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6.임영복 지도위원 모친상 조문(아카데미LC), 강서구 이대병원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당 이회영(경주이씨)
노불레스 오불리주 우당 이회영(경주이씨)
@왜 三韓甲族의 으뜸인가?
.재상(정승)을 10명 배출한 노론 명문가로써 3만석의 富者였으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구한말에 전재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만주에 세우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조선의 京班(서울에 거주하는 양반)~鄕班(시골에 거주하는 양반)을
통털어 최고의 명문가문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당 이회영(1867~1932)의 가문
.백사 이항복(선조) 후손이 무려 10명의 재상을 배출한 가문이다
영의정: 9명(증영의정 4명 포함), 좌의정: 1명
.성재 이시영: 부통령(이승만정부, 우당 이회영의 동생), 영의정급
정확히 11명으로 봐야 옳을것이다
.경주이씨 백사공파에 유일무일한 “相臣錄(상신록)” 책자가 있다
상신록은 재상 10명 이상을 배출해야 책자를 만들 수 있으며, 재상들의 행장을 모은책이다
.재상이란 직책은 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능력없이 인맥으로 할수없다
학식과 인품, 능력을 검증받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10명의 재상들 “재상의 집안에 걸맞게 처신해야 한다”
(백사 이항복~구천 이세필~양와 이세구~아곡 이태좌~입향 이종악
~운곡 이광좌~오천 이종성~청헌 이경일~동천 이계조~귤산 이유원)
@부친 이유승(고종, 이조판서, 백사 이항복의 10대손)
.6남2녀(아들: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집터: 명동 명례방 저동(YMCA건물과 뒤편 주차장)
명동성당 정면 우측에 150년수령 은행나무는 부친이 심었다고 한다
.1905년,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가장 호방했던 이회영은 이동녕, 이상설과 함께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당시 외부교섭부장(동생; 성재 이시영)은 즉각 사직하여
三韓甲族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을 준비하는
무력 항쟁기지 설립을 염두하여 형제를 설득하였다
@만주에 전초기지 설립과 비밀조직을 결성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만주(용정)를 방문하였다
.서전의숙 학교를 설립하고 귀국하였다(현지 조선족의 학교)
.1907년, 신민회(비밀조직)를 결성하였다
상동감리교회 지하실에서 모였으며(양기탁, 전덕기 목사, 이동녕)
집안 노비들을 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전격 해방시킨다
이후, 노비가 아닌 일꾼으로써 봉록을 지불한 것이다
@헤이그 밀사파견을 주도
.대궐 내시(안호영)와 내통하여 고종황제와 교감을 유지하였다
.헤이그 밀사 신임장을 몰래 받아냈다(국제만국 평화회의)
.이회영은 상동감리교회 지하에서 이준 열사에게 전달하면서
간도(서전의숙) 이상설에게 전달케 하였으며,
통역관 이위종과 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하여 네덜란드 헤이그로 잠입한 것이다
*효창공원 四儀士(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백범 김구
@1920년, 만주로 망명(가족:60명. 마차:12대. 혹한의 엄동설한)
.6형제의 재산정리로 40만냥을 확보하였다(현시세, 600억원)
서울역 역사 건축비가 180만냥 투입되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가문의 색깔은 소론으로 노론과 남인의 중간수준으로 보인다
.조상들의 위패(位土)와 제사도구를 땅에 묻었다
“나라가 망했는데 제사를 지내서 뭐하겠느냐?”
.집(명동YMCA건물)은 23세 연하, 육당 최남선(1890~1957)에게
헐값으로 넘기면서 가문의 古書등을 모두 인계하였다
.자금의 대부분은 귤산 이유원의 재산을 정리하여 조달을 하였다
.두만강 도섭시 뱃사공에게 품삸을 2배(20원)을 지불하면서 당부했다
“돈없는 독립운동가를 만나거든, 무료 승선을 해주시오”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실향민의 터전, 독립운동의 전진기지)에 정착한다
*은양보(삼원보 인근)에 耕學社(경학사)를 설립하였다
3원칙: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하고(耕), 공부하고(學), 무장한다(武)
만주거주 민족의 교민 자치기관 겸 항일 독립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귤산 이유원의 적극적인 자금조달
.이유원(우당의 방계 숙부)은 고종의 영의정을 지낸바 있으며,
1882년, 강제 제물포조약 대표로 참석(일본: 하나부사 요시모토)
과거급제(헌종7), 의주 부윤, 함경도 관찰사, 명상(철종~명성황후)..
귤산은 뛰어난 학문과 재력가(토지, 재산)로 대원군에게 미움받아
세도정치 기간에는 수원 유수로 좌천된 바 있다
한양~양주길(80리)에 귤산 본인의 땅을 밟고 올수있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높은 식견으로 “大典會通” 법전 편찬사업을 추진하였다
.민승호(민비의 오빠)와 함께 반대원군파로 활약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귤산의 외아들은 천연두로 일찍 죽고난뒤,
유승공의 아들이며 이회영의 친형(이석영)에게 유산을 상속하였다
@신흥무관학교(1912년 설립~1930년 폐교시까지 독립군 3500명 양성)
.학교(만주 삼원보)는 천연 요새지역이다
.校主(둘째 이석영), 校長(이상룡, 안동출신),
敎授(이동녕, 윤기섭, 이관직, 여준...)
.학비, 숙식비등 일체 무료로써 우당 이회영의 재산으로 운영하였다
.1회 졸업: 변영태, 김훈, 김도태, 이범석, 오광선, 이규학(우당의 子)...
이규학의 子(이종찬 국정원장)
.김산도(아리랑 저자), 김좌진(청산리 전투), 홍범도(봉오동 전투)...
@고종황제의 망명 계획이 무산되다
.우당 이회영의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 망명계획을 기획하였다
.이교영(고종의 시종), 조정구(대원군의 사위), 조남승(조정구의 子)을
통하여 고종에게 의사전달이 되어 승낙을 받았다
.민영달이 마련한 자금이 조정구를 통하여 이회영에게 전달되어
우당은 북경에 고종의 집무실을 마련하고, 조정구가 관리토록
진행하던중에 고종이 승하하였다(1919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황제에서 물러났으며, 망명 미수사건으로 고종이 독살을 당한것이다
@혼맥으로 공종황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다
.이회영은 조대비의 딸을 며느리로 맞은 혼맥으로 고종과 밀접하였다
.대원군은 조대비를 견제하느라 며느리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찜찜했던 대원군은 조대비 집안의 사위(조정구)를 맞게된다
대원군의 유일한 딸의 남편이 노론의 조정구 대감이다
조정구의 아들(조남승, 조남익: 양주목사), 딸(조계진)을 두었다
고종황제 행렬가마 앞을 지나갈 정도로 조남익은 당시 대단했다
.우당 이회영은 조남승을 활용하여 고종과 교감을 통하였다
결국, 조계진(조정구의 딸)과 아들(이규학)과 혼인으로
소론출신과 노론출신의 혼맥이 형성 된것이다
조계진은 창신동에서 재봉틀 삸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는등 험난한 고생길로 접어든 것이다
@우당의 최후
.독립자금이 바닦난 후기에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린다
.석파란을 그려 중국인에게 팔아 독립운동가의 기개를 유지하였고
.퉁소(대금)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우당의 사상의 종착역은 아나키스트(독립운동 내부를 혹독하게 비판)
흥사단의 務實力行을 비판하였다
흥사단의 잘못으로 독립운동가의 이탈, 투항자가 속출했던 것이다
.훗날,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순직)하여 인생을 마감한다
@성재 이시영은 행동파, 이상주의자(논리적, 현실주의적 성향)
.17세, 式年鑑試(식년감시)에 급제하여 정치입문을 한다
.19세, 형조좌랑
.25세, 사헌부, 사간원을 거쳐 법관으로 급성장하지만,
.1905년, 외무부 교섭국장(실무자)으로 을사조약을 반대하였다
당시, 외교부 대신 박제순과 이완용이 을사조약을 추진하던 시기로써
을사조약을 맺는 마지막 어전회의장은 일본군의 포위로 접근조차
어렵워 사직하였으나, 고종은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최초 학교가 평안도에서 출발한 것도 성재 이시영의 치적인 셈이다
.훗날, 형제들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하고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1945년(해방), 망명당시 60여명의 형제중에서 혼자 살아온것이다
.부통령으로 등용되어 신흥학교(현, 경희대학교)를 설립하여
신흥무관학교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월남 이상재의 충고를 기억해야 할것이다
“해방되면 우당 집안의 재산은 국가에서 되돌려줘야 한다”
@우당기념관(종로 신교동, 농아학교앞)
.1984년, 우당장학회 설립한 이유는 우당지론 때문이다
“독립을 위해서는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
.1600여개 장학 재단중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가 후손을 돕고있다
학생 1,299명에게 3억1000만원을 지급하였다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조흥식
0204mpcho@naver.com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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