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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갑총재(2020-2021)

2020-0714, 운영위원회 위촉장 수여

by 조흥식 2023. 12. 16.

2020-0714, 운영위원회 위촉장 수여(리베라호텔)

명재 윤증(논산)

 

 

 

 

 

명재 윤증(논산)

@파평윤씨, 명제 윤증(86, 1629~1714)

.백의정승(선비정신)으로 명문가문으로 부흥시켰다

.논산군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자락 옥녀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玉女彈琴 明堂(옥녀탄금)으로 左靑龍이 거문고 지세로 유명하다

.고택 사랑채에는 담장이 없어 숨길것이 없는 투명한 집안이다

 

현재 후손이 거주하고 있으며, 뒤뜰 장독대가 일품이다

1년 전통문화 답사인원 약 15,000여명이 고택을 찿는다

.고을 서민들을 위해 집안에서 양잠(누에)을 못하게 하였다

 

*강릉 선교장, 함양 일두 정여창 고택(빈집, 1450~1504)도 유명하다

.6.25사변에 조종사가 폭격을 만류했던 고택이다(당시, 인민군 사령부)

.遺言을 남기다 제사상의 크기를 90cm이상 하지마라

묘비에 徵士(징사)만 써라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던 선비를 말한다

조선의 대표徵士는 명재(윤증), 대표處士는 남명(조식)이다

 

@명분없는 벼슬을 20여번 거절한 선비로 유명하다

.이를테면, 인생말년에 벼슬과의 전쟁이었다

.81, 우의정 사양 상소를 8회 올리고,

.83, 판중추부사 사임상소를 9회 올린다

.인조~효종~현종~숙종: 임금얼굴을 한번도 보지않고 立身揚名을 참았다

 

@당시, 숙종시대(1674~1720): 당쟁 살육전의 하일라이트(예송~환국)

.己亥예송(1659)西人시대(우암 송시열)

.15년후, 甲寅예송(1674)南人시대

.6년후, 庚申환국(1680)西人시대

.9년후, 己巳환국(1689)南人시대, 세자책봉 문제(장희빈의 아들)

.5년후, 甲戌환국(1694)의 노룬시대, 南人의 몰락

 

@명재(윤증)과 우암(송시열)은 사상적 대립관계로 볼수있다

.윤증의 父親(윤선거)의 묘비 비문내용을 보면 알수있다

.송시열은 철저한 朱子學派이지만,

.윤증은 기호학파 儒學을 계승하면서 朱子學과 약간 다른 노선으로

보다 (마음)을 중심으로 판단한 心學으로 陽明學과 일맥상통한다

 

.조선 양명학의 大家 하곡(정재두, 1649~1736)를 지도하였다

陽明學3대 골격(心卽理, 知行合一, 致良知)중에서

致良知가 핵심은 마음자체가 곧 良志, 지혜

.朱子學은 도덕적, 윤리적인 성격의 를 중시한다

) 四端七情 가운데 四端이지만, 喜怒哀樂같은 인간적인 감정은 포함하지 않는다

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마음)喜怒哀樂같은 (제거되어야 할) 인간의 감정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므로 (마음)을 중시한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純善(순선)이지만(마음)은 선악과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로, (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까지도 용인되는 것으로 본것이다

그래서 主理를 강조하는 朱子學派에서는 을 배척했던 것이다

 

.陽明學善惡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마음)자체가 곧 良志이고, 知慧이다라고 주장한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卽心是佛)”禪家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아마 윤증은 佛敎思想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仲父(윤상거)가 불교에 심오한 조예가 깊었다고 口傳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朱子學(마음)을 강조하는 陽明學을 더 좋아했을 것이다

 

.벼슬, 슬데없는 名譽의 집착에 대한 마음이 사라지고

實心實功이 쌓인다고 윤증은 주장했던 것이다

훗날, 陽明學實學者(홍대용, 박지원, 박제가)의 사상적 기반이다

.명제이후, 소론의 학풍이 변화하게 된다

명분보다 실질, 실용을 중시하는 실학적 기풍으로 변화한다

.陽明學은 하곡(정재두)이후, 조선말기 강화학파(이건승, 김택영)출신들이

독립운동 투사로 변화한것도 실천을 중시했던 심학적 전통이다

해방전후 박은식, 정인보, 송진우등도 심학의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55(숙종9, 1683, 경신환국 이후), 벼슬을 응하려 했었으나 포기한다

.3(호조참의)를 제의받고 한양으로 상경하던중, 과천 나좌량(동문수학)의 집을 방문하였다

.당대의 명문세족의 논객(남계 박세채, 1631~1695)을 만났다

남계(박세채)의 가문에는 박세당~박태유~박태보...(수락산 노강서원)

남계의 孫子사위는 西人의 영수(우암 송시열)孫子(송순석)이었다

노론~소론의 懷尼是非(회니시비, 1684, 노론~소론이 갈라서다)

당파속에서 남계는 중간입장에서 탕평책을 주장하였고,

끝내 윤증의 입장을 두둔하여 소론쪽으로 기울었던 인물이다

 

.1683, 懷尼是非(회니시비, 1684)가 일어나기 1년전에 만난 이유는

윤증의 입궐여부를 놓고 밤새워 토론을 한것이다

.일부러 만난 이유는 숙종이 三人同事(삼인동사)를 하명했기 때문이다

三人同事? 3(송시열, 윤증, 박세채)에게 정권을 맡긴셈이다

성격이 전혀 다른 3명에게 협력정치를 주문한것이다

 

송시열 중심으로 윤증(좌청룡), 박세채(우백호)...

.윤증은 입각3대 명분이 있었다

1)西人南人의 쌓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2)외척의 세도를 막지 않으면 안된다

3)당이 다른자는 배척하고, 당에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지금의 잘못된 풍토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첫째조건은 南人(영남학파)의 차별과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방안이었다

*박세채는 3가지 조건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윤증은 지체없이 고향(논산)으로 되돌아 온다

3가지 조건이 不可能하다면 나도 벼슬에 들어갈수 없다

.남계 박세채도 이에 공감하고, 출사를 포기하고 집으로 낙향한다

.소식을 전해들은 송시열도 속리산(괴산 화양동계곡)으로 낙향한다

.다음해, 西人이 분열된다(노론 송시열~소론 윤증...)

 

@종학당(재야에서 후손을 가르켜 47명 대과 급제)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윤증 고택과 5분거리)

.1618, 仲父 동토(윤순거, 1596~1668)가 문중의 힘을 모아 건립했다

300년간의 가문의 장기 발전계획을 세운 장본인이다

학문적 지도는 동토의 동생(노서 윤선거)이 전담하였다

윤선거는 송시열과 학문적 논쟁을 벌인 일류 학자출신이다

이후, 아들(명재 윤증)이 번창시킨 것이다

.파평윤씨 노종파의 특별 교육기관이다(문중 서당, 가족 사립학교)

3(, , )을 위한 독특한 집안이었다

 

.대청마루 시판의 생활지침(명제의 친필)

日用(하루에 할 일), 夜寐(야매: 밤에 잠자는 것),

持身(지신: 몸가짐의 방법), 四勿(사물: 하지말아야 할 4가지),

讀書之序(독서의 순서), 讀書之法(책을 읽는법)

.중등과정을 마치면 윗 건물로 올라간다: 대학과정 교육공간

현판 吾家白鹿(오가백록)”: 우리집이 곧 백록이다

백록이란? 朱子에게 유래되었는데,

朱子白鹿洞에서 살았고, 白鹿洞 書院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淨水樓(정수루)2층 누각으로 80여명이 앉을수 있는 공간으로

멀리 조상들의 묘를 참배하고 공부를 하던 사방이 탁트인 공간이다

 

안동 屛山書院(서애 류성룡)晩對樓(만대루)와 비슷하다

.1618(개교)~1910: 292년간 대과급제 42명을 배출하였고

종학당 설립이전에 이미 5명이 합격하였다(47: 윤씨가문)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배출 명문집안은 전주이씨(이성계 가문)이다

 

2위는 파평윤씨 460명 배출하였는데, 그중 47명은 명재 집안이다

.종학당과 정수루의 낙서가 아직도 남아있다

登科後初上樓(대과에 급제후 처음 오르다)

人傑在齊(인걸재제: 인걸이 이 공부방에 있도다)

南風萬抱(남풍을 한아름 안았다. 큰 뜻을 품는다)

.贍養(섬양)이란? “넉넉하다~풍부하다스승들의 급료를 칭한다

.課讀(과독)이란? 돈을 관리하는 법을 가르켰다

.종학당의 입학자격이 신분 차별없는 문호개방이 이채롭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인간의 죽음을 극복하는 2가지 방법이란?

1)저술을 남기는것(法子: 사상을 이어받은 자식, 弟子)

제자는 죽음을 극복하는 문명적 방안이다

2)자식을 남기는것(血子: 혈통을 이어받은 자식, 子孫)

죽음을 극복하는 본능적 제안이다

 

@義田義倉제도 구현(민간 구휼사업)

.주변 공동체에 대한 배려, 일정량의 기금을 마련한 것이다

.利不可獨食 이익이 생기면 혼자 먹지않는다

.윤씨 노종파는 오방파가 분가해 나간다

.윤순거는 이 5가구에서 7마지기씩, 35마지기를 내놓고 농사후

일정량을 거출하여 문중의 기금으로 적립하여,

문중의 제사비용, 부조금, 어려운 집에 밑천과 양식을 제공한다

윤순거는 先墓(선묘) 주변에는 윤씨거주를 금지시켰다

(윤씨들이 동네주민을 괴롭히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했다)

.동네 집 대지와 채마밭의 소작료 면제해주고,

.동민들이 생활을 지탱할만큼 전답을 임대해 준다

.동민들의 경조사에 종중에서 상당량을 보조해주고 대여해 준다

.흉년, 우환등 재난시에 상당한 재원을 보조, 또는 대여해 준다

.현재, 덕보마을에는 의창비가 세워져 있다

*범중엄(북송, 명재상 출신, 989~1052)義田 제도를 창안했다

*김제 서도리, 장씨가문도 활용했던 제도이다

 

@東學戰爭도 피해간 積善之家(적선지가)

.고을 서민들을 위해 집안에서 양잠(누에)을 못하게 하였다

.가장 오래가는 카리스마는 도덕성 처신이다

.남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살 행동을 하지말라

.자기만 이롭고 다른사람에게 방해가 되는일은 하지말라

 

@명재 윤증의 진면목을 배워라!

.윤증의 생가는 조그만 초가 세칸집에서 평생 검소하게 살았다

.보리밥, 볶은 소금, 고춧가루였으나, 방안에 책이 가득하였다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게하여, 문틈으로 옆모습이 전해오고 있다

유별나게 큰코(용코, 龍鼻 용비)는 대귀할 상, 결단력이 탁월함이다

.사실은 현재 고택은 큰아들(윤행교)가 살았던 윤행교 고택이다

.명재가 죽기 5년전(1709), 2째아들(윤충교)이 큰형을 위해 건축하였다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사랑채에 담장을 세우지 않았다

 

@6.25전쟁에도 살아남은 윤증 고택

.옆집에 살았던 박희동(공군 조종사)은 일본군 출신으로 낙향하였으나

6.25전쟁에 복직, 윤증고택(인민군 지휘부)의 폭격임무를 받았으나,

미공군을 회유하여 전통고택이 아직 살아남은 것이다

.앞마당에 石假山(석가산)을 조성하여 감상케 하였다

금강산을 모델로 만들어 상상케 한것이다

.사랑채 옆 편액: 桃源人家(도원인가)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

.화단을 둘러싼 정원석은 12, 하나가 巫山十二峰(무산십이봉)이란?

금강산 12000봉을 줄인 숫자인 것이다

*巫峽(무협)이란?

황토빛 長江三峽중에서 瞿塘峽(구당협)이나 西陵峽(서릉협)보다

巫峽(무협)이 주는 풍광이 가장 압권을 자랑한다

.현재 12대종부(신정숙)가 살고있다(대지: 3000, 50칸 고택)

 

@충청도 3대 명문집안

.연산 사계 김장생(광산김씨)

.회덕 우암 송시열(은진송씨)

.논산 명재 윤증(파평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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