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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상공회, 종로산악연맹(종로구 등산연합회)

2012-1021.종로구 등산연합회 한국주얼리산악회, 운악산

by 조흥식 2023. 1. 2.

2012-1021.종로구 등산연합회 한국주얼리산악회 가평 운악산 

*조선의 신여성들(인수대비, 신사임당, 강정일당, 안동장씨, 임윤지당)

 

 

 

 

조선의 신여성들(인수대비, 신사임당, 강정일당, 안동장씨, 임윤지당)

인수대비(청주한씨)

@신여성 인수대비(1437~1504)

   .청주한씨 명문가문은 고려말~조선초기에 번성하였다

   .조선초기, 王妃 4명을 배출하였는데,

       父親 한확은 2명의 누나를 나라 황제 후궁으로 보낸 이후,

       수시로 가족들이 나라를 방문하여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인수대비는 고모와 서신을 나누며 신여성의 문호를 걷는다

   .1457, 세자빈(의경세자 죽음)으로 2년만에 출궁하지만

       수양대군(세조)의 정치적 파트너로써 파격적인 사랑을 받는다

       시동생(예종)이 세자가 되었으나 일찍 죽는다

   .12년간 심기일전하여 둘째아들이 성종으로 즉위하여

       정희왕후(세조비, 파평윤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인수대비에게 권유했던 이유는

      “문자도 알고, 사리에 통달하니 가히 국사를 다스릴수 있을것이다

      “문자를 안다학문적인 능력과 탁월한 지적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구시대 여성(바람둥이)

   .구시대 여성이란?

       감정의 절제를 중요시하는 性理學의 맛에 익숙치 않은 여성을 말한다

   .어우동(성종)을 시대를 앞서간 여성으로 평가한 이유는

       자신의 感情에 충실하여 여러 남자들과 간통하였던 것이다

   .양반여성 유감동(세종, 판관 최중기의 처)은 수십명과 간통하여

      장형을 맞고 노비로 내몰렸던 사건이 유명하다

   .인수대비는 佛敎 옹호론을 성종에게 제기(압박)하여 친밀감으로

       인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불교를 하루아침에 배척해서는 안된다

       선진적인 지식인 여성, 신여성으로 볼수있다

   .당시 조선초기 건국이념으로 유교화는 선진화의 길목이었으므로

       성리학은 첨단적인 사상으로 봐야할 것이다

 

 

@1475(성종6), 內訓(여성들의 윤리 규범, 敎訓書)을 만들다

   “聖人의 학문을 보지못하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귀하게 되면

    원숭이에게 의관을 갖추어 준것과 같다

   .聖人이란? “道德的 완결성을 갖춘 人間이다(性理學적 의미)”

       성리학적 의미에서 이상적인 인간형을 칭한다

   .內訓에서 딸이나 며느리들의 어리석음을 근심하여...”로 시작하여

       며느리 윤씨(성종비)를 폐비시킨 것도 여기에서 적용되었다

   “열여전~女敎~明鑑~小學...이 책들은 지극히 간결하고 분명했지만

       권수가 자못 많아서 쉽게 알기 어려우니, 이에 그중에서

       중요한 말을 뽑아서 7장으로 저술하여 너희에게 주노라!...”

 

정부인 안동장씨

@정부인 안동장씨(1598~1680)

   .이문열 小說 선택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대학자 이현일(조선후기, 재령이씨)母親으로 貞夫人에 봉해졌다

       재령이씨 집안에서 불천위에 모셔진 대표적인 賢母良妻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선택을 통하여 현대여성은 자기성위 중심으로

       내조와 자녀양육을 경시하는 풍조를 지적했는데,

       여성단체에서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반발하여 논쟁이 대단하였다

 

@안동장씨는 自己 成就를 포기하고 여자 일을 선택했을까?

   “짓고 글씨 쓰는것은 모두가 여자가 할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여자의 일이란? 봉제사 접빈객~자녀 교육에 매진함을 말한다

   .장씨부인은 聖人이 되고 싶어했던 것이다

       여자의 일을 열심히 하면, 궁극적으로 聖人이 될수있다고 믿었다

       , 人倫의 날마다 하는 일(주어진 日常)에 잘 실천한다면

       성인이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善行聖人에 이르는 基礎를 말하며

       자식들이 立身揚名보다 聖人되기目標로 삼기를 바랐다

   .孫子(신급)에게 지어준 에서 성인의 의미를 알수있다

       “孫子聖人을 배우려는 태도가 있어 매우 기쁘다...”

 

@정부인 안동장씨의 여성 사회진출과 자아실현의 추구로 시작되어

   .훗날 임윤지당~강정일당...여성성리학자가 등장하는 배경이다

 

강정일당(여성 性理學者)

@강정일당(1772~1832)

  .죽은뒤, 남편은 정일당 유고문집을 편찬하게 된다

  .강정일당(20)은 남편(14, 윤광현)과 혼인하여 가난한 생활이었다

       삯바늘질로 생계를 유지하고, 남편은 과거를 준비하는 도중에

       호기심으로 어깨너머 배웠는데, 남편과 토론하자며 자주 괴롭히고

       궁금한것은 남편을 시켜 스승에게 질문하도록 했다

 

@정일당유고

   .부인의 질문내용을 송치규(남편의 스승)에게 전해졌다

     “中庸戒愼恐懼(계신공구)朱子는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둔다고 하였으니, 이는 을 통용하여 말한 것입니다.

       存養省察(존양성찰)로 말한다면 戒愼恐懼(계신공구)

       전적으로 에 속할것 같은데 어떻게 봐야 마땅하겠습니까?”

   .스승(송치규)은 지적요구가 매우 왕성했던 태도를 존중하였다

 

@大夫(남편을 대신하여 지었다)

   .강정일당의 글 후미에는 대부분 大夫로 쓰여있다

   .행장이나 묘지명은 죽은사람을 기억하는 글을 써서 주고받았다

      “우리집 것은 친구네 집에서 쓰고, 친구네 집의 글은 우리집에서

       서로 써준것이 유행하였다(조선시대)”

       당시 강정일당의 행장은 그녀의 종형제(사촌)이 쓴것이다

   .남편은 능력이 탕월한 부인에게 글을 쓰게한 것이다(행장, 묘지명...)

 

@姜靜一堂(강정일당, 조선 여성 성리학자)

   .척독(尺牘) “남편과 주고받은 쪽지 편지가 유명하다

      각자 주거공간을 상호 존중하여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남편은 대부분의 활동공간은 바깥 사랑채에서 지냈으며,

       함부로 內堂(부인의 생활공간)에 출입을 하지 않았고,

       부인은 內堂에서 거처하며,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함부로 밖에 나가지 않았다

   .禮記 男子는 집안일을 말하지 않고, 女子는 밖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임윤지당

@임윤지당

  “날마다 성인되기를 기약하라”(인수대비, 內訓의 말미)

   .윤지당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비록 夫人이지만, 하늘에서 받은 性品

       애당초 男女의 차이가 없다고 하셨다(정일당 유고에서 인용)

   .임윤지당은 강정일당보다 먼저 여성 성리학자로 명성을 남겼다

       남편과 스승에게 질문을 주고받으며 열심히 공부한 이유는

       聖人이 되기위한 노력을 했던 것이다

   .임윤지당은 聖人의 목표보다 학문적으로 이어받은 인물로써

      “성품에 남녀의 차이가 없다의 주장으로

       남녀의 역할은 달라도 인간 자체로는 똑 같다는 의미로써

       여성에게 상당한 자신감을 주었다

 

@임윤지당과 강정일당의 理論的 差異

   .강정일당의 공부하는 환경을 강조하였는데

      “바느질하며 청소하는 여가에 옛 經書古典을 읽으면서

       그 이치를 궁리하고 옛사람들의 행실을 본받아

       先賢들의 경지(聖人 되기)에 이르기를 작정하고 있습니다...”

   .강정일당은 이치를 알아서 聖人의 경지에 나가는것을 더 중시하였다

       핵심적인 방점은 聖人 되기에 두고있다

   .임윤지당은 理論에 중점을 두었다면,

       강정일당은 實踐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신인선)

@申師任堂(신인선 1504~1551)

   .賢母良妻인가? 賢母知妻인가?

   .38(율곡 6), 혼인 20년여 만에 烏竹軒(강릉 친정)을 떠나

       사실상 친정 모친과 영원한 이별을 하게되고,

       한양(수진방)으로 이사하여 홀로된 시어머니를 봉양하게 된다

       10년간 한양에서 생활후 세상을 떠난다

   .사임당의 부친(신명화)도 한양사람이었으나,

       처가(강릉)에서 거주한 이유는 男歸女家婚의 풍습 때문이다

   .栗谷(이이)은 신사임당의 行狀에 모친의 재능과 성격을 묘사하였다

  “7살에 母親은 안견의 그림을 모방한 山水圖를 그린것이 아주 절묘했으며,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낼만한 사람이 없어...”

   .외할머니가 사임당의 재주를 키워준 덕분으로 공부를 시작하였고

       자신이 감정에 충실하고, 才能과 기호에 몰두한 女性이다

 

@賢母良妻로 만든 장본인은 우암 송시열이 크게 일조를 하였다

   .栗谷(이이)學風을 이어받은 畿湖學派(우암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그림을 유별나게 과도한 칭찬을많이 남겼다

   “五行의 정수를 얻고, 元氣의 융화를 모아...

       마땅히 그가 栗谷을 낳으실만 하다...”

   .율곡을 낳은것 만으로도 현모양처가 되었다는 것인가?

   .사실, 申師任堂栗谷 敎育에 헌신적인 모습은 전해지지 않지만

       栗谷이 훌룡한 學者~孝子尊敬받는것은 스스로 努力한 결과이다

   .매창(큰딸)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찿아가도록 열어준 지혜도 훌룡하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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