)에 다른 묘의 안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風水地理 때문에 偸葬(투장)으로 번지며, 다른 가문의 묘를 강제를

       파헤쳐 선산에서 몰아내는 잘못된 유교적 분위기가 고조된다

 

@가문의 결투가 시작되다!

   .일성록(정조 일기), “후손을 위하여 천민이 투장했다는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의 묘지소송(山訟)이 사회적으로 골치거리였다

   .고려시대 婚禮 관습은 장가 간다(처가살이)”의 분위기였으며

       조상의 제사도 남녀 구별없이 능력있는 후손이 섬긴 것이다

  .山訟은 당사자, 일가, 문중 전체가 사활을 걸고 매달린 다툼이었다

       유교이념의 양반 사대부는 소송~경제활동에 직접 나서지 않고

       노비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토지 전매, 노비 거래를 해왔으나,

       청원서나 고소장도 노비 이름으로 제출한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山訟에는 도포입고 삿갓을 쓴 양반(사대부)이 패싸움까지

       벌이며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명분과 체모를 중시했던 喪中기간에는 모든 소송을 중지했으나

       喪中에도 유일하게 허용된 소송이 山訟이다

       대부분 상중에 산송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상복을입고 訟廷(송정, 소송이 진행되는 장소, 법정)에 드나들었다

 

@1727(영조3) “최근 上言한것이 80~90%山訟이다

   .영조는 傳敎를 내려 山訟의 유행을 개탄하였다

   .임금이 직접 중재를 해도 해결이 안될 만큼 갈등의 뿌리가 깊었다

   .사대부 가문의 양반들이 죽음도 불사하며 묘지 소송에 뛰어들었다

   .조상 분묘때문에 가문의 힘의 대결로 이어지고

       장기화~무력대결(사대부 집단 패싸움)~살인사건으로 변질되었다

       조상의 묘를 수호하는 爲先意識에 가문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실학의 집대성한 茶山 丁若鏞(1762~1836)山訟을 걱정하였다

   .강진 유배시절(1801~1818)에 집대성한 牧民心書

      “조선의 山訟이 요즘 弊俗(폐속)되어

        鬪毆之殺(투구지살: 싸우고 때려 죽임)의절반이 山訟 때문이다

 

박수하 山訟

@박수하는 조상의 묘역을 차지한 박경여 가문에 訴訟을 제기한다

   .조상 묘자리 싸움으로 박수하, 박경여는 하옥되었는데(숙종)

       박수하가 獄死하는 바람에 양가 집안의 갈등이 격화되어

       장기간 物理的 충돌이 시작되어 사회적 문제로 변질되었다

   .문랑(박수하의 큰딸)은 복수심으로 무덤을 파 헤치는데,

       굴총(박경여 祖父의 묘)하여 송장을 불태워 버린것이다

   .당시, 私掘(사굴)은 살인죄에 준하는 중범죄로 다스렸는데,

       문랑(큰딸)은 유배형을 감수하고 투장을 감행했던 것이다

       父親의 억울한 죽음에 앙갚음으로 不孝를 갚으려 하였다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물리적인 대응을 시작한다

    “박경여를 죽여라말과 칼을 동원하여 공격을 시도하지만,

   .武將 박경여 수족들에게 죽임을 당해버린다

   .묘지 소송이 결국 殺人 사건으로 번진것이다

 

@1712(숙종38), 대표적인 山訟사건

   .숙종은 성주목사(김상직)를 파직시키고 재조사 지시를 한다

  .처녀 박효랑(17), 앳된 얼굴의 선비가 돌연 왕의 행차를 가로막고

       아버지의 원수를 처벌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한다.

       효랑은 남장을 감행하고 왕 앞에 나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효랑의 父親이 묘지 소송에 휘말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집안 대대로 모시던 조상의 묘지마저 빼앗긴 사연을 고하였다

   .문랑(효랑의 언니)父親의 원수를 갚으려다 석연찮은 죽었다

   .산송때문에 하루아침에 父親와 언니를 잃은 효랑의 한 맺힌 사연은

       전국 儒林의 여론을 들끓게 했고, 이 광경을 목격한 세자(영조)

       임금 즉위후 사건의 재조사를 지시한다.

   .효랑은 여인의 몸으로 한양에 상경하여 격쟁을 벌리는데,

       출근하는 재상들을 붙들고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때, 삼남지방과 전국에서 통문이 올라오고,

       儒林들이 상소하고, 무려 7000여명이 서명하였다

       “박경여를 처벌하고 효랑에게 효녀 열녀비를 내려야...”

   .숙종은 성주에 2차례 어사를 파견하였는데,

       5년만에 어사(홍시중)에게 결과보고를 받은것이다

   “큰딸(문랑)死因은 박수하측은 맞아죽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박효랑 가문에서는 박경여 가문에서 조정에 압력을 행사하여

       조작하였다고 주장이 다른것이다

 

@1664, 현종시대부터 山訟(묘지 소송)이 시작되었는데,

   “신보수교집록(山訟)”24건으로 기록되어 있는바,

   “訴紙(소지: 고소장)”70%로써 대부분 차지하였다

   .증거물로써 山圖(묘지 약도)가 첨부되었다

 

윤관~심지원 山訟

@윤관의 묘(파평윤씨)와 심지원의 묘(청송심씨), 가문의 결투

    .1765(영조41), 영조는 깊은밤 경희궁 흥화문으로 행차할 때,

      옥당관 김노진(당직근무)의 만류에 遞職(체직)하고 강행하였다

   .심정최(청송심씨)와 윤희복(파평윤씨)의 양대가문의 대표자를 만나

       직접 심문하였으나 한치의 양보도 없는지라 고집을 꺽지 못하여

       진노하고 刑杖(형장)을 가하고 유배령을 내렸다

       칠순이 넘은 老軀(노구)의 윤희복은 며칠후 귀향길 도중에 죽었다

 

@高麗 시중 윤관(파평윤씨)

   .윤관(고려 예종, 여진족 격파, ~1111)의 묘는 失廟되었으나,

       18c초기, 파평윤씨 가문에서 집요하게 墳墓(분묘)를 소수문을 하여

       동국여지승람에 파주 분수원 밑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흙속에서 비석조각 墓碣(묘갈: 둥그스런 작은비석)을 발견하여,

       현위치에 장묘했던 것이다

   .공교롭게 100년전, 심지원의 묘(청송심씨 1593~1662)가 버티고

       있었는데, 심지원은 영의정(효종, 3)을 지낸바 있는 거물급이었다

   .청송심씨 顯祖(현조: 이름을 높힌 조상)으로써 효종이 승하한뒤,

       어린 현종의 院相으로서 國喪을 총괄하여 정무를 보좌하였다

       아들(익현)은 숙명공주(효종의 딸)의 부마로써 신임이 두터웠다

   .파평윤씨 가문에서 심지원의 묘를 이장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산송의 시작은 고양~파주~교하에서 진행되었으나

   .소송 당사자와 3고을의 수령이 인척관계로 해결되지 못하고

       경기 관찰사를 거쳐 조정까지 확산되어 영조가 직접조정에 나섰다

   .고려 재상~조선 재상을 우대하여 똑같이 致祭(치제)한 것이다

       영조는 어느 한쪽에 치우칠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1764(영조40), 윤관~심지원의 묘에 모두 祭祀下賜하였다

       “고려시중 윤관과 상신 심지원의 묘에 賜祭

         (사제: 죽은 臣下에게 祭祀下賜)를 명하였다...

         윤씨가 먼저 入葬하였으나 해가 오래되어 묘를 잃어버리고,

         심씨가문에서 외손으로써 그산을 점령하고 묘를 썼다...

         각기 그묘를 수호하고 서로 침범하지 마라!... ”

 

@250년간 山訟이 시작되고, 400년후 청송심씨의 양보로 종료되었다

   .윤씨가문에서 심지원의 묘앞의 階砌(계체: 무덤앞 돌계단)를 해체하자

       심씨가문에서 몰려와 집단폭행을 가하였다

   .양측은 잇달아 上言擊錚(격쟁)을 왕에게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여

   .영조가 직접 국가의 기강과 풍화를 바로잡겠다며 흥화문에 행차하였다

   .파주 윤관묘의 곡담이 날로 높아져 결국 심씨묘가 이장을 택하는데,

       당시, 유관의 묘 제사시 심지원의 무덤이 내려다 보는 지형이라

       곡담을 계속 높혀 나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3~7~12)

       결국, 뒤편의 묘(심지원)가 보이지 않게된 현재의 모습이다

   .2010, 파평윤씨가 선산을 제공하여 심지원의 묘를 이장하였었다

 

성운한의 山訟

@1664(현종5), 이시매의 파직요청(경기 관찰사)

   .山訟의 유래가 시작된것은 현종 시대이다(조선왕조실록)

   .사간원에서 산송을 지연시킨 경기관찰사(이시매)를 고발한 것이다

@고발내용

     “성운한의 山訟에 관한 曲直(사리의 옮고 그름)은 원고~피고의 말을

       들어보면 즉시 분별할수 있는데도 경기관찰사(이시매)3번이나

       재판관을 바꾸고 5개월간 질질 끌었다.

        성운한이 擊錚(격쟁)한뒤 의금부에서 담당 관청으로

        覆啓(복계: 임금에게 그 결과를 보고함)하도록 청하여

        (임금. 주상)께서 윤허하였는데도 3개월이 지나도록 아직도

        거론하지 않으니 직무를 포기한것이다.

        경기관찰사(이시매)를 파직하고 형조에 해당하는 당상과 낭청을

        추고(추고: 죄를 추궁하여 심문함)하소서... ”

   .조씨가문에서 선산에 偸葬하였다고 성운한이 所志를 올려 발단되었다

       (투장: 남의 선산, 묫자리에 자기 집안의 묘를 몰래 쓴 행위)

   .억울함을 임금에게 호소하는 擊錚으로 확대되는데,

       일단 격쟁이 시작되면, 왕이 담당부서에 하명을 내린다

       담당부서는 해당지역 관찰사에게 조사명령이 하달된다

   .그런데, 이시매는 수개월간 재판을 지연하고 보고조차 지체한것이다

  

@당시 법전(수교집록, 禮典)喪葬條()山訟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法典은 한시대의 삶과 가치관을 공식적이고 종합 결집한 산물이며

       당대 사람들의 관념과 가치관을 엿볼수 있기 때문이다

   .1686(숙종12), 受敎(수교: 각 관청에서 받아들인 王命)에 규정하였다

       “京外山訟은 병진년(1676, 숙종2)受敎에 따라 시행한다

         龍虎(분묘의 왼쪽~오른쪽 산줄기)의 기준은 5~600보에 이르되

         기준이 애매한 경우에는 관리의 재량에 달려있다...

         墳墓(분묘)의 형국을 참작하여 처결한다

   .17c후기, 山訟에 대한 受敎가 증가한다

   .영조, 신보수교집록에 독립항목으로 설정되어 禮典에 실린다

       15c경 편찬된 經國大典에는 없었던 시대적 흐름이었다

   .禮典(14항목, 144건의 수교)山訟6번째, 24건의 受敎가 실렸다

       訴訟임에도 刑典이 아닌 禮典(상장조)에 실린것은 조선 양반들의

       物質的 이득보다 喪葬禮 절차상 발생하는 갈등으로 볼수있다

 

진성이씨(이석~이운후), 집안끼리 山訟

@고려 이석의 묘는 영남 진보현 기음곡촌이었으나 실묘되었다가

   .안동 주촌의 입향조(이운후)의 분묘를 찿아 회복되었다

   .1645(인조23), 이시장 3형제는 母親의 분묘를 기음곡에 조성하면서

       우연하게 진성이씨 시조(이석)의 묘비를 발견하였다

       (誌石: 고인의 인적사항, 업적이 적혀있는 판석)

   .이양호 誌石선조의 묘에 附葬(부장, 합장)한다라고 적혀있었다

       이양호는 이석의 증손자(3대손)이었던 것이다

       인근에 古冢(고총 3)은 이석, 부인(2)의 묘로 밝혀진다

   .이시장 3형제는 갈등에 휩싸였다

       이석(진성이씨 시조)의 묘를 찿았던 사실을 문중에 알려야 하지만

       모친 분묘에 장애가 될까봐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1678(33년후, 숙종4), 誌石이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문중에서 모친의 이장을 촉구하면서 族人끼리 山訟이 시작된다

   .이운후(안동 입향조)退溪(李滉)의 고조부(5대조부)로써

       안동 동쪽 가구산에 분묘가 있고,

       이운후의 부인(안동권씨)의 묘는 안동 북쪽 수리동에 조성되었다

       부부의 묘를 입장하고, 분묘 수호~묘제는 자손이 나눠 담당하였다

       가구산에 사는 외손가문은 이운후의 분묘를 지키고

       수리동 안동권씨(부인)의 묘는 주촌에 사는 本孫들이 묘제를 지냈다

   .한동안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져 오던중,

       외손가에서 이운후의 분묘를 돌보지도 않고, 묘제도 하지 않은것이다

   .이무렵, 부계 조상의 분묘수호의 인식이 확산되면서

       주촌에 사는 본손들은 이운후의 가구산 분묘를 되찿고자 하지만,

       실묘되어 찿을길이 없어, 진성이씨 가문에서는 이운후의 묘제를

       안동권씨(부인)의 분묘에서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16c 退溪(이황)은 입향조(이운후)의 분묘를 찿을수 없었다

   .낙향했던 퇴계도 한탄하면서, 가막산을 향해 망제를 올렸다고 한다

 

@17c 이상준이 조문갔다가 유의남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듣고 찿는다

   “모친이 어릴때 사람을 따라 정원로의 모친(이운후의 친손녀)

       분묘에 갔었는데 제사가 끝나고 다시 이운후의 분묘로 추정되는

       조상의 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봤다...”

   .이운후의 분묘를 찿은후, 큰 걱정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외손 정씨가문의 족장지(族山)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정씨가문에서 외가의 분묘를 수호하면서 繼葬(계장)하였다

       (繼葬: 조상의 무덤아래후손들의 묘를 쓰는 풍습)

       외가의 분묘는 실묘가 되어 이름없는 古冢(고총)이 된것이다

   .진성이씨는 시조 묘를 복구하는데 정씨가문과 충돌한다

   .10년후(1643, 인조21), 봉분을 단장하게 되었으며

       1670(현종11), 갈석을 세웠다

       (碣石: 머리가 둥그런 작은 비석)

 

안동권씨(권행, 고려3태사)

@1465~1478년 어간, 안동권씨의 시조묘 회복

   .시조 권행(고려3태사)의 분묘는 6~700년간 실묘되었다

   .권옹(18대손, 평창군사)은 배소(이조정랑)의 사위가 되어

       안동 풍산현 하회마을에 정착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을 읽고서 천등산부근에서 시조의 묘를 찿아냈다

 

宗山妻家~外家에서 출발(풍산류씨)

@宗山의 출현은 외가~처가의 산에서 부계중심으로 변화하며 생겼다

   .사위, 외손으로 분산 밑자락에 자손 대대로 繼葬하면서 종산으로 변한다

 

@서애 유성룡의 7대조(유보)까지만 전해지고 실묘되었다

   .7대조(유보)~5대조(유홍)까지 종산없이 흩어져 매장하였으나,

       유보(7대조)는 예천에 매장하고, 대부분은 안동부근에 있었다

   .4대조(유소) 이후 천등산으로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다

   .안동권씨 시조(권행)의 분묘가 천등산에 있다

       실묘된후, 후손 권옹이 안동으로 장가들어 묘를 찿아 수호했는데,

       권옹이 죽은뒤 아들(권유, 권작)은 고향 평창으로 떠나버린다

   .유성룡의 고조부(4대조 유소)가 권동(안동권씨)의 사위였던 것이다

       유소 부부가 천등산에 입장하면서 풍산유씨 종산으로 변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계장되었기 때문이다

   .유성용의 3대조(유자온)는 처음엔 화산(하회마을 뒷산)에 안장하였다가

       훗날 천등산으로 이장하게 된다

 

@후손 유운룡의 기록

   .1518(중종13), 3대조(유자온)의 부인을 천등산에 입장하려 했으나

       안동권씨가 禁葬을 주장하여 마찰이 발생하였다

     “유자온의 부인이 죽자, 남편 곁에 매장하려 하였으나,

        태사공(권행)의 후손(권균 정승)이 반대한 것이다

        주변에서 태사공(권행)의 계체를 철거하여 사용하려 한다고 이간질을

        하였기 때문에 권균은 한양에서 크게 노하여 안동부에 공문을 보내

        천등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지시하였다... ”

    .유성룡의 조부 유공작(참판공)은 상복차림으로 한양에 상경하여

        권균 정승집 대문에서 한달이 넘도록 엎드려 간청하여 설명하였다

        “자손들이 계장한 내력과 산세의 遠近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에 권균은 마음을 풀고 禁葬을 해제하여 유자온의 부인을 매장하였다

   .이때부터 풍산유씨가 천등산을 수호하게 되었으며이후 유자온의 아들

       유중영 부부가 입장되고손자(유운룡 부부~유성룡...),

       대대로 후손들이 계장하여 천등산을 풍산유씨의 종산이 된것이다

   .이는 유소가 처가의 산에 입장하고, 외손들이 계장하여 종산이 되었다

 

@문묘 단장과 묘제 거행(선영수호, 爲先사업)

    .3부자(부친: 유중영~아들: 유운룡, 유성룡)를 거치면서

        묘지(업적을 기록한 비석)와 묘갈(비석)을 마련하고

        祭位田(제사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전답)을 설정하게 된다

   .분묘 수호를 위한 立約

        안동부근에 사는 자손이 묘제와 분묘 수호를 분담하고

       매년 한번씩 하회마을 종가에 집결을 약속하였다

       선영수호와 묘제를 통하여 가문의 결속력을 높이게 된것이다

 

노상추와 박춘로 山訟

@1807(순조7), 노상추(1746~1829)와 박춘로의 山訟

   .노종선(김종직의 문하생 1430~)은 경북 선산의 입향조로 노씨가문은

       400년간 世居武班 가문으로 유명하다

   .원고 노상추(노종선의 11대손)는 순조에게 上言을 올렸다

       피고 박춘로는 노사성(노씨가문의 4대손)의 사위(이민선)

       사위(박정실)의 후손으로 먼 친척관계이다

   .내외손 관계의 두집안의 山訟은 종산의 경계지점 때문이다

 

@노상추의 上言

   “11대조 노종선(첨정공)이 대대로 선산부 상구미면 성남촌에 거주하였고

    문간공(김종직)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에 연원이 있다.

    노종선이 죽은뒤 살던 마을 왼쪽에 안장하였다.

    성남동은 노씨가문이 6~700년간 생전에 살아왔고

죽어서 매장했던 곳이다.

    11세 방계 할아버지(노계종)의 자손들도 이곳에 살고있다.

    노계종의 4세손(노사성)은 후손이 없어 사위(현감 이민선)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으며,

    이민선도 자신의 사위(박정실)에게 分給(분급)하였다.

    이민선의 후손은 지금까지 노씨가문의 선조의 묘 오른쪽 골짜기에

    살면서 대대로 오른쪽에 매장하였다.

    박정실 후손들은 지금까지 왼쪽 골짜기에 살면서 왼쪽에 매장하였다.

    이처럼 경계를 나누어 정하고 200년간 서로 침범하지 않았다...”

 

@입형조 노종선은 죽은뒤, 왼쪽 산록에 묘를 조성한 것이다

   .대대로 살면서 매장하여 종산을 가꾸어 온것이다

   .집안 사위들도 성남촌 산록에 입장하여 내외손이 공존해 온것이다

   .이민선은 노사성의 사위자격으로, 박정실은 이민선의 사위자격으로

       처가살이를 하다가 산록에 묻힌것이다

   .훗날, 이민선과 박정실의 후손들은 처가살이를 하지않고

       조상묘를 계장하면서 독자적인 종산으로 발전해 나간것이다

   .성남촌 산록은 노상추 가문의 종산을 중심으로, 3가문이 있었는데

       오른쪽은 이민선 후손, 왼쪽은 박정실 후손이 차지하였다

 

@1807(순조7), 박씨가문의 새로운 분묘조성이 도화선이 된다

   .박정실의 후손 박춘로가 모친상으로 종산에 분묘를 했는데,

       묘자리가 공교롭게 노씨가문의 분묘의 건너편 산이었던 것이다

   .풍수지리상 조상묘의 案山(안산)에 해당되어 對案之處(대안지처)라고

       주장하면서 禁葬하고 나섰다

   .박춘로는 대대로 世居地라며 노씨가문이 廣占(땅을 넓게 차지함)이라

       주장하여 집안의 산송이 시작되었다

   .결국 노씨가문의 세장지가 분화되어 형성된 외손계열의 이민선 가문과

       박정실 가문의 3갈레의 세장지가 연접하여 매장하였으므로

        언젠가는 분산수호권이 충돌할수 밖에 없었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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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