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5.청운산악회 북한산(사모바위)
*八王之亂(팔왕의 난)
팔왕의 난(서진시대)
@전란에 참가한 8명의 왕
1)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선제 사마의 5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2)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 무제 사마염의 5남
3)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선제 사마의의 9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4)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제헌왕 사마유의 아들, 무제 사마염의 조카
5)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 무제 사마염의 16남.
6)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무제 사마염의 6남.
7)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안평헌왕 사마부의 손자,
무제 사마염의 6촌
8)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사마욱의 손자, 무제 사마염의 6촌.
고밀문헌왕 사마태의 차남,
*사마의: 조조(위), 조비의 책사
@서진(西晉)의 제위 계승문제를 둘러싼 황족들의 대결이 내란으로 번진다
.內亂의 영향으로 西晉(서진)은 멸망에 이르렀고,
이후 隨나라가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250년간 전란의 시대를 말한다
.진무제(사마염)는 전국을 통일한 후,
.사마씨의 천하보전을 위해 전국에 자식, 형제, 조카들에게 분봉해 주었다
뭇 별들이 달을 옹위하듯 자식, 형제들이 황실 보호를 원했으나
.진무제(사마염)의 생각과는 크게 변질되어 간다
.군권을 장악한 각지 번왕들의 야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서
끝내 큰 변란(팔왕의 난)을 초래하게 되었다.
@西晉의 초대 황제였던 진무제(武帝, 사마염)의 사망 이후,
.진무제의 아들 진혜제(惠帝, 사마충)가 즉위했으나 암우한 제왕이었기에
정치는 양준(楊駿)과 진무제의 황후양씨 일족이 독식하게 되었다.
.조정 대권을 쥐고 최고 권력에 오른 태후양씨의 父親(양준)은
권모술수를 써서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밀어냈다.
.진무제(사마염) 황후가문 양씨에 대하여.
황후가씨 가남풍(賈南風)과 진나라 종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진혜제(사마충)이 즉위한 후, 팔왕의 난이 시작되는데,
.진혜제(사마충) 황후가씨(賈氏)는 양씨를 조정에서 추방하고
자신이 실권을 잡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진혜제(사마충) 황후 가남풍은 종실의 번왕들에게 상경하여
양준(진무제 사마염의 황후양씨)을 제거하라는 밀서를 내려보냈다.
.지방에 할거한 종실의 번왕들은 그러지 않아도 조정 대권을 쥐려는
야심을 가지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던 차라,
얼씨구나 하고 경성으로 올라왔다.
@황후가씨는 거대한 무력을 지닌 진혜제의 동생 楚王(사마위)와 협력하여
.낙양(洛陽)에 있던 양씨를 모두 죽이는 작전으로 시작된다
.밀서를 받고 가장먼저 초왕(楚王: 사마위 司馬瑋)이 상경하였다
혜제황후 가남풍은 즉시 진혜제(사마충)의 명의로 조서를 내려
양준(진무제 황후양씨의 부친)이 모반했다고 선포했다.
.초왕(사마위)는 황궁 경호대의 도움을 받아 양준을 잡아 죽이고
태후양씨 삼족을 멸하고, 양준의 심복 관원들도 모조리 목을 잘랐다
@황후양씨 가문을 조정에서 추방한 가씨의 정권이 들어섰다
.양준의 세력을 제거한 후 진혜제 황후(가남풍)는 정국을 안정시키려고
여남왕(汝南王 사마량)을 불러 황제를 보필하도록 했다.
.진혜제(사마충)의 대숙부였던 여남왕(사마량)에게 맡겼으나,
여남왕(사마량)은 황후가씨의 의도대로 정권을 운영하지 않았다.
.사마량(여남왕)도 권세욕이 강한 자라,
암암리에 초왕(사마위)의 군권을 앗으려고 획책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가남풍은 종실 왕들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예 모두 없앨 궁리를 했다.
.실망한 황후가씨는 진혜제(사마충)의 밀서를 이용해 사마위(초왕)가
사마량(여남왕)을 공격하게 만들고,
사마량(여남왕)을 궁지에 몰리게 해 자살하게 만들었다.
.황후가씨는 먼저 남편 진혜제(사마충)로 하여금 초왕(사마위)에게
밀서를 내리게 하여 여남왕(사마량)을 죽여버렸다.
그렇게 해서 황후 가남풍은 西晉의 대권을 틀어쥐었다.
@이용가치가 없어진 초왕(사마위)에게 토사구팽이 일어난다
.초왕(사마위)이 조정의 주요 대신(여남왕: 사마량)을 함부로 죽였다는
살해죄를 뒤집어 씌워서 죽여버렸다
.황후가씨는 자신의 지위를 안정화 시켰다.
@진혜제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황태자 사마휼(司馬遹)이 있었는데,
.황후가씨는 사마휼의 재능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사실 진무제는 아들 진혜제가 암우한 사실에 실망해서
황제제위를 양위할 생각이 없었다.
.무제는 손자(사마휼)의 재능을 인정해 진혜제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황후 가남풍은 아들이 없었다.
.황후가씨는 남자로써 만족스럽지 못한 진혜제와의 사이를 멀리하고,
낙양의 미소년을 모아 밤마다 자신을 시중들게 하고,
이용가치가 없으면 살해했다.
.황후가씨의 야심을 느낀 사마휼(황태자)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하였으며, 노점을 궁궐에 열 정도로 노력했으나,
황후가씨에게 모반 의혹을 받고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황후가씨는 조정의 대권이 남의 손에 넘어갈까 봐 우려했다.
.거짓 임신한 척하고 남몰래 여동생의 갓난아기를 자기 소생이라 했다
이후,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나중에 독약을 먹여 죽여버렸다.
그리고 안아온 그 아기를 태자로 삼았다.
.그 소식이 새어나가자 종실이 들끓었다.
사람들은 사마씨의 천하를 빼앗으려는 가황후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조왕(趙王, 사마륜 司馬倫)이 가장 먼저 군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궁으로 진격하여 들어왔다.
@300년, 황후가씨에 의해 황태자(사마휼)은 살해당했으며
.조왕(사마륜: 진혜제의 대숙부, 사마량 여남왕의 동생)은
진혜제의 종제(從弟)인 제왕(사마경)과 협력하여
진혜제의 칙서를 위조해 궐기했다.
.훗날, 황후가씨는 황태자(사마휼)를 살해한 죄를 물어 몰락하였다
황후가씨는 가씨일족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301년, 조왕(사마륜)은 진혜제를 유폐하고 스스로 즉위하게 된다.
.조왕(사마륜)은 제왕(齊王, 사마경 司馬冏)을 폐위시키고
.황후가씨를 폐위시킨뒤, 곧 황후가씨를 독살시킨다
.당시 허창을 지키던 제왕(사마경)은 사마륜(조왕)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불만이 많았다.
.제왕(사마경)은 전국 각지에다 함께 군사를 일으켜 조왕(사마륜)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조왕(사마륜)과 측근 손수(孫秀)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제왕(사마경)은 장사왕(사마애: 진혜제의 동생)과
성도왕(사마영)과 하간왕(사마옹: 사마의의 조카의 아들)을
낙양에 소집시키다
.정권 탈취하려는 야심이 가득한 3명: 성도왕(成都王, 사마영 司馬潁),
하간왕(河間王, 사마옹 司馬顒)이 제왕(사마경)과 연합 공격으로
조왕(사마륜)은 패배하였으며 결국 살해당했다.
@진혜제를 복위시켰던 제왕(사마경)은 정치실권을 자신에게 집중시킨다
.낙양에 들어온 제왕(사마경)은 조정 대권을 잡고 밤낮 주색에 빠졌다
.진혜제의 황태자 지명에도 독단으로 결정하기 시작하자,
.이때, 장사왕(長沙王, 사마애 司馬乂)가 반란을 일으켰다.
성도왕(사마영)과 하간왕(사마옹)이 장사왕(사마애)를 지지하였다
.제왕(사마경)은 장사왕(사마애)과 몇년을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여 목이 잘렸다.
.제왕(사마경)의 후임을 누구로 할것인가?를 두고 이해관계가 발생했다.
@제왕(사마경)을 죽인 장사왕(사마애)은 입궁, 대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장사왕(사마애)은 혼자 조정을 독점하자, 하간왕(사마옹)이 불평하였다
.하간왕(사마옹)은 성도왕(사마영)과 연합으로 장사왕을 공격한다
장사왕(사마애)과 하간왕(사마옹)은 낙양 부근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렇게 쌍방이 어지럽게 싸우고 있을 때,
낙양성 안에 있던 동해왕(東海王, 사마월)이 장사왕(사마애)을
기습하여 불태워 죽여버렸다.
.이때 성도왕(사마영)이 낙양성 안으로 들어와 승상 자리를 차지하고
조정 대권을 틀어쥐었다.
@이제 성도왕(사마영)이 황태자이자 승상으로서 정치를 맡게 되었으나,
.낙양에 있는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성도왕(사마영)은
하간왕(사마옹)의 부하 장방(張方)에게 낙양을 통치하게 하였다.
.서서히 성도왕(사마영)이 승자로서 정치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동해왕(사마월)이 가만 있지 않았다.
.장사왕(사마애)을 죽인 공로는 자신(동해왕)에게 있는데 ,
엉뚱한 성도왕(사마영)이 조정 대권을 독차지하니 불만이 많았다
.동해왕(사마월)은 진혜제(사마충)의 명의를 빌어 장사왕(사마영)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키는데, 동해왕(사마월)은 사마씨 일족인
예장왕(預章王, 사마직 司馬熾, 진혜제의 막내동생)도 합류한다
.예장왕(사마직)은 한때 사마영(성도왕)에게 패했으나,
흉노와 선비등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이번엔 성도왕(사마영)을 황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장사왕(사마영)은 진혜제를 데리고 낙양을 떠나 장안으로 도망쳤다.
.당시 장안은 하간왕(사마옹)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간왕(사마옹)은 도망쳐온 장사영(사마영)을 배제하고
자신이 진혜제(사마충)를 통제했다.
.결국, 晉나라 조정은 하간왕(사마옹)의 권력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해왕(사마월)은 낙양을 수호하던 張方과 하간왕(사마옹)을 공격하였다
.하간왕(사마옹)이 강화를 위해 나오자 그를 구속하였다.
.동해왕(사마월)은 왕준의 세력이 커지자,왕준과 연합하여 관중을 공략
계속하여 하간왕(사마옹)을 격파하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동해왕(사마월)은 진혜제와 동해왕(사마영), 하간왕(사마옹) 등을
모두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왔으며, 나중에 3명을 모두 죽였다.
.성도왕(사마영)을 살해한 동해왕(사마월)은 진혜제(306년 사망)의
뒤를 이어 예장왕(사마직)을 진회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보좌한다.
.황후가씨(진혜제)에 의해 황후양씨(진무제) 추방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팔왕의 난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307년, 진회제 즉위(懷帝: 사마치 司馬熾), 연호는 영가(永嘉)이다
.황권을 빼앗기 위한 八王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매듭짓게 되었다.
“八王之亂”은 무려 16년간 나라를 전란의 도탄 속에 빠뜨렸으며,
八王중에서 7명이 죽어 국력은 형편없이 쇠약해졌다.
.팔왕의 왕들은 군사력의 강화를 위해 주변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장에 투입했다.
.이민족은 강력하다고 생각하던 西晉의 내부의 무력함과 약세를 느끼고,
제각기 독립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되었으며,
.손수, 장화, 양제 등 많은 인재와 무장들이 죽어 큰 혼란을 빚게 되었다.
@북방과 서부의 소수민족이 중원을 침공을 받아,
.서진 왕조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닥치면서 폐망하게 된다
@이것은 304년 유연의 의해 전조가 건국되면서,
.중국 전지역을 포함한 거대한 내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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