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7. 여성위원회
旌善 我羅理(정선아리랑 유래)
旌善 我羅理(정선아리랑 유래)
1.아리랑(“고운님”)
.旌善 아리랑: 유장하고 메나리조 가락(주요무형文化財 지정)
.진도 아리랑: 구성지고 육자배기조 가락
.밀양 아리랑: 씩씩하고 정자소리조 가락
@정선카지노 아리랑(나는 어떻하라고?)
.山多三邑 寧旌平(산세가 험준한 오지마을 영월, 정선, 평창)
.정선 5일장(2일~7일): 올챙이 국수(옥수수), 수수떡, 전병...
.민둥산 둘레길을 오르면 억새밭이 장관이다(해발 1118.8m)
민둥산역~증산초교(해발 502m)에서 100분 소요(3.2km)
@만천유교 농부사(천주교 이승훈)
.亞魯聾 亞魯聾 於戱也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
.1865년(경복궁 공사 남녀부역, 願納錢)
.아이롱(我耳聾):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
.但願我耳聾 不聞願納聲(원하노니 내 귀나 어두워져라, 원납소리 듣기도 싫다)
@매천야록(황현)
“동학 농민군의 기세가 뜨겁던 1890년대초,
고종은 밤마다 궁궐에 불을 켜놓고, 악사들을 불러들였다
광화문이 무너지는 꿈에 잠을 설치던 고종의 심기를 다독거리던 광대무리의 아리랑 무대가 끝난것은,
왜인 자객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복원 중건공사(1860년경)에 끌려온
민중들의 속요를 근대아리랑의 시점으로 볼수도 있다
후렴에 “我難離(아난이): 떠나고 싶어도 못떠난다...”
@영화 “아리랑”
.1926년(나운규, 신일선): 전단(1만장)압수, 5년간 순회공연
본조 아리랑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은 순사 앞잡이를 죽인
주인공이 끌려가는 장면에 흐르면서 배경음악으로 시작되었다
“문전옥답은 다 어디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말인가?”
.장사익 소리꾼은 신아리랑을 열창하고 있다
2.정선 아라리 “누가 내 처지를 알리오?”
@桃源歌曲(高麗 忠義列傳)
.정선역 詩碑(“정선 아라리”), 옛 지명: 桃源
.我羅理 啞曪肄 餓愞彛要 哦義朗 古稽露 懶慕艱多(아라리 아라이 아나이요 아의랑 고계로 나모간다)
.어아동지 우리동지(말을 삼가고, 배고픔은 떳떳한일, 천신만고 이겨내어 견디며 살아가세)
@星摩嶺(성마령)에서 부른 정선아리랑(평창~정선 고개)
.오흥목 군수를 따라오던 부인이 3번 울면서 불렀다
.남편이 부임해서 울고, 고갯길이 힘들어 울고, 떠날 때 울었다
“아질아질 星摩嶺아 야속하다 관음베루, 지옥같은 정선읍내 십년간들 어이가리
아질아질 꽃베루 지루하다 성마령, 지옥같은 이 旌善을 누굴따라 나 여기왔나”
@정선아리랑 愁心篇(수심편)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 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울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 주게”
.만수산(개성 松嶽山), 何如歌(어떠하리? 이방원)~丹心歌(정몽주)
3.정선 아라리의 사설
@노래가사
.정선의 구명은 무릉도원이 아니냐
.무릉도원은 어데 가고서 산만 충충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해설(사설)
.정선의 舊名(무릉도원): 정선은 충렬왕때 도원(桃源)이라 했다
.충충하네: 여러 겹으로 솟아있네
.모춘(暮春): 늦은 봄
.아우라지: 두 갈래로 흘러온 강물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곳(북면 여량리에 있는 나루)
.싸릿골: 아우라지 건너편의 유천리에 있는 마을
.올동백: 올동백꽃(4월에 피기 시작, 보통 동백꽃보다 일찍피는 동백)
.아우라지 뱃사공아...다떨어진다
“여량리의 한 처녀가 유천리에 사는 사랑하는 총각을 만나서
동백꽃을 따며 놀려고 나루로 나와 보니 간밤에 내린 비에
강물이 불어 배가 뜨지 못함을 알고 애달프게 부른 노래”
.겉돈: 노력해서 벌지 않은 횡재
.힘대 힘대: 힘껏 힘껏
.장치 다리: 뻗정다리
.노가지 나무: 노간주 나무
.백봉령: 임계면~삼척(북평읍)을 넘는 해발 900m 험한 고개
정선 아리랑의 유래?
1.고려말기 충신들의 “杜門不出”(두문불출, 72명)
@개풍군 두문동에서 草根木皮, 회유실패하자 불바다로 살육하였다
.三隱(절의를 지킨 3처사), 공주 동학사 경내 “삼은각비문(三隱閣碑文)”
.목은 이색(牧隱 李穡),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야은 길재(冶隱 吉再)
2.居七賢洞(거칠현동)
@황해도 개풍군 두문동을 떠나 깊은 산중으로 몸을 숨겼다(隱居한 7인)
(1)어주 전오륜(漁洲 全五倫 1631-1720)은 정선군으로 낙향한다
.전오륜(7현)의 조상의 故鄕(정선전氏 시조...정선군 남면 낙동리)
.採薇軒(채미헌)으로 연명한다 “고사리를 뜯어 먹고 사는 사람”
.아침마다 관복차림으로 開成을 향하여 큰절을 올렸다
.후손들은 외가집 性씨를 빌려 과거에 합격, 조정출사후 파직되었다
.전주李씨(이성계)와 혼인을 금지한 가문이다(용궁전씨)
.전오륜은 거창(경남)에 묻혔으나, 합천댐으로 정선으로 이장되었다
.전두환도 祖父의 묘지가 합천댐에 수몰되어 옮긴후,
백담사로 유배갔다는 세간의 풍문이 전해진다
.전오륜의 효성(고향 용궁) “내무당(萊舞堂)”
성격이 너그럽고 용모가 단정 우아하고 예절이 발랐다
1660년(헌종1)에 진사, 홀어머니를 모시려고 과거시험을 포기
70세(1702), 도둑들이 칼과 창을 휘두르며 집에 들어왔을때,
백발 老人(전오륜)이 100세의 老母를 업고 황급히 피신하였다
도둑의 두목이 보고 감탄하여 부하들에게 철수시켰다
“진실한 효자이다. 이 집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건드리지 말라”
*당시 용궁현감 이지석(李志奭)이 전오륜의 효행을 듣고,
“내무당(萊舞堂)” 현판을 써 주었다
(周나라 효자 “노래자(老萊子)”가 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해
70세에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 놀이를 하며 춤을 추던 집)
.암행어사(이병상,1714)의 보고를 받고,첨지중추부사 벼슬하사(84세)
“전오륜은 나이 70세가 되도록,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을 친히
점검하여 부모님께 올리고, 항상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펴 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매일 성묘를 하였습니다“
.용궁향교의 세심루 기문(洗心樓 記文)을 지었다(영조, 대사헌 추증)
(2)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은 원주로 은거, 목은 이색과 자주 만난다
.原州원氏 중시조(90세), 한사(寒士), 끝까지 충신의 절개 志節
.이성계, 정도전과 절친했지만 不事二君 隱者이다
.치악산에서 개성을 생각하며 草根木皮(솔잎, 껍질, 술)
.태종(이방원)은 스승을 직접 찿아가지만 피한다(1415년, 太宗臺)
.최초로 “작설차”명칭이 등장하는 원천석의 다시(茶詩)가 유명하다
(3)야은 길재(冶隱 吉再)
.선산에 은거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
.문하주서 시절(우왕), 창왕이 가짜 王씨사건으로 쫓겨나며
.고려가 망할 징조가 보이자, 낙향하며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
(당시 유언비어: 우왕, 창왕은 승려 신돈의 아들이다?)
.정종(2대)~태종(3대)이 입궐을 요청했으나 정중히 사양한다
.선산출신으로 이방원과 성균관 동문수학 동창이었다
.세종(4대)의 부름을 후손에겐 허락하여 성종까지 벼슬을 하게된다
.유별나게 청렴하여, 새벽닭이 울면 의관을 차리고 사당을 찾았다
(4)송은 구홍(松隱 具鴻)
.두문동기(杜門洞記) 杜門目靖 德配殷仁 七十諸賢 壹體同心
(문 닫고 스스로 진정하니 그 덕이 은인(殷仁)1과 짝 하네.
70명의 제현(諸賢)들 한 몸에 같은 마음일세)
(5)목은 이색(牧隱 李穡)은 여주로 낙향, 원천석(원주)과 절친했다
.제자들의 結黨謀亂으로 유배된다(제자: 권근. 김종직. 변계량...)
(6)충제 최문한(忠濟 崔文漢)은 강릉으로 은거(좌시중: 영의정급)
.江陵최씨 중시조, 숭명공주와 혼인(27대 충숙왕의 딸, 사위)
.고려말, 소나무 8그루 싣고 강릉으로 피신하였다
.팔송정(八松亭) 詩
.옛 도읍 추모하니 전대의 왕을 잊지 못하네.
.푸르디 푸른 송악을 숭명공주는 사랑했지.
.본재한 여덟 그루 소나무 수레에 싣고 강릉으로 왔다네.
.공들인 솜씨 덕으로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네.
(7)서견(徐甄)은 이천으로 유배되었다(淸白吏), 이천서씨 중시조
.1391년(공양왕3)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었으며,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윤소종(尹紹宗)을 탄핵하다
.정몽주(鄭夢周)의 피살후, 이성계, 조준, 정도전이 실권을 장악한다
.김진양(金震陽)등과 유배된다
.시흥 충현서원(빈터)
강감찬, 서견, 이원익(조선 청백리)을 배향하였다
효종(1658), 삼현사~충현사~충현서원(숙종 친필현판, 1676)
.관악산 연주암에 은거하면서 개성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3.관악산 “연주암”의 유래?
@의상대사가 의상대(연주암)를 창건후 수도하였다(문무왕, 677년)
.이어서, 관악사도 창건하였다
@고려말 충신(서견, 강득룡, 남을진)이 은거하였다
.의상대에서 송악(고려왕조)을 쳐다보며, 그리워 연주대로 칭했다
@양녕대군, 효령대군의 유랑길에 관악사에 은거하였다
.40칸의 현위치에 관악사를 창건하고, 한양궁궐을 바라 보았다
.의상대를 연주대라 칭하고,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불렀다
4.채미헌(採薇軒)
@고죽국 왕자: 백이+숙제(不事二君)
.周문왕(서백)을 덕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찿아갔으나, 이미 죽은 직후였다
.殷주왕(달기, 강여상, 봉신방)을 토벌하러 진군하는 말고삐를 잡고,
상나라 벌주 토벌을 반대했으나, 목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수양산으로 은거하며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죽었다
.백이와 숙제 묘비에는 글씨가 없다(白碑)
수양산 청풍대(연암 박지원의 사신로에 있다, 열하일기)
@아곡 박수량(전남 장성)의 白碑: 명종이 비석을 하사했으나 유언하였다
@채미가(採薇歌)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꺽는다.
포악함으로 포학함을 바꾸고도 그것을 모르나니
신농, 우, 하의 아름다운 풍속은 사라졌구나
나는 장차 어디로 갈것인가?
아 슬프구나. 운명의 기막힘이여...”
@麥秀之嘆(맥수지탄),채미자세가
.殷나라가 망한 자리에는 보리만 무성하여 탄식하다(기자, 箕子)
.殷紂王 충신3명: 기자(箕子), 미자(微子:이복동생), 비간(比干:숙부)
.미자(微子): 타국으로 망명한다
.기자(箕子): 거짓으로 미친척하며 종으로 연명한다
.비간(比干:숙부): 처형될때 간을 꺼내 7개구멍을 확인한다
.훗날, 箕子(기자)가 周나라로 가면서 殷나라 도읍지를 보고 한탄하였다
5.죽림칠현(竹林七賢, 魏~晉 전환기)
@칠현(七賢): 완적(阮籍), 혜강(嵆康), 산도(山濤), 상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
.정치 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7명의 自己韜晦(자기도회) 선비들이다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이 근본 사상이었다
(언제나 竹林아래 모인 士君子는 거칠것 없이 술을 마셨다)
6.강변칠우(江邊七友: 허균~광해군)
@피바람의 己丑獄死(기축옥사)
.대북파가 명문의 서자(7인), 칠서의옥(七庶之獄)이다
.거짓으로 역모 자백(박응서)으로 폐모살제(영창대군, 인목대비)
.박응서(朴應犀), 심우영(池友英), 서양갑(徐羊甲), 허홍인(許弘仁),
박치의(朴治毅), 이경준(李耕俊), 김경손(金慶孫)
.여주(驪州)의 강가에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시주(詩酒)를 나누며 교유한 비밀결사를 조직
*처지에 강한 불만을 품고, 수호전의 108두령에 빗대어 행동하였다
7.旌善 아우라지 “떼돈 번다”의 유래?
@떼돈번다: 정선에서 겨울 눈밭에서 벌목하여 남한강에 떼목을 띄운다
.漢陽을 한번 다녀오면, 군수 봉급보다 많아 황소를 구입하였다
.남한강 뱃사공의 아리랑 소리가 고개를 너머 전국으로 퍼진다
“아리랑은 곧 삶이요, 人生의 노래이다(우리들의 “쌀”이다)”
.조양강(朝陽江)이 정선읍을 휘감은 뒤,
.뗏목은 가오리 형태(7동)로 황새여울에서 회오리 물살을 통과한다
@아우라지 合江(두 강물이 합수하는 두물머리)
.아우라지와 餘糧(여량: 산간 강마을에 식량이 남아돈다)
.정선과 임계를 잇는 驛院(역원)과 고인돌(5기)이 있다
.오대산줄기 발왕산에서 발원한 松川(구절천)과
.태백산줄기 삼척 둥근산에서 발원한 骨只川(골지천,임계천)이 합수된다
.송천은 陽水, 골지천(九美亭)은 陰水이다(陰水가 불어나면 홍수난다)
.아우라지 처녀동상? “혼례가마가 전복되어, 신랑만 살아 남았다는 전설”
8.한강(4대 나룻터: 조포, 이포, 광나루, 마포나루)
@조포나루(신립 장군의 열두대, 탄두대)
.조포(여주 신륵사)는 침몰사고로 폐쇄되었다(학생49명, 1963년)
@이포나루(이포대교): 천녕(川寧)나루라고 불렀다
.한양과 강원도, 충청도의 중부내륙을 오가는 수운의 요충지
.영월~정선의 뗏목이 서울로 가던 떼꾼이 타고 다니던 “떼배”,
.소금을 싣고 올라가 콩이나 담배 등과 교환하던 “바꿈배(돛단배)”
.일반 백성들을 실어 나르던 “황포돛배”등으로 늘상 붐비던 곳이었다
@광나루: 한양의 대표적인 나룻터
.명종시절, 천호동부근 약수터를 찾아온 사대부 부녀자들의 가마가 하루종일 나루터에 붐볐다
@마포나루: 상선들이 운집(해산물:조기, 소금, 젓갈류), 쌀, 도자기(그릇)
.마포에서부터 충북 단양~제천까지 오가던 황포돛배는 조선의 명물이다
.장대같은 돛대에 큼직한 돛을 펼치고,
.유유자적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모습은 마치 한폭의 동양화같다
9.한강 나룻터(한양)
@鷺梁津(노량진)
.백로가 노닐던 나룻터, 물고기를 낚던곳이다
“노량(鷺梁)은 鷺(백로)+梁(징검다리)”
.노량~노돌~노들~노들길, 노들섬(노들나루, 도성방위 부대)
.露粱海戰?
.金烏山, 金鰲新話(경주 용장사), 琴湖江, 錦江, 金湖洞
@한양나루
.뚝섬 나루(효종): 목재와 땔감 거래의 교두보(영동대교, 살곶이다리)
.삼전도 나루: 세종이 대모산기슭의 헌릉(태종)을 참배하러 갔다
중종(31년), 배를 이어서 배다리를 가설하기도 했다
.두모포 나루: 동호대교 북단, 옥수동 나루터
강화도 기슭에서 바다 물고기가 이곳까지 거슬러 올라와 잡았다
.입석포 나루: 성수대교 낚시터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다
포구앞에 저자도라는 조그만 섬이 있어 유람객들로 가득차곤 했다
.한강나루: 한남대교, 조선 제일의 도선장이었다.
서울에서 용산과 충주로 이어지는 운송로의 요지로써
고려부터 한강도 명칭으로 불러, 지금의 한강으로 불리게 됐다
.동재기 나루: 현충원 앞(흑석동)
서빙고, 동재기 흑석 노량 등의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동재기는 물길이 험해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다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속출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서강 나루: 곡물 집산지였던 서강대교 아래에 있다
.양화 나루: 개화사상의 선구자 김옥균이 처형됐던 양화대교 부근이다
.공암 나루: 바위섬이 몰려있던 행주대교 아래,
근대이전까지는 한강 뱃길을 잇는 중요한 나루터였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daum blog "늘빛사랑 조흥식"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허재갑총재(2020-2021)'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0729. 제1차 회원확장특별위원회 TF회의 (0) | 2023.12.17 |
---|---|
2020-0728. 회관관리특별위원회 (0) | 2023.12.17 |
2020-0726. 신헌창 자문위원 별세 (0) | 2023.12.17 |
2020-0725. 제1기 라이온스 아카데미 준비오찬 (0) | 2023.12.17 |
2020-0725. 박영태 운영위원 자녀혼례 (0) | 2023.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