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7.분과별 위원장 주요직위자 초청 간담회(지구본부, 송쉐프)
고성이씨(안동 臨淸閣)
고성이씨(안동 臨淸閣)
@조선 古宅의 특징
.구례 雲鳥樓(운조루)는 툭 터진 전망을 즐기기 위한 樓가 일품이다
.하회마을 養眞堂(양진당)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연결되는 통로가 매우 독특하고 자랑거리이다
.논산 윤증 古宅은 사랑채 담장없는 외부에 공개된 고택이다
.해남 綠雨堂은 안채와 사랑채의 방향이 서로 다르다
.봉화 충재 古宅은 거북이 형상의 돌(바위)위에 자리잡은 靑巖亭(청암정)이 매우 아름답다
*집터는 배산임수를 골격으로 갖췄으나, 세부적인 조건은 집집마다
결정적으로 분위기와 표정이 서로 다르다(웅장, 방정, 편안, 소박, 낭만, 강직한 터)
*道德經(도덕경)의 和而不同은 한옥의 성격으로 표현할수 있다
@임청각은 구례 雲鳥樓(운조루)와 함께 주변 조경이 빼어난 古宅이다
.백두대간 300리의 結局(결국)을 맺는 웅장한 智異山이 뒷산이다
.집앞에는 넓은 평야와 五行을 두루 갖춘 화려한 안산이 훤히 보인다
.섬진강이 유유히 운조루를 감싸고 흐른다
@臨淸閣(임청각), 고성이씨 종택
.500년 역사(1519년)의 古宅으로 1000평, 70칸(최초 99칸)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적용시킨 종택이다
태백산 줄기가 남쪽으로 흐른뒤~문수산에서 200리를 뻗어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영남산(250m)을 뒤산으로 삼았다
.태백산 황지에서 發源하여 400리를 흘러온 洛東江은 임청각 앞에서
강폭이 좁아지는것은 강건너 巫山(무산) 때문이다
.적당한 높이의 巫山(무산)은 정갈령부터 서쪽으로 뻣어
12봉우리가 멈춘곳으로 양자강의 협곡(무협)을 비유한 명칭이다
.집터의 좌향은 亥坐(해좌: 동남향에서 약간 남쪽방향을 말한다)
햇빛이 충분한 좌향으로 巫山앞으로 흐르는 壁水(벽수)가 황홀하다
.임청각 우측, 무산의 끝머리는 반변천과 낙동강이 合水된다
반변천은 영양, 진보, 청송, 안동대학을 거쳐 흘러오는 물줄기이다
두물머리 瓦釜灘(와부탄) 넓은 백사장에 하얀 갈메기들이 많았다
@臨淸閣의 자랑(1519~)
.壬辰倭亂 이전의 건축물로써 잘 건조시킨 소나무 木材로 지어졌다
숙련된 목수와 도공들의 作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朝鮮時代의 가장 오래된 民家로써, 단청했던 흔적이 이채롭다
당시 民家에는 단청을 금지하고 있었다
.君子亭(군자정)은 丁자형 건물, 정원안의 內庭亭子(내정정자)이다
정면(2칸), 측면(1칸), 온돌방으로 낭만적인 전망을 지녔다
.懸板(현판)은 退溪(李滉)의 친필이며
.대청에는 농암 이현보, 백사 이항복 등 제현의 詩板이 걸려 있다
.제봉 고경명(호남 의병장)의 詩懸板 제목은 “題임청각”이며,
끝 부분에는 고태헌(高苔軒: 고경명의 별호)이라고 쓰여있다
.경상감사 백사(윤훤)의 詩가 임청각에 걸려있다
.임청각 건물의 구조는 용(用)자 형태로써 日과 月을 융합한 글자로써
陰과 陽을 합했다는 의미로써 상서롭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內庭(안마당)이 4개소가 있다
@임청각(우물방)에서 태어난 인재
*무라야마 지준(일제시대)의 책(朝鮮의 風水)에 소개된바 있다
“3명의 재상을 배출시킬 靈室(産室)이 있고,
도적의 넔을 잃게하는 남문(일명, 退盜門 퇴도문)이 있으며, 不死의 칸(間)이 있는 집이다”
.靈室(영실)이란? 신령한 방, 氣運이 특별하여 新婚夫婦가 합방한다면
비범한 인물탄생을 예고했던 며느리들이 사용하는 안방이다
이방에는 외지인은 함부로 출입할수 없다
후손들은 “우물방”으로 칭하는데, 산실앞(2m 지점)에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의 精氣를 받으면 큰 인물이 탄생한다”는 전설도 있다
뒷산에서 내려온 地脈(지맥)은 보통 穴口(혈구, 우물) 앞에서
멈추는데 地氣가 혈구를 지나칠수 없기 때문이다
혈구앞에는 地氣가 뭉쳐 있으므로 靈氣가 어려있는 터에는
앞에 작은 우물이나 연못과 같은 혈구가 배치되기 마련이다
우물방은 혈구 코앞에 자리잡은 명당중의 명당인 셈이다
@우물방에서 태어난 인재
1)약봉 서성(1558~1631)의 母親(고성이씨)
.壬辰倭亂에 선조를 업고 피난갔던 인물이다
.한양 약전고개의 유래?
“서지약봉 홍지모당(徐之藥峰 洪之慕堂)”
.달성徐氏중에서 “약봉 서성”의 후손이 가장 출세하였고, 풍산홍씨에서 홍이상 가문이 번창하였다
.藥峰(약봉 서성)의 집터는 “손기정 공원”이다(옛, 양정고)
행정의 달인(선조, 8도 관찰사+5조 판서)
*(3대 정승+3대 대제학)후손 배출
아들(서경주)은 정신공주(선조의 딸)와 혼인, 왕실의 맏사위
.家訓 “勿怠僞善: 착한일을 하는데는 게을르지 말아야...”
서성의 모친(고성 李氏, 안동태생)은 혼인 5년만에 사별하고,
외아들(서성)의 학업을 위해 상경하여 상업으로 공부시킨다
.약전고개(藥田峴), 약주(藥酒)+약식(藥食)+藥果의 유래
모친(이씨)은 맹인이었지만, 집을 짓는데 공사감독을 하였다
목수가 일부러 대청기둥을 거꾸로 세웠는데, 손으로 만져 보고
그 기둥을 적발하여 바로 고쳐세웠다
.서청원(친박연대 대표)이 후손이다
@풍산洪氏: 원주시 단구동(강원도 99칸 대갓집)
.서지약봉 홍지모당(徐之藥峰 洪之慕堂), 달성서씨(약봉 서성)
(풍산洪氏 중에는 모당 홍이상의 후손이 가장 출세했다)
.모당 홍이상(선조, 대사헌) “아들4명 과거 대과합격”
.혜경궁 홍씨(6대 손녀, 사도세자비 정조의 모친)
.홍중효(정조, 예조판서) *소설 치악산의 주인공(이인직)
.3대연속 예조판서(三世連入禮判家)
.아들(홍수보): 정약용의 처삼촌~손자(홍의호): 대과 급제
.손자(홍주원, 영안위): 정명공주와 혼인(선조, 영창대군 누이)
2)매산 류후조(1798~1876)의 모친(고성이씨 임청각)
.興宣大院君 시절(좌의정)출신으로 폐정 개혁의 선봉에 나섰다
.南人중에서 풍산류씨 가문에서 서애 류성룡(영의정, 선조)이후
.류후조가 재상(고종)으로 드물게 등용되었다
3)독립운동가 9명이 탄생
.이상룡(석주 1858~1932)
.이상동: 신돌석 장군 휘하에서 의병운동
.이봉희: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장
.이승화: 만주 서로군정서에서 활약
.이준형: 만주 유하현 경학사에서 활동(1942년 일제항거 자결)
.이형국: 신흥무관학교 군관 양성조달과 비밀결사 신흥사에서 활약
.이운형: 서로군정서 특파원
.이광민: 재만주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
.이병화: 압록강 연안 일본영찰 주재소와 세관을 공격
*서백당(경주 양동마을)에도 3명의 血食君子(혈식군자)가 탄생할 명당
*내앞 의성김씨 종택(학봉 김성일)에도 産室이 있다
*택리지에 안동의 명승지(2개소) 적혀있다
(고려 공민왕의 친필 현판의 영호루, 임청각)
@제봉 고경명과 임청각 가문은 사돈지간
.이후, 학봉(의성김씨, 김성일)가문과 인연을 맺는다
.제봉 고경명(창평고씨, 장흥)은 壬辰倭亂 3父子의 순절하여, 三父子 불천위 명문가문으로 유일하다
.고경명은 漢陽 벼슬관직에서 큰아들(준봉 고종후)과 임청각 큰딸과 婚姻으로 血緣을 맺게된다
.제봉 고경명(59세, 1591)은 신묘년 늦은봄에 동래부사를 그만두고,
故鄕(담양 창평)을 들리지 않고, 漢陽으로 가던중에 임청각(사돈댁)을 방문하였다
.이복원(이명 李洺의 증손자, 행암의 7대손)의 삶과 풍모를“천태산의 道人 하계진”에 비유하였다
*하계진은 누구인가?
이태백(唐나라 詩人)은 “술을 앞에 놓고 하계진을 생각한다”
對酒億賀監(대주억하감)이란?
五言律詩에서 그를 風流男兒로 부르고
두보(飮中八仙歌)는 “술을 좋아하는 8명의 神仙가운데 한사람”으로
부를 만큼의 당대의 風流道人으로 알려진 人物이었다
.제봉 고경명은 壬辰倭亂(1592) 금산전투에서 2째아들과 함께 순절하고,
큰아들(고종후, 임청각의 사위)은 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하였다
.큰며느리(임청각, 이원복의 큰딸, 고종후의 처)의 기제사를 400년째 창평고씨 집안에서 올리고 있다
*丁酉再亂(정유재란, 1598)에 호남지방의 피해가 많았을때,
제봉 고경명의 4째아들(고순후)은 동생(고용후)를 포함하여
큰형수 고향(임청각)으로 80명(가족:10명, 가솔:70명)이 피난한다
.임청각은 明(군대)이 주둔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고, 안동을 전전하였다
市隱堂(시은당) 李珍(이진, 풍산 예안이씨)의 집에도 머물렀으며,
金鷄 鶴峰宗宅(학봉종택)에도 몇년간 머무른다
.몇달후, 고순후는 歸鄕(담양 창평)하였으나
동생(고용후)과 가족들은 학봉종택에 남아 있었다
.훗날(1618년 여름), 고용후(막내아들)는 안동부사로 임명되어
당시 경상감사(백사 윤훤)과 함께 임청각을 방문하게 된다
이때 임청각의 주인은 이적(李適 , 이복원의 3째아들, 행암의 8대손)
경상감사 백사(윤훤)는 이원복 회갑연에 지었던 제봉 고경명의
詩板을 보고서 차운하여 지은 詩가 임청각에 걸려있다
@예술가 虛舟(허주) 이종악(임청각 11대 종손, 1726~1773)
.五壁 풍류가객으로 임청각~樂山 仙刹(선찰)까지 뱃놀이를 즐겼다
.虛舟府君山水遺帖(허주부군산수유첩, 1764, 4월)
1)東湖解纜(동호해람): 임청각 앞 동호에서 닻줄을 풀다
2)羊汀過帆(양정과범): 돛대를 펴고 반변천 상류쪽의 양정을 지나다
3)七灘候船(칠탄후선): 칠탄에서 배를 기다리다
4)泗水泛舟(사수범주): 사수에서 뱃놀이를 하다
5)船倉繫纜(선창계람): 선창에 배를 메다
6)落淵慕색(낙연모색): 저녁 노을질 무렵 낙연폭포를 감상하다
7)仙寺尋眞(선사심진): 선찰사를 방문하다
8)輞川歸棹(망천귀도): 망천리에서 작별하고 배로 돌아가다
9)伊湖停棹(이호정도): 이호에서 정박을 하다
10)雲亭風帆(운정풍범): 돛대에 바람을 싣고 백운정을 지나다
11)鮮魚返照(선어반조): 선어연에서 뒤를 돌아보다
12)伴鷗觀燈(반구관등): 반구정에서 민가에 켜진 등불을 바라보다
.왕복 60km 임하면, 임동면, 길안면 반변천 연안에 배가 정박하는 절경을
12폭에 실제 지명(동호, 양정, 칠탄, 사수, 낙연)으로 남겼다
@허주의 예술적 감각
.허주는 船遊(선유)의 벗(18명)과 거문고, 서책, 茶器를 휴대하였고,
아끼던 거문고 뒷면 琴名에 “書琴背(서금배)”라고 새겨 넣었다
“내 마음을 알아줄 이, 네가 아니면 그 누구이리...” 좌절감과 고독
.허주는 五壁(오벽)을 두루 섬렵한 인물이다
“古書癖(고서), 彈琴癖(탄금), 書畵癖(회화), 花卉癖(화훼), 舟遊癖(주유)”
.허주는 花卉(화훼: 수석, 분재)중에서 梅花분재를 좋아했다
.舟遊癖(주유벽)은 마지막 경지이자 최고의 경지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5대 장르인 셈이다
*담양 소쇄원에 출입하는 선비중에도 舟遊癖(주유벽)이 있었다
*거문고를 좋아했던 임백호(1549~1587)의 “一劍一琴千里人”이 유명하다
“가슴에 칼 한자루와 거문고를 품고 전국의 名山大川을 유람하다”
방랑의 동반자는 거문고였던 것이다
@영남지방에서 藝術性을 발휘할수 없었던 분위기
.영남지방은 道德的 원칙과 절제를 강조하는 退溪의 主理學風과
儒敎的 성향으로 금욕적 엄숙한 學風으로 예술성이 드물었다
.안동의 헛제삿밥은 제사하지도 않으면서 제삿밥을 해서 먹었던 것이다
“7첩 반상이면 상객에 대한 대접이었다”고 한다
*湖南 예술가문: 해남 綠雨堂(고산 윤선도), 진도 許小痴(허소치)
@버리고, 또 버리고, 다시 버린다
.영남학파(南人)의 몰락으로 중앙정치에서 소외되었다
.1728년(영조4), 무신란 이후 “南人의 푸대접 시대”가 찿아온다
.1762년(영조38), 사도세자의 참변으로 虛舟(이종악)는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하여 일생 강호의 處士로 山林에서 살게된다
.벼슬을 통한 入世間에서, 處士로써 出世間을 택한다
@임청각의 족보는 佛家와 仙家사상을 취한 조상도 많은 편이다
.행촌 이암(李嵒, 1297~1386, 고려말 공민왕)의 상고사를 저술하였다
“한단고기”는 1세 단군왕검~47세 단군왕검의 2096년 동안 檀君의 재위기간과 歷史를 기록하였다
“단군세기” 강화도에서 은둔하면서 저술하였다(1363년)
말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에 입산후 世上에 나오지 않았다
.진각국사(1270~1335, 고려말 國師), 고성이씨, 행촌(이암)의 삼촌이다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 출신의 13세 國師이다
백양사(장성)의 유명한 비자나무 숲을 조성했던 승려로써,
바자나무 열매는 기생충의 구충제로 사용했던 약용식물이었다
백양사가 고성이씨의 원찰이 된 것도 진각국사의 인연 때문이다
.운암대사는 행촌(이암)의 동생으로 고승이었다
.이원(李原, 행암의 孫子 1368~1429), 영의정(세종)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직후, 낙향한 인물이다
.이증(李增, 이원의 6째아들, 행암의 曾孫子 1419~1480), 영산 현감
고성이씨, 안동으로 이사하여 인연을 시작한 入鄕祖
.이굉(李汯, 이증의 2째아들, 행암의 4대손)
1513년, 개성 유수를 사직, 落鄕하여 “歸來亭(귀래정)”을 건립하였다
.이명(李洺, 이증의 3째아들, 행암의 4대손)
1519년, 의흥 현감을 사직, 와부탄(瓦釜灘)에 매료되어 낙향하여
臨淸閣을 건립한 창건주이다
.이굉(李肱, 이명의 아들, 행암의 5대손)
반구정(伴鷗亭 “갈매기와 벗을 한다”)을 귀래정 옆에 건립하였다
.이용(李容), 반구정에서 인생말년을 보낸다
*三代(이명, 이굉, 이용)가 벼슬을 버리고 반구정에서 隱居하였다
固城李氏三世遺墟碑(고성이씨삼세유허비): 3대 歸去來 실천기념비
*歸來亭, 臨淸閣은 도연명의 歸去來辭(귀거래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동쪽언덕에 올라 긴 휘파람을 불고, 맑은 물가에서 詩를 짓는다
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賻詩(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
*陶淵明(도연명, 중국 동진(東晉), 宋나라 때의 詩人 365~427, 63세)
29세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여,
41세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사직하교, 官界에 나가지 않았다
관직을 사임하면서 쓴 시(詩)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이후 향리의 전원에서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詩는 사언체(四言體) 9편과 오언체(五言體) 47편이 전해지고 있다
따스한 인간미와 고담(古談)의 기풍이 서려 있다
@獨立運動家 석주 이상룡(1858~1932,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임청각 400년 종손, 전재산을 처분하고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1896년, 의병활동을 시작
.1907년, 협동학교 설립
.1911년, 친척(50가구)을 대동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 耕學社(경학사)를 설립과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
*독립운동 명문가문: 우당 이회영(백사 이항복의 후손)도 유명하다
*안동지방의 獨立運動에 적극 참여한 가문
(임청각, 의성김씨, 진성이씨, 전주유씨...)
.종손3대 독립운동 가문(이상룡~이준형~이병화)
400년전 3대가 歸去來를 실천했던 기념비 “三世虛遺碑(삼세허유비)”
.隔世遺傳(격세유전)이란? “1代만 독립운동을 해도 3代가 고생한다”
후손들의 고통스러움을 짐작할수 있다
@허은(임청각의 19대 종부, 1907~1997)
.석주 이상룡의 손자며느리(이병화의 부인)
.왕산 허위(1855~1908)의 재종손녀
(허위: 구한말 전국 13도 의병연합부대 군사장)
.슬하에 6남1녀 중에서 형제(4명)는 생활고와 울분으로 일찍 죽었고
아들(2명: 이항증, 이범증)과 딸(1명)이 살아 남았다
이항증과 여동생은 고아원 생활로 고통속에서 성장했다
.큰아들(이항증)은 수업료를 내지 못하여 중학교를 중퇴하였다
군복무 이후, 본인이 성장했던 孤兒院(고아원) 총무로 재직하였고
실직자로 전전긍긍 하였으며, 어렵게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친척의 소개로 은행에 취직하였다(1972~1993)
은행원 봉급으로 형님들의 조카(9명)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孤兒院 院長같은 어려운 생활이 연속된 것이다
은행퇴직후 사생활이 없는 임청각 복구와 관리에 전념하고 있다
.2째아들(이범증)은 형(이항증)의 도움으로 고려대 사학과를 어렵게
천신만고 끝에, 9년만에 졸업하여 유리한 대학 졸업자로써,
서울 중앙중학교 교장으로 재직중이다(2012년)
*이범증(2째아들)의 회고
“1972년까지 임청각의 古書들은 도난에 우려하여
안동군 월곡면 도곡동 齋舍(재사)에 보관중이었다.
형(이항증)에게 5만원을 받아 트럭에 古書들을 싣고,
고려대 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총장(김상협), 도서관장(현승종)의 사례금(4000만원)을 거절하였다
500년의 유조상들의 물을 팔아치 울수 없었다
고려대 출판사는 (석주유고)를 무료 출간을 해준것이다 ”
*구술 기록이 충간되었다(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
@이범증(서울 중앙중학교 교장)의 증언
*석주 이상룡의 직계 종손(증손자: 이항증, 이범증)이 임청각을 지킨다
“虛舟公(허주 이종악, 임청각 11대 종손)의 아들(이의수)이 있었다
부인(전주유씨, 유씨 할머니)은 딸(3명)을 낳았으나 아들이 없었다
남편(이의수)은 병들어 묵숨이 위독해지자, 代를 이을 결단을 내렸다
부인은 “내가 먼저 죽어, 저승 염라대왕 名簿를 바꿔야겠다”
바늘 한쌈(24개)을 먹고 자진하였는데, 남편은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재혼한 부인한테서 아들을 생산하여 宗孫의 代를 이었다
부인(전주유씨)의 큰딸은 하회류씨에 시집가서 아들(류후조)을 낳고,
류후조의 여동생은 의성김씨(봉화 해저종가)로 시집가 딸을 낳았다
여동생이 낳은 딸이 안동권씨(봉화 닭실마을 관행당 宗家) 가문으로
시집을 가서 딸을 낳았다
이때 시집갔던 딸이 낳은 딸이 다시 임청각의 며느리가 된다
임청각 며느리의 아들(3형제)는 모두 용~호랑이~봉황 같았는데,
큰아들이 석주 이상룡이다
결국 혼맥이 돌고 돌아온 血脈의 유산이 된 셈이다”
@임청각의 시대적 수모로 축소되었다
.영남을 대표하는 양반집안으로 99칸 대저택을 자랑했다
.낙동강 상류부근에 유람선 접안시설(전용 선착장)을 보유할 정도였다
.1930년대 후반,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의 임청각 종택이 일부 철거된다
중앙선 철길공사로 99칸에서 70칸으로 축소되었다
.1944년, 철도 선로반원 합숙소로 징발되었으며,
.1975년, 32가구로 활용되었다
.1975년, 합숙소 철거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임청각 옆, 법흥사의 벽돌탑(통일신라): 17m 높이, 7층 규모
@임청각, 국가헌납을 시도하였으나 불발되었다(2002년)
.1920년 당시, 서류상 등기(4명)된 후손이 70명(4명 사망)이다
.후손들의 서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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