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7. 청운산악회 풍고 백용현묘소 참배
*양주시 주내 천주공원묘지, 도봉역 묵은지식당
洗劍亭과 紫霞門
洗劍亭과 紫霞門
@약속은 상호간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결정하는 다짐이다.
.제도적인 힘의 강요에 의해서 맺는 것은 일방적 계약이며,
.사회적 제도나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맺는 약속은 서약이다.
서약이 전근대사회에서는 대부분 권력층에 의한 충성 맹약이었다면
오늘날 혼인서약~모임의 일원으로 행동 규범을 지키겠다는 공개적인 약속이다.
.약속, 계약, 서약... 본인의 선택이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적극적이며
강한 결속력을 발휘하는 약속이 있다. 義를 맺는다는 결의(結義)다.
.약속은 속성상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義를 앞세워 맺은 結義는 그것을 능가한다.
@結義의 아름다운 전범을 三國志의 桃園結義에서 찾는다.
.도원결의(桃園結義)는 3c 진수가 쓴 삼국지를 바탕으로,
14c 나관중이 長篇小說로 재구성하면서 첫머리에 삽입하였다
.위(魏)~촉(蜀)~오(吳)... 3국이 자웅을 겨룰때,
.後漢의 혈통을 이은 유비(劉備)에게 역사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다.
.유비, 관우, 장비가 桃園에서 義兄弟를 맺고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과정은 삼국지 전편을 관통하는 백미다.
@조선 시대의 결의?
.실증 유물까지 남아 있는 세검정(洗劍亭)의 결의다.
.세검정은 검을 씻었다는 정자, 세검정에 얽힌 역사는 만만치 않다.
.의형제를 맺는 수준의 결의가 아니라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약속이었다.
.만일 약속을 어겨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멸문지화를 당하는 엄청난 다짐이었다.
.다짐은 피를 나눠 마시고, 손가락을 잘라 의지를 보이기도 하지만
세검정에서의 의식은 달랐다. 홍제천의 물에 칼을 씻는 의식으로
결의를 다졌다. 배신자가 나타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다행히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여 동지들은 부와 권세를 누렸고
세검정은 사나이들의 굳은 의지를 상징하는 전당으로 바뀌었다.
@세검정은 종로구 신영동의 홍제천변에 있는 정자다.
.평창동 49번지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북한산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백악산의 북사면에서 흐르는 물과 합류하여
서대문구 홍제동, 홍은동, 연희동, 가좌동을 굽어 돌아
마포구 성산동과 망원동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가는 11.95㎞ 하천이다
.하천변에 중국의 사신, 관리가 묵어가던 국영여관 홍제원 “홍제원천”이다
모래가 많이 쌓인곳은 “사천(沙川)~모래내”으로 불렀다.
@홍제천의 상류에는 평소 유량이 많고 풍광이 좋아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는데 공간이 필요하여 세검정을 지은 것이다
.북한산과 백악산을 흐르는 홍제천 “예쁜 꽃이 빨리 꺾인다”는 말을
실감하듯 신영동 일대의 홍제천변은 그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역사의 소용돌이에 자주 휘말렸다.
.주변에 사찰이 많은 신성한 땅으로 여겨왔우며
.종이 생산기관 조지서(造紙署)는 조광조의 첫 벼슬이 조지서 사지였고,
남명(조식)에게 내린 벼슬도 조지서 사지였을만큼 조지서는 중요한 국가기관이었다.
.총융청(국가 방위기관) 자리에 연산군은 탕춘대를 세우고 질탕한 유흥장소로 바꿔버린 것이다.
.1506년(연산12년),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
“왕이 장의문 밖 조지서(造紙署) 터에 이궁을 지으려다가
먼저 탕춘대(蕩春臺)를 세우고, 봉우리 밑에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황각(黃閣)을 세웠으며
언덕을 따라 청기와를 이은 장랑(長廊)을 지었다”
아주 호화로운 건물이다.
.탕춘대를 지어놓고 무엇을 했을까?
6개월후 연산군 일기 (載興淸, 如蕩春臺, 與內人淫于路傍)
“왕이 미행으로 景福宮에서 대비에게 잔치를 드리고 잔치가 파하자,
내구마(內廐馬) 1천여필을 들이게 하여 흥청(興淸)을 싣고,
탕춘대에 가서, 나인(內人)과 길가에서 간음하였다.”
@탕춘대(蕩春臺)는 수십 간의 집이었다(중종36년)
.전국의 미인을 잡아들여 원각사와 성균관에 기거하게 하고
갖은 횡음을 저질렀던 연산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폭군이었기에 뜻이 있는 신하들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터였다.
.결국엔 중종반정으로 이어져 왕권이 바뀌었다.
.세검정은 연산군이 쫓겨나는 결정적 역할을 한곳이다.
.탕춘대는 세검정에서 도로를 따라 육교를 건너면 세검정초등학교가
있는데 이곳은 원래 장의사(藏義寺)라는 절이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장의사 아래에 국가에서 필요한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造紙署),
위로는 국가 방위를 책임지는 총융청이 있었다.
제지(製紙)에는 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바위사이를 흐르는
홍제천은 제지공장이 들어서기에 적격이었고,
군인 주둔지로서의 필수 조건인 천혜의 환경과 식수를 갖추어
총융청이 자리하기에도 알맞은 장소였다.
.세검정 주변은 신성한 정신적 도량처이자,
국가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종이 생산지였고,
국방을 담당한 군인들이 주둔하는 곳이었다.
.연산군은 횡음의 장소로 바꿔버린 결과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자신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학교 운동장 한쪽에 장의사였음을
알게 하는 당간지주가 서있고 길가 육교 아래에는 조지서터,
학교 정문앞 총융사 터를 알리는 비석이 옛날 위상을 짐작케 한다.
@중종반정 117년 후, 세검정에는 또 한번 역사의 회오리가 일었다.
.光海君의 중립외교에 불만을 품은 西人 세력들이 反正을 일으킨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를 숭상하는 것을 최고의 의리로 여겼다.
그래서 대북파가 청나라와 친교를 명분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했다
.西人들은 명분때문에 光海君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인조를 세웠다.
세검정은 반정에 가담한 장수들이 의기를 모아 결의한 장소였다.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반정(反正)을 모의하고, 칼을 씻어
죽음을 담보로 하는 결의를 다진후, 홍지원에서 결집하여
이괄을 대장으로 세우고 창의문으로 진입하여 반정에 성공했다.
@창의문을 폐쇄하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자신이 군주를 배반한 것처럼
자기도 배신을 당할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창의문을 봉쇄해버렸다.
.심지어 아들까지도 믿지 못하여 8년간을 청나라에서 볼모로 잡혀
고생한 소현세자와 며느리, 손자까지 죽여 없앴다.
.자식을 죽이는 악습은 영조가 이어받은 영조는 창의문을 현창했다.
.1740년, 훈련대장(구성임)이 건의를 하자, 영조는 즉각 개수하게 하였다
“창의문은 인조반정때 의군이 경유하여 들어 왔던 곳이니 마땅히 개수하여 표시해야 한다”
.1743년(영조19년), 3년뒤에 친히 찾아갔느데, 詩를 쓰고 공신들의 명단을 쓴 懸板을 내리기도 했다.
“임금이 북교(北郊)에서 기우제를 행하고, 창의문루에 역림(歷臨)하여 옛일을 추상하여 시를 짓고,
이를 새겨 걸도록 명하고, 정사공신(靖社功臣)의 성명 또한 판자에 열서(烈書)하도록 명하였다.”
@지금도 창의문에 걸려있는 현판은 반정 공신들의 명단이다.
.반정(反正)이란? 정권을 뒤집는다는 뜻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권을 의미하는 정(政)을 쓰지 않고 바를 정(正)을 쓴다.
.연산군에 대한 반정은 그렇다 하더라도 광해군에 대한 반정이
과연 대의였는지의 논의는 아직도 분분하다.
.1744년, 이괄의 난은 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어 혼란을 겪게되며,
.1623년, 병자호란 때문이다.
.치욕적인 민족 수난으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로서 항복한것은 잘못된 반정의 결과라고 보는것이다.
.즉 인조의 반정이 세자와 대군을 볼모로 잡혀가고 많은 아녀자까지
포로로 끌려가는 수난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정(正)의 반정이 아닌 정(政)의 잘못된 반정이었다는 시각이다.
.그런 논리로 보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의 대상이라는 법리를
적용한다면 인조반정에 가담한 서인들은 삭탈관직 당해야 한다.
만일 연산군이 다시 집정한다면 부관참시 했을지도 모른다.
@세검정은 1941년에 불탔다.
.주변 종이공장의 화재가 원인이었다.
.1977년, 복원하였다
서울시는 설계도가 없어 겸재(정선)의 그림을 보고 재건했다.
겸재(정선)의 그림에는 홍제천을 마주한 세검정을 감싸고
산쪽으로 일각문과 담장이 있으며,
건물의 지붕 중앙에는 절병통이 있어 아담하고 보기에도 좋다.
.현재 세검정 건물 하나만 세워 놓았다.
세검정 아래 너럭바위는 차일암이다.
이곳에서 사초(史草)를 씻는 세초(洗草) 작업을 했는데
이 때 “차양을 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하여 차일암이라 한다.
.사초지의 먹물 글씨를 물로 씻어내고 종이를 말려 재사용하게 하는 물자절약의 현장이기도 하다.
@세검정 주변의 문화재
.세검정 초등학교의 당간지주와 조지서터, 총융청터, 탕춘대터, 홍지문,
이광수 별장, 보도각 보살,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 계곡), 서울성곽
스카이웨이(북악산길, 인왕산길),
@석파정(석파랑)
.흥선대원군 이하응(남연군묘, 예산)의 치욕
김좌근(헌종, 좌의정)기생에게 큰절을 올리다
.소운암(조정만, 숙종 영의정)
.삼계동(3계동정자, 김흥근, 철종 영의정): 고종을 초청후 빼앗아...
@彰義門(영조친필): 紫霞門, 北小門
.1623년 인조반정(능양군): 광해군(경운궁~강화도~제주도 유배)
.이귀, 이괄, 김류, 최명길, 심기원, 김자점, 이흥립...
.紫霞門의 鳳凰(닭) 석조물: 천적(지네)을 잡아 먹는다
.丙子胡亂(1936년 南漢山城)
김류, 최명길, 이성구, 김자점, 이시백, 김상헌, 동계 정온(자해)...
강화도 순절: 김상용(김상헌의 형), 김익겸(김만중의 부친)
@안평대군: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보다.....안견(몽유도원도)
(29세, 문사철+시서화: 쌍삼절)~담담정~제천정(월파정)
무계정사 터(興龍之地, 계유정란).....역모의 땅으로 변하다
@세검정(숙종, 북한산성 축성공사시, 군인 휴양소)
.세검정(이인화 소설 “영원한 제국”)
.홍제원: 체재공의 詩碑(홍제천: 환향녀)
모래내~난지도(연암 박지원 일기)~창의문(삼성병원)~영은문(영조문)~모화관~경기감영(기독병원)
.질마재(태기산: 면온고개, 진한 태기왕의 순절)
~고창 선운사, 괴산 낙영산, 무악재.....백상빌딩 막걸리집
.옥천암(이성계 기도)
.백석동천(백악산에서 발원): 백사 이항복, 병조판서(3회, 선조), 필운대(배화여고 터)
.청계동천(자하문 청운동 발원)
.현진건의 빈터, 운수좋은 날(닭을 키워 손님을 대접한다)
.윤동주 언덕(청운공원)
@하림각, 손만두집
.만두의 유래(마제은~말굽은): 돈, 복(명~청)
.최북(칠칠이): 風雪夜歸人. 비룡폭포에서 자살소동(금강산)
.수작(술잔을 권함)~참작(술잔의 양을 조절)
로즈베리 브랜디(물레방아간 정사를 상상, 과부는 절대금물)
.연탄길(화가의 딸 아기곰, 율무차 창수)
.신숙주(나주: 녹두나물~숙주나물), 구치관(수양대군의 호칭)
.녹두장군(전봉준)~변신의 귀재(손숙통 6명황제: 진시황제~항우~유방)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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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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