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09.종로상공회(JCA12), 공명선(성훈조명, 종로구 원남동) 방문
*조선시대 妻家, 外家의 威力(딸의 유산 상속)
조선시대 妻家, 外家의 威力(딸의 유산 상속)
1.申師任堂(신인선 1504~1551)
@賢母良妻인가? 賢母知妻인가?
.38세(율곡 6세), 혼인 20년여 만에 烏竹軒(강릉 친정)을 떠나
사실상 친정 모친과 영원한 이별을 하게되고,
한양(수진방)으로 이사하여 홀로된 시어머니를 봉양하게 된다
약10년간 한양에서 생활후 세상을 떠난다
.사임당의 부친(신명화)도 한양사람이었으나,
처가(강릉)에서 거주한 이유는 男歸女家婚의 풍습 때문이다
.栗谷은 신사임당의 行狀에 모친의 재능과 성격을 묘사하였다
“...7살에 母親은 안견의 그림을 모방한 山水圖를 그린것이
아주 절묘했으며,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낼만한 사람이 없어...”
.외할머니가 사임당의 재주를 키워준 덕분으로 공부를 시작하였고
자신이 감정에 충실하고, 才能과 기호에 몰두한 女性이다
.賢母良妻로 만든 장본인은 우암 송시열이 크게 일조를 하였다
栗谷의 學風을 이어받은 畿湖學派(우암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그림을
유별나게 과도한 칭찬을 많이 남겼는데 “五行의 정수를 얻고,
元氣의 융화를 모아 마땅히 그가 栗谷을 낳으실만 하다”
.율곡을 낳은것 만으로도 현모양처가 되었다는 것인가?
.사실, 申師任堂이 栗谷 敎育에 헌신적인 모습은 전해지지 않지만
栗谷이 훌룡한 學者~孝子로 尊敬받는것은 스스로 努力한 결과이다
.매창(큰딸)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찿아가도록 열어준 지혜도 훌룡하다
2.왜 외할머니가 외손자를 많이 키웠는가?(모계확대가족)
@유희춘(1513~1577 미암일기), 홍문관 부제학
“광선(유희춘의 孫子)이 妻家로 간다고 동생이 슬피 울다...”
.혼인직후 4일만에 온적은 있었으나, 이번에는 40일간 머문뒤 처가
남원으로 장가(김장 집안)로 출발할 때 석별의 광경이다
.中國의 “歸”의 뜻이란?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곳으로 시집간다”
.18c 혼인후 친정에 1~2년 머문 관례를 “해묵이”라고 불렀으며,
이 때문에 외할머니와 외손자간에 사랑도 돈독했던 것이다
.유배와 지방근무 때문에 첩이 있어, 실제 부부생활은 20년(혼인40년)
@1414년(태종14), 의정부 논의 中國의 禮가 비롯됨은 婚姻의 禮이다.
“陰”이 “陽”을 찿아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가서 후손을 낳아
內家에서 키우고, 本宗이 중한줄 알게된다...
@권상일(1679~1759), 영남의 대표적인 관직자
.아들이 妻家로 가서 婚禮를 치른뒤, 아들은 5일후에 돌아왔지만
며느리는 친정에 머물러 얼굴조차 보지 못한것이다
.주변에서 며느리가 “현명해 보인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는데
며칠후 아들이 전해준 며느리의 편지만 받아 본 것이다
.2년 5개월후, 비로소 孫子(7~8개월)를 데리고 시댁으로 돌아온다
3.妻家~外家의 威力을 경계하라!
@仁穆大妃는 영창대군(아들)을 포기하고 친정아버지(김제남)를 택했는가?
.光海君의 폐모살제, 癸丑日記(계축일기 1613년, 광해군5)
.光海君은 이복동생(영창대군)을 江華島로 유배시키고
계모 仁穆大妃(인목대비 1584~1632)를 西宮(경희궁, 현 덕수궁)에
유폐시키는 패륜적 道德性을 빌미로 仁祖反正의 명분을 준것이다
.협상과정에서 아들을 단념(포기)하고, 대신 父親(김제남)과 동생의
구원을 제시하였지만, 친정 부친과 동생을 죽였으니...
“絶祀(절사)가 되지 않도록 둘째동생과 어린동생을 살려달라...”
즉, “친정집을 보호해 달라!”고 선처를 요구했던 것이다
.仁穆大妃는 친정세력(西人)의 代表者로써 끝까지 친정을 지키지만,
光海君의 대북파에 비하면 미세한 세력이었다
.西人의 仁祖反正으로10년간의 서궁 유폐생활을 마치는데,
얼마전 “서궁의 복숭아 나무가 자라는 등, 祥瑞로운 氣運이 돌아...”
仁穆大妃의 道德的인 勝利를 상징하는 현상으로 평가된다
.仁穆大妃는 결정적인 순간에 영창대군을 포기하고 光海君과 협상했던
현명하고 현실적 여성으로써, 친정의 代表者로써 역할에 충실하였고,
훗날 西人 세력들이 뭉치는 求心的인 역할을 해준 女傑이다
@태종(이방원)은 外戚(외척)을 제거하여 妻家의 權力을 경계하였다
.왕자의 난 一等功臣 처남(민무구, 민무질)을 죽이고
.세종의 장인(심온)을 제거하여 후계 政權을 안정시켰다
@혜경궁 홍씨(閑中錄),
.思悼世子는 뒤주에 갖힌날, 혜경궁 홍씨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자네는 무섭고 흉한 사람이로세, 자네는 世孫(정조)을 데리고
오래 살려고 하는구려, 내가 오늘 나가 죽을테니 그를 꺼려서
世孫의 휘항(방한모자)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심술을 알겠네...”
.부인(혜경궁홍씨)이 남편을 버리고 친정(홍봉한)과 아들(정조)을
선택한 사실을 감지했던 것이다
@홍국영(1748~1781)
“28세에 양손으로 하늘을 받쳐 나라를 泰山 盤石위에 올려놓고,
32세에 最高의 반열에 올랐으니...
기록이 있은 이래로 臣下에게는 없었던 일입니다”
“홍국영은 본디 사나운 성질에 교활한 재주까지 지녔습니다
하늘의 功을 자기의 힘으로 알고, 스스로 방자하게 조종하고
與奪(여탈)하였으니 臣下된 道理가 없습니다... ”
.홍국영은 도승지(비서실장)~숙위소 대장(경호실장)의 권력가이다
.반대세력이 틈을 노리고 있었으며, 外戚(외척)의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1778년(정조2), 홍국영의 여동생이 후궁(元嬪, 원빈)으로 간택되었다
입궁한지 1년도 되지않아 세상을 떠나버린다
元嬪의 무덤을 “園(원)”으로 격상하고 魂宮(혼궁)까지 두었다
후궁의 묘를 園으로 봉하는 경우는 王을 생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궁중법도와 규정에 어긋난 일을 자처하게 된것이다
.은언군(정조의 동생)의 아들(담)을 元嬪의 養子로 삼았다
작호(완풍군)는 “完”은 조선 왕실의 본관인 전주 “완산”이며
“풍”은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에서 따온것이 화근이 된것이다
.원래, 종친의 작호는 성씨의 관향을 따르는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홍국영의 욕심은 완풍군을 정조의 후계자로 염두해둔 것이다
그래서 완풍군을 甥姪(생질: 누이의 아들, 조카)이라 호칭하였다
그리고, 주변에 정조의 “儲嗣(저사)를 넓히는 일(후궁을 추천)을
일체 언급하지 못하게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정조4년(28세), 홍국영은 실각되어 故鄕 鄕吏로 내려간 뒤 평가는
王權에 도전하는 國權을 옮기는 일이라고 강력히 비난받았다
.홍국영이 관직에서 물러나 歸鄕을 떠나고, 정조는 후궁을 맞게된다
.홍국영이 탄액을 받았던 상소문에는
“外戚은 늘 權勢를 부릴 가능성이 농후하고...”
@高麗 현종은 母親의 불륜으로 태어났지만,
.母親은 王后 출신이며, 막강한 황보씨 가문의 외손녀 출신이다
.현종은 外家의 후원으로 王으로 즉위할수 있었다
4.妻家의 위력때문에 “七去之惡(칠거지악)”으로 쫓겨난 부인은 거의 없었다
@2007년, 법정 夫婦의 날이 선포되었다
.가정의 달(5월), 21일(2명이 하나로써 결합된다)
@朝鮮시대의 家庭의 보호를 위하여 “夫婦는 離婚할수 없다”
.사회의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인데, 嫡妻를 쫓아낸다면 집안이
불안해지고, 가정의 관리자가 없어 가문을 유지할 파트너가 필요하고,
재혼하려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大明律 離婚을 일부 승인하였는데, “부인이 남편에게 暴行하거나,
姦通했을때, 이때 남편이 원한다면 가능하였다”
.또한, 嫡妻(적처)의 집안과도 인연을 끊어야 하기 때문에
妻家 가문의 영향력, 위력을 감안하지 않을수 없었다
.七去之惡이 없었던것은 후손이 없으면 養子제도를 적극 권장했으며,
이혼이 불가능하였고, 양가 가문의 권력때문에 어려웠던 것이다
.조선의 혼인 배경에는 집안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되었고,
같은 당파 출신끼리, 문화적 배경도 비슷했을 것이다
@姜靜一堂(강정일당, 조선 여성 성리학자)
.척독(尺牘) “남편과 주고받은 쪽지 편지”가 유명하다
각자 주거공간을 상호 존중하여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남편은 대부분의 활동공간은 바깥 사랑채에서 지냈으며,
함부로 內堂(부인의 생활공간)에 출입을 하지 않았고,
.부인은 內堂에서 거처하며,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함부로 밖에 나가지 않았다
.禮記 “男子는 집안일을 말하지 않고, 女子는 밖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5.사위도 緣坐制(연좌제)에 해당되는가?
@설중매 성삼문(1418~1456 死六臣) *영남별곡(대구 성삼문)참고
.1421년(세조3), 김질은 성삼문의 역모 사실을 고변했다(6월2일)
.단종 복위를 함께하자고 꼬였다는 것이다
“근래 혜성이 나타나고 시옹방의 시루가 절로 울었다”
*시옹원, 시옹방: 궁중 주방을 말한다(어선방: 황제주방)
.고변 하루전날, 창덕궁 연회(명나라 사신영접)에 거사하기로 했었다
.고위 무반(2명)이 임금 옆에 侍立(시립)하는 雲劒(운검)의 임무를
성승(성삼문의 父親)과 유흥부가 맡기로 하였으므로,
세조의 측근(신숙주, 권람, 한명회)을 제거하기 좋은 여건이었다
.한명회가 창덕궁 광연전이 덥고 협소하고, 운검을 생략하기로 건의하여
세조는 신숙주를 시켜 재검토한뒤 운검을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거사를 연기하기로 주장을 하였지만,
“雲劒을 세우지 않은것과 세자가 본궁(경복궁)에 있게되어
참석치 않은것은 하늘의 뜻이다...”
.참석키로 했던 세자도 참석을 하지 않았으며,
급히 통보를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올까봐서 불안하였다
.성승과 유흥부는 보안누설을 염려하여 강력하게 추진을 강조하였다
.유흥부는 훗날, 심문과정에서 통탄을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書生과는 같은일을 도모하기 어렵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성삼문이 결단하지 못함을 원망하였다
.1672년(현종13), 인왕산 비탈에서 오지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그릇 속에는 신주 3개(성삼문, 외손 박호 부부)가 있었다
성삼문의 신주는 외후손 박씨집안으로 전해져 250년후 발견되었다
.성삼문의 아들(5명)은 모두 참살되어는데, 부인이 종에게 성삼문의
신주를 부탁하였고, 종이 죽은뒤, 외손(박호)에게 전해진 것이다
.박호는 아들이 없었고, 성삼문의 외손으로 불이익을 받을수가 있었다
그래서 종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박호는 과거급제후 정언으로 등용되었으나, 대사간의 논박을 받았다
“역신의 후손으로 간관이 될수 없다...”
.박호는 한참 후에야 관직에 나갈수 있었는데,
형(박증)의 아들을 養子로 들였지만, 성삼문의 祭祀는 맡기지 않았다
後孫에게 부담을 주지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후, 오지그릇의 신주는 다시 박씨집안(모친 박씨)으로 보내졌는데,
박팽년의 生家와 박씨들은 홍주(충남 홍성)에 있다
박팽년은 자신의 딸을 자신의 外家로 출가시킨 것이다(외가, 외후손)
*聯婚(연혼)이란? “여러대에 걸쳐 婚姻한 가문을 말한다”
.계속 박씨가문에서 祭祀를 지낸 “外孫奉仕”를 한것이다
.1691년(숙종17), 死六臣을 재평가하면서 박씨가문을 고려하게 되었다
“지방에 流落한 외손이 지금 祭祀를 받들고 있으나,
가난하여 祭祀를 올리지 못하니, 감사로 하여금 그 성명을 찿아
등용케 하시면 殿下의 거룩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숙종은 건의 받아들여 등용한 것이다
.大明律(역적 집안의 여자, 연좌제 여부)
“어미, 딸, 첩, 아들의 처는 功臣의 종으로 삼고,
만약 딸이 시집가기로 하여 남편이 확정된자는 연좌하지 않는다”
.시집간 딸과 사위는 연좌가 없어, 문제삼지 않은 것이다
.세조는 “역모한 집안의 사위도 모두 먼 지역으로 안치하라”
@장인과 사위는 긴밀하여 장인대신 품계를 대신 올려받기도 하였다
.함께 동거하기도 하고, 재산을 똑같이 나눠 받았다
@설중매 박팽년, 달성 파산서원(荷葉亭, 하엽정, 1747)
.박성수(박팽년의 11대 후손)가 낙향한 순천박씨 운집마을
.낙빈서당(1678)~파산서원(사액, 1694, 사육신 6명 배향)
.99칸 건축, 박계창(13대 후손)은 24칸으로 줄어들었다
.태고정(양녕대군 필체), 초천자 현판, 삼가헌(1747), 3대정문
.대들보에 미수 허목의 필체(전서체)이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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