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4. 지구장학회
교산 허균(七庶의 獄, 홍길동전)
교산 허균(七庶의 獄, 홍길동전)
1.초당 순두부 유래?
@허균의 父親, 草堂 허엽(명조~선조, 청백리)
.동부승지,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서애 류성룡과 함께 東人의 영수 노릇을 하였다
.삼척부사 파직, 본가(강릉)의 샘물+간수(바닷물)로 두부를 제조판매
.부친(초당 허엽)의 스승(화담 서경덕 1489~1546)의 문인이다
退溪(이황)과 친분이 많았다
화담 서경덕(개경삼절): 도학, 성리학, 역학, 수학
제자신분을 구별없이 받아들인 개방적 지식인이었다
.모친(강릉김씨)은 후처로써 예조판서(김광철)의 딸 출신이다
2.허균 인생역정(1569~1618, 문인, 선조~광해군, 양천허씨, 50세)
@父親(허엽, 경상감사 시절)의 첩(강릉김씨)의 庶子
.강릉 생가(교산, 蛟山: 이무기 형상, 愛日堂 출생)
.임진왜란 피난길에서 부인과 아들이 죽었으며
.허성(이복형): 壬辰倭亂 직전에 일본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왔으며
.허봉(형): 허균 15세에 아껴주던 형이 유배되어 정치적 좌절과 죽었다
.누나(허초희, 허난설헌)의 요절
조선3대 여류시인(허난허설, 황진이, 이매창)
부안三絶(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
松都三絶(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
.13세(모친상), 15세(부친상), 21세(형, 누나 사망)
.이달(스승)도 서얼출신(천한 母親)으로 출세할수 없었다
*허균의 최후(묘)
.허균(부친+3형제+허난허설)의 묘는 서울 서초동에서
.허균의 묘는 가묘(시신은 찢겨져 버려졌다 1618년, 역모죄, 49세)
용인시 백암면 맹리로 이장(1970년경), 백암 비스타cc(36홀)
@허난허설 閨怨歌(규원가)
.남편한테 버림받은 규방부녀자의 限과 늙음에 대한 애환...
.백박의 노래(白頭吟, 백두음)을 들은후에 첩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3.허균의 평가
@허균의 역사적 평가는 악평으로 기록된다(광해군 실록)
.천지간의 괴물, 왕따, 자유 분망한 성품, 비주류~비타협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 같았다
@관료생활도 순탄하지 못했다
.6회 파직과 복직, 유배가 반복된 기구한 운명이다(50세 사망)
.개혁시도 비난, 불교심취, 여색으로 탄핵되었다
.불우한 庶子들과 내통하여 유배되었다(42세)
.초상기간에 기생과 술을 마신죄로 탄핵받아 파직이 반복된다
.서산대사, 사명대사를 만나 불교에 심취되어 삼척부사에서 해임된다
.명나라 사신단~황해도 도사~수안군수(황해도)~당상관(정3품)
~파직(강릉 낙향)~삼척부사~공주목사~과거시험관 복귀~
~함열 유배(조카, 제자의 부정시험)~부안방문(홍길동전 집필)
@서얼(庶孼)의 등용촉구, 탐관오리 척결
.통청운동(신분차별 폐지운동): 양반자손(적자출신)의 경쟁을 우려
.서얼허통절목(1777, 정조1년), 서얼들이 정계진출(규장각 검서관)
.서얼들의 역사책 집필(자신감): 규사(1858년, 철종), 19c 전기문
.해바라기(규), 서얼들의 약함을 표현~태양(왕)에게 짜웅식 표현
“아버지의 대감정기를 받고 당당히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님을 형님이라 부를 수 없어...”
.서얼금고법, 경국대전, 북학사상을 연구(청나라 문명)
.성리학의 정착으로 차별강화(서자, 평민출신의 과거시험 제외 차별)
@허균은 오명제(명나라 사신, 1598, 정유재란)와 시를 읊었다
.明나라 사신은 詩를 받아적어 “조선시선”을 편찬할 정도였다
(최치원, 이규보, 정몽주, 정도전, 허난허설, 서거정...)
.108명의 詩(32편)를 외워서 불러준 것이다
.明나라 사신단(천주교 서적, 사상에 관심: 도교, 유교, 천주교)
.지식인으로 詩文에 탁월하여 천재성을 지녔으며
홍문관 월과에서 9번 연속으로 장원급제한 수재였다
@허균의 6가지 죄목
1)황해도 도사 임명시 한양에서 기생을 데리고 부임하였다
사헌부에서 파직을 상소하였다
2)모친이 원주에 살다가 사망했을때 장례에 참석치 않았으며
상중에 육식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생과 유흥한 불효의 죄이다
3)1607년, 삼척부사 임기에 13일만에 파직되었다
승복을 착용하고 염불하며 부처상에 절을 하는등 불교를 신봉하고
서학(천주교), 유~불~도를 두루 섭렵한 지식인의 죄이다
4)스스로 많은 적을 만들었다
병조좌랑 시절(문사낭철), 국문시 내용을 기록하는데
높은 품계 대신(판부사 심희수)에게 물러가라며 고함을 치는등,
기자헌과 폐모살제 의견대립으로 갈라섬이 결정적이었다
기준격(기자헌의 부친)이 역모사건을 고발한 것이다
*과거시험 부정사건(19명 합격)과 채점에 깊은 관여로 시끄러웠다
.과거시험관은 이항복(좌의정), 이이첨, 이정귀(이조판서),
박승종(형조판서), 조탁(호군), 허균, 홍서봉, 이덕형(승지)
.합격자는 시험관의 아들, 사위, 조카, 사돈을 합격시킨 것이다
박승종은 본인의 아들(박자홍), 조탁은 자기동생(조길),
허균의 형의 아들(허보), 형의 사위(박홍도),
이이첨은 사돈(사위의 부친 이창후), 이웃친구(정준)을 뽑았다
박자홍이 이이첨의 사위였던 것이다
5)신분과 적서처별에 대한 개혁적 사상이다
5년후 역모사건과 연결된 사회불만의 서자출신의 진출제한에
불만이 많은 명문가문의 서자들이 칠서의 옥을 만들었다
임진왜란에 잠시 서자들도 과거에 진출할수 있었으나,
전쟁종료후 제한되었던 것이다
6)정치적 동조자가 없었다
이이첨은 광해군의 심문을 만류하여 역적의 죄인으로
판결문도 없이 처형되었다
허균 “내가 할말이 있다” 의견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4.매창(부안 기생)을 각별히 사모했다
@부안 세무공무원(전운판관, 32세)으로 부임한다(1601)
.1573년(선조6), 이탕종의 서녀(부안현의 아전)로 출생하였다
.詩妓(28세, 시기, 매창, 동갑내기 1573~1610년)
향금, 계생, 계량으로 칭한것은 계유년 출생이기 때문이다
.한시, 시조, 가무, 현금(예술인)에 능숙하였다(부친에게 글을 배운다)
.당시, 김제군수 옥여(이귀)는 암행어사에게 파직된다
@기생 매창의 첫사랑(18세)
.1590년, 매창은 부안을 찿아온 시인 촌은 유희경(46)을 만나지만,
2년뒤 이별하고 허균을 만난다
.애틋한 애정속에 곧 이별하지만, 7년후에 재회한다(1608)
.공주군수에서 파직된후 부안부사(김청택별장, 정사암)에서 만난다
.승문원 판원으로 복직된후, 매창과 수시로 편지로 안부를 전했다
.매창에게 보낸 편지 “부용꽃(芙蓉), 탁문군의 거문고, 봉래섬...”
.매창이 죽자, 슬퍼하며 “거문고와 함께 묻었다”고 전해진다
@卓文君(탁문군): 저돌적인 女人(과부, 대부호의 딸 출신)
.bc117, 사마상여 사망이후, 탁문군은 홀로 늙어...
.사마상여: 漢나라 정치인(거문고 대가)
거문고로 탁문군을 꼬여낸다(고려 서경별곡에도 언급된다)
江邊七友(七庶의 獄)
@강변칠우(1618년, 광해군5)
.7명 서출의 恨으로 정계진출을 상소한다
(여강 강변에 모여 수호지 竹林七賢을 본뜬 모습으로 생각된다)
.허균은 솔직, 금욕강조, 서출등용 촉구를 상소하였다
.癸丑禍獄(계축화옥)은 大北파가 일으킨 七庶之獄 사건이다
.박응서(영의정 박순의 서자), 서양갑(목사 서익의 서자),
심우영(심전의 서자), 이경준(병사 이제신의 서자), 허홍인...
.공주 목사시절, 심우영, 박응서와 친밀했으며
서양갑(칠서의 두목)과 친분으로 칠서의 옥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된다
.기준격이 부친(기자헌)을 구하려고 올린 비밀 상소문에 발각된 것이다
현응민(허균의 심복)이 남대문에 흉서 벽서를 붙이자,
허균이 투옥되었는데, 심복들이 체포되면서 불리한 진술을 한것이다
(하인준, 김개, 김우성...)
@1613년, 은상 살해사건(7명, 光海君, 문경새재)
.허위자백 “수백냥 거사자금은 영창대군을 옹립을 위하여...”
.명문 출신 庶孼(7명)은 모반죄가 작용되어(허균: 서얼의 정신적 지주)
허균, 하인준, 현응민, 우경방, 김윤황...저작거리에서 처형되었다
@허균은 광해군의 심문을 거치지 않고 능지처참에 처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준격(기자헌의 아들)의 상소문의 흉악한 모의와 곡절
.김윤황을 사주하여 흉악한 생각을 화살에 매달아 경복궁에 날려보내고
.하인준은 허균이 남대문의 흉방을 했다고 진술하였으며
흉악한 벽보를 붙이는데 동참한 죄명이 적용되었다
.추섬(허균의 첩)의 진술은 현응민은 허균의 눈과 귀가 되어
밤낮으로 함께 동거하면서 동참하고, 남대문의 흉방을 응민이 쓰고,
밤에 산에 올라가 소리를 친것도 응민이 짓이다
.윤황, 하인준의 진술에 의하면 몰래 승도들을 모아 난을 모의하고
산에 올라 야밤에 소리를 질러 백성들이 도성을 나가게 협박하였고
유구(왜구)의 군대가 원수를 갚으러 섬에 상륙하여 숨어있다고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는데,
.허균은 서얼들의 진술에 승복하지 않고 결안할수 없다며
붓을 집어던졌지만, 좌우 대신들이 강제로 핍박하여 서명케 하였다
.우경방은 군목에 같은 당인의 성명을 나열해 쓰고,
결사 맹문을 지어 한보길등과 죽음을 각오한 교유를 맺은 죄명이며
허균의 지휘를 받지 않은게 없으며,
흉악하고 참혹한 글자를 나무에 새기는 등 역모에 동참하였다.
가족을 함께 연좌하여 죄를 묻고, 재산을 몰수하고 집을 부숴버렸다
.광해군은 역도들이 거주지역 수령을 파직하고 읍호를 강들시켰다
.기자헌은 허균을 처형시켰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탄하였다
“옛날부터 형신도 하지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채,
단지 공초(타인의 진술)만 받고 사형에 처한 죄인은 없다.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것이다”
@박응서의 거짓자백으로 폐모살제가 시작된다(영창대군, 인목대비)
.왜 상인을 죽이고 돈을 빼앗았나? 거사 자금이 필요했다
.무슨 거사인가? 영창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했다
.누가 주도한 거사인가? 인목대비의 아비 김제남이다
.영창군을 옹립후 계획은? 인목대비의 수렴청정을 이루려 했다
.훗날, 인조반정후 “이이첨이 조작했다” 하여 숙청된다
@七庶의 獄(서양갑, 심우영은 혁명이 들통났을때)
.허균은 庶子들이 友情으로 감싸줘서 살아 남았지만
.현응민의 거사벽보를 南大門에 붙이다가 체포되었을때,
.이이첨(친구)에게 부탁하여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서자, 무사, 승려들의 혁명실패로 허균도 처형된다
@광해군 실록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휴대하고 관부를 드나들며,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다”
.스승(내암 정인홍)과 결별한 동계(정온)은 스승의 잘못된 정치노선을
비판하며 의절하였으나, 훗날 스승의 장례를 주관한다
“광해군을 지지하여 폐모살제를 동조했다”
허균의 유산(업적)
1.중수동해용왕묘비(허균)
@강릉출신 용왕의 노여움을 풀어주다
.지익복(양양)은 풍랑으로 망망대해에서 1주간 표류중에 섬에 도착했다
.푸른옷을 입은자가 용궁을 안내하여 자색옷을 입은 용왕을 만났다
“내가 강릉에서 수천년 제사를 지냈는데,
고을에서 쫓아내어 용궁에 왔다. 나를 옛집으로 돌려보내라...
만약 이행치 않으면, 큰해가 미칠것이다. 사또에게 전해라”
.漁夫는 이석림을 통해 부사(홍여성)에게 보고했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關東地域 風水被害가 계속되어 사람은 1만명이 죽고
가축은 수없이 죽어갔다, 특히 江陵이 매우 심했다
.강릉부사는 龍의 祠堂을 짓고 제사를 지낸이후, 豊年이 계속되었다
2.동묘 창건(東廟)
.선조시절, 허균은 明나라 사신한테 관왕묘 설치명령을 받는다
.동묘(관왕묘)를 중국식 건축공법(100여칸)으로 낙성식을 한다
.2년간 공사, 조산(造山)은 동대문밖에 평지를 쌓아서 만든 인공산은
동지(東池, 성벽 바깥연못)뒤에 땅이 낮고 습하고,
방비가 허약하여 보충하려 만든 봉우리이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은 성곽의 5개 구멍의 수문(청계8가)이다
.겸재 정선 작품에도 “東池와 五間水門”이 그려져있다
.해방후, 동묘부근에 동대문 발전소가 있었다
3.사명대사의 충혼 사당
@스승 서산대사가 입적한후, 묘향산 보현사를 거쳐
.해인사에 홍제암을 짓고 열반(1610 광해군, 67세)하였을때.
충혼사당의 비문은 허균이 찬하였다(광해군,1610)
.점필재 김종직(영남사림의 대부)의 묘비를 썻다
4.허균의 논설문: 한년참기, 한정록(유재론, 호민론)
@유재론
.조선은 인재등용을 기피, 남은 인재를 활용하라...
.인재의 길을 막고서 “조선에는 인재가 없다?”고 주장하지 말라!
@잘못된 인재등용을 비판
*“남쪽으로 가면서, 수레를 북쪽으로 몰아간다?”
(남쪽나라를 치고 가면서, 북쪽으로 수레를 내달린다...)
*잘못 가는길(魏, 계양)
북쪽으로 가는 사람에게 계양이 목적지를 물었더니
“楚나라에 갑니다”
“楚나라는 남쪽으로 가야 합니다” 길을 알려주었더니,
“馬다리가 튼튼하니 걱정말라” 다시 방향을 말해주었다
“馬夫가 수레를 잘 몰기 때문에 걱정없다” 또 충고했지만,
“노잣돈이 넉넉하니 괜찮다”
가면 갈수록 楚나라와 멀어질 뿐이다
*自家撞着(자가당착): 언행일치가 안되는 상황을 말한다
@호민론(豪民論: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백성이다)
.많은 사람의 울분을 만들어, 절반이 나라를 원망하는 것이다
“왜 서얼을 등용하지 않느냐?”
1)항민: 천한 백성(무식한 농사꾼...)
2)원민: 모순을 깨우쳐 변화를 요구하지만, 행동은 없는 백성
3)호민: 사회모순을 바꿔야하는 백성(중국, 진승과 오광)
@소설(6편), 詩(1500수)를 남겼다
小說 홍길동전(허균)
1.혁명적 고전소설(홍길동전, 1569년)
@신비한 능력(도술, 둔갑술)으로 비주류, 개혁성향
.남양홍씨(남양군파 14대손 홍징: 밀직사 상호군의 손자)
.祖父 홍징(6남 4녀)의 4째아들 父親(홍상직)은 고려말 무진참화
외가도움으로 장성에 피신하여 아들(일동, 귀동, 길동/서자)
.형(일동)도 도술을 부렸다
.연산군시절,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이 된다
@소설속의 홍길동의 孝誠
“초란(홍길동의 부친이 좋아하는 여인)이 홍길동을 죽이려고
자객을 동원하지만, 초란에게 복수를 부친 때문에 포기한다
부친이 어렵게 되자, 스스로 조정에 자수하여 부친을 돕는 孝誠,
부친 3년상을 치르는 유교사상의 솔선도 하였다”
@가탁소설(假託)인가? (허균의 이름을 빌린 작가인가?)
.허균의 문집, 저작물에는 없으나,
.이식(택당집), 황윤석(이재난고): 허균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소설(吉童)~조선실록(吉同)
.길동은 실존인물로 기록되었다(연산군 일기~중종실록)
“옥정자~홍대차림으로 첨지를 자처하여,
고을 수령들이 극진하게 선비대접을 하였다”
.관리~백성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기록되었다
.의적단 “활빈당”으로 빈민을 구제한다
@1908년, 항일의병운동, 진압사령관(이인영,1868~1909)은 부친상을
당하여 장례에 참석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실패한다
@전남 장성(소설속의 홍길동)
.백양사(백악봉,가인봉), 쌍계루와 학봉 길동샘, 필암서원, 축령산 휴양림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daum blog "늘빛사랑 조흥식"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허재갑총재(2020-202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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