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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갑총재(2020-2021)

2021-0216.총장단회(6차), 354-C지구 방문

by 조흥식 2024. 1. 22.

2021-0216.총장단회(6), 354-C지구 방문

백사 이항복(경주이씨, 백사실계곡)

 

 

 

 

백사 이항복(경주이씨, 백사실계곡)

@백사 이항복은 젊었을때부터 촉명하고 당당했다

.영의정(권철)의 하인들이 담 너머 뻣어간 감나무 줄기의 감을 따먹었다

.즉시 달려가서 항의하였다(창호지에 손가락을 넣고서 질문은 했다)

(이 손가락은 누구겁니까?...감나무는 누가 주인이냐?)

.영의정은 사과하면서 큰아들(권율)에게 사위로 맞을것을 권하였다

.과거 급제(선조13)로 두각을 드러냈다

 

@弼雲臺(필운대)는 백사 이항복의 집터를 말한다(종로구 필운동)

.경주이씨 백사공파 중시조(백사 이항복), 弼雲(아호)이 생긴것이다

.필운대는 장인(권율 장군)한테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현재 고택은 없고, 배화여고 교정의 바위에 필운대암석체가 있다

.이항복은 아침마다 주변을 산책하면서 한양(장안)을 내려 봤을것이다

.겸재 정선의 작품(필운대, 간송미술관 소장)을 그릴 정도라면

아마 주변 경관이 빼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항복(병조판서)은 장인(도원수 권율)에게 삼복더위에 권고했다

.장인은 사위말을 듣고 간편복(베잠방이+융복)으로 어전회의에 참석,

이항복은 정장차림으로 선조에게 간청한 것이다

무더우니, 관복을 벗고 조회를 간청했다선조는 허락하였다

.이때, 권율은 옷을 벗지 못하고 어쩔줄을 모르고 있었다

.선조의 강요로 옷을 벗었는데, 너무나 초라한 내의를 입었던 것이다

.병조판서(백사 이항복)는 대변하였다

도원수(권율)는 가난하여, 평소 짧은옷만 입는다

.임금은 권율의 검소함에 감탄하여 비단과 옷을 하사하게 된다

 

@선조(25, 壬辰倭亂)의 결정적인 신뢰를 받게 된다

.도승지로써 비를 맞으며 심야 피난길을 떠나는 선조의 어가를 끌었다

.깜깜한 밤중에 임진강 나루에 도착한 이항복은 화석정을 불태워

도강하여 동파나루에 도착한 것이다

 

@임진강변 花石亭은 이명신(栗谷5대조)의 정자였다

.栗谷이 어릴때 하인들에게 화석정의 기둥에다 기름칠을 하게했다

훗날 소용 닿는일이 있을것이다예언을 했던것이다

.덕분에 의주로 피난하던 선조는 밤중에 임진강을 도하할수 있었다

.신하들이 花石亭에 불을 놓아 불빛으로 천신만고 끝에 渡河했다

.80년후 儒林들이 복원(현종)하였으나, 6.25화재이후 1966년 재건하였다

 

@임진강을 도하, 장단면에 도착후 피난길을 결정하지 못하여 방황하였다

.대신들은 태조(이성계)의 고향(동북방, 함경도)방향을 건의했지만,

.이항복은 밤새도록 서북방(평안도)으로 가야되는 이유를 진언했다

조선은 소국, 유일한 계책(명나라 파병지원)으로 권토중래를 해야...”

.결국, 왕자들은 동북방(함경도)으로 피난가던중,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이항복은 의주에 도착한 선조의 압록강 도하를 적극 만류하였다

임금이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아야 단결하여

왜군에 맞서 奮鬪할 것이다. 영호남(3)에 특사를 파견하여,

임금이 요동(만주지역)으로 가지않고 끝까지 남아 싸운다라고 칙령을 내리게 하였다

.소문이 전국에 퍼져,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모집되어 게릴라전으로

장기전으로 유도하고, 명나라 파병요청 외교에 돌입하게 된다

 

@명나라 黃應賜(황응사, 특사)를 보냈으나, 군사외교가 쉽지 않았다

.이항복은 옛문서를 꺼내 보여준다(왜군이 조선에 보내온 외교문서)

일본은 조선과 함께 명나라를 쳐들어가자일본의 동맹 제안서였다

.임지왜란 초기에 대마도주(소오 요시토시)와 승려(겐소)를 파견하여

.조선에 同盟체결 假道入明의 요구하였으나(나라 攻擊路를 빌려달라)

東來부사(송상현)의 거절하여(戰死易假道難) 순절하였다

.명나라(이여송)를 설득하여 지원병 파병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율곡은 사직후,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을 찾아간다

서럽지 않은 눈물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약이니라...”

.언제? 어떻게 쓰일거라는 이야기는 전혀 귀뜸을 안해줬다

.먼훗날, 이여송 장군() 원군을 이끌고 왔을때 매우 거만을 떨었다

.명나라 원군을 청하려고 파견되어 이항복은 도움을 청할 때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을때 생각난 것이다

 

.그때 문득, 율곡의 충고를 기억하고 고춧가루 싼 주머니로 눈을 비벼서

슬픈듯 눈물을 흘리면서, 이여송 장군을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이여송)은 전투를 거절하면서

왜군과 휴전및 강화를 주문해온 것을 이항복이 설득에 나섰다

.시간이 지체되면 한양 탈환이 어렵고, 피해가 속출할것으로 판단했었다

.이에 명나라 군대가 적극 가담하여 치열한 전투가 시적된 것이다

 

@이여송 장군()과 기막힌 외교담판이 매우 인상적이다

.최초, 이여송()은 압록강을 도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인접국의 전쟁에 휘말려 피를 흘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여송의 변명은 독특했다

조선에 인물이 있어야 나도 참여한다. 승산이 있어야 전쟁에 참여한다

.이에 외교사절단을 재편성하였다

백사 이항복, 서애 류성룡, 차천로(1556~1615), 한석봉(1543~1605)

.당대 최고 詩人(차천로)은 평소 습관대로 낮술에 취하여 밤이 깊어

흥이 오르자 를 읊기 시작하였다

 

.조선 명필(한석봉)은 차천로의 를 일필휘지로 받아 적었다

.한석봉의 서예글씨를 이항복은 이여송()에게 전달하며 설득하였다

백사는 左傳을 능통했기에 돌발상황 적임자로 선발되었던 것이다

*춘추좌전: 춘추시대 외교비화를 다룬책(임시변통, 외교적 수사내용)

.이항복이 겸상식사를 하던 이여송()이 트집을 잡았다

소상반죽 저분이 아니면, 밥을 먹지 않겠다...”

 

*소상반죽이란? 눈물 자국같은 무늬가 있는 대나무 젓가락을 말한다

(고대중국 요임금은 지방을 시찰하던중 소상강에 빠져 죽었다

요임금의 딸(공주2)은 후임 순임금의 황후가 되었다.

(2)이 소상강에서 흘린 눈물이 대나무 줄기에 뿌려졌는데,

그 눈물자국이 배여있는 어린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칭한다)

.최고의 명품(소상강 소상반죽)을 서애 류성룡이 가슴에서 꺼내보였다

류겸암(류성룡의 형님, 풍산류씨 겸암파 중시조)은 예지력이 있는

異人(이인)이었는데, 류겸암은 평소 천장에다 소상반죽 젓가락을

매달아 놓았는데, 동생(류성룡)이 명나라 접빈사로 떠날 때 줬다

꼭 필요할 때 긴요하게 사용하거라

.이여송()은 깜짝 놀랄수밖에 없었다

아하! 조선에도 인재가 있구나! 전쟁을 해도 승산이 있겠구나...”

명나라 군대가 적극적으로 임진왜란에 가담하게 된것이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시절 병조판서를 5번 지냈다고 알고있다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하여 명나라 군대파견을 성공시킨 유공으로

호성일등공신이 되어 오성부원군(鰲城)”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백사(아호)보다 오성대감으로 많이 불렀던 것이다

.이항복은 광해군시대에 인목대비 폐모반대로 북청으로 귀향을 떠난다

 

@수결(手決)은 오늘날 서명~결재~확인절차의 sign(싸인)이다

.수결에 일심(一心)이 많은것은 한마음으로 하늘에 충성을 맹세하고

어떠한 사심도 없다는 뜻으로, 일본과 중국에는 一心決이 없었다

(一心 또는 )자로 대부분 표기하여 위조사건도 많았다

.부패관리의 부당이득, 양반들의 토지매매 할때 인장대신 활용했다

.노비는 글씨를 몰라, 왼손으로 지장을 찍어 길이를 대조했다

수촌(手寸)이라 했으며, 좌측손을 사용해 左寸으로 불렀다

.중세 서양에서 싸인(sign)제도가 유행하였으나,

조선말기는 도장(인감)을 권위적으로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활용중이다

 

@백사 이항복(선조)은 유능하고 재치가 넘치고 효율성을 중요시했다

.백사가 결제한 문서에 문제가 생겨, 책임소재를 조사중이었다

.백사가 결백을 주장하자, 수결을 대조 하였는데...가짜로 판명되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수결(자형) 양쪽에 흠집을 표시를 해둔것이다

.누명을 벗은 이후로 즉시 수결표시를 바꾼것이다

*당신의 sign(싸인), 서명이 궁금합니다

 

 

 

 

白沙室 계곡(백사실)

@백사실은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별서(別墅)이다

.이항복의 호는 필운(弼雲)과 백사(白沙)이다

필운()은 필운대(弼雲臺)와 관련이 깊으며,

백사는 백사실에서 유래되었다(도심속의 무릉도원을 칭한다)

.필운대는 인왕산자락 전망 좋은곳에 자리한 큰 암벽(이항복의 집터)으로

원래 권율의 집이었는데 사위 이항복에게 물려주었다.

필운대 일대는 중인문화가 꽃을 피운 인왕산자락의 중심공간이다

.중인들이 시문을 창작하고 교유했던 모습은 필운대풍월이라는 말로

후대에도 널리 회자되었으며,

.백사실은 필운대에서 조금 떨어진 북악산자락에 위치한 비경이었다.

이항복은 16111월 꿈속에서 이곳을 찾았다.

계곡과 흰모래가 매우 인상깊어, 백사(白沙)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

 

@이항복의 백사집그 날의 꿈 이야기

.신축년 정월 11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마치 공사(公事)로 인하여 비를 맞으면서 어디를 가는 듯하였다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2명이고, 도보로 따르는 자가 4~5인쯤 되었다

.어느 한 지경을 찾아 들어가니, 산천(山川)이 기이하고 탁 트였으며,

길옆 한 언덕을 쳐다보니, 그곳에 새 정자가 높직하게 서 있었는데,

지나는 길이라 올라가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곧장 막다른 협곡(峽谷)에 다다르니,

협곡안에는 마치 사찰과 같은 큰집이 있고

그 곁에는 민가(民家)들이 죽 열지어 있었다

그 큰집에 들어가서는 마치 무슨일을 한듯하나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하겠다

.여기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중, 다시 지나갔던 언덕에 이르니

그 언덕 밑은 편평하게 탁 트인 광장(廣場)이 되었고

그 위에는 백사(白沙)가 죽 펼쳐져 있는데, 그 주위가 수천보쯤 되어 보였다

.또 백위(百圍)쯤 되는 큰 나무 5그루가 광장 가운데 늘어서 있는데,

일산(日傘)과 같은 소나무가지가 은은하게 빛을 가렸다

 

@비로소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서 비로소 새 정자에 올라가 보니,

.정결하고 산뜻하여 자못 별천지와 같았다.

그 안에는 서실(書室)이 있는데, 가로로 난 복도(複道)에는

모두 새로 백악(白堊)을 발랐고 아직 단청(丹靑)은 입히지 않았다

그 밖의 낭무(廊廡) 여러칸은 아직 공사(工事)를 끝내지 못하여

다만 기둥을 세우고 기와만 이었을 뿐이었다.

.형세를 두루 살펴보니, 사방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한가운데에

큰 들판이 펼쳐 있고, 세 개의 석봉(石峯)이 들 가운데 우뚝 일어나서

그 형세는 마치 나계(螺髻)와 같았다.

이것이 구불구불 남쪽으로 내려가서 중간에 꺾어졌다가

다시 뾰족하게 일어나서 언덕이 되었는데,

.언덕의 높이는 겨우 두어길쯤 되었고 정자는 바로 그 언덕위에 있었다

이 언덕의 오른쪽은 넓고 편평한 비옥한 들판에 수전(水田)

크게 펼쳐 있어 향기로운 벼에 이삭이 패서 한창 바람에 흔들려

춤을 추는 푸른 벼가 백경(百頃)으로 헤아릴 만하였다.

.정북향에 위치한 여러산들은 한군데에 빽빽히 모여 뛰어오를 듯

허공에 솟아 있으며, 동학(洞壑)은 깊고 험하여 은은하게 산천의 무성한 기운이 있었다.

 

@백사실의 연못과 정자가 있었던 흔적

.정자의 앞에는 멀리 산봉우리가 열지어 동천(洞天)을 둘로 만들었다

.두 동천에서 나오는 물은 마치 흰 규룡(虯龍)이 구불구불

굼틀거리며 가는 것과 같은데, 한가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또 한가닥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두가닥이 이 정자 밑에서

서로 합하여 돌아나가 한 물줄기가 되었다

.이 물은 넓이가 수백보쯤 되고 깊이는 사람의 어깨에 차는데,

깨끗한 모래가 밑바닥에 쫙 깔려 있어 맑기가 마치

능화경(菱花鏡)과도 같아서 오가는 물고기들이 마치 공중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시냇가에는 흰돌이 넓고 편평하게 깔려있어 한걸음 한걸음마다

낚시터를 이루었고, ()자의 형세로 흐르는 시냇물은

정자의 三面을 빙둘러안고 돌아서 남쪽의 먼들판으로 내려갔다.

 

@이항복은 정자에 평생에 이러한 경계는 본 적이 없었다.”

.꿈속의 선경을 본 기억과 이 별서가 윤두수의 것임을 전하고 있다.

.평생 구경한것 가운데 일찍이 이러한 경계(境界)는 본적이 없었다.

.정자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오음(梧陰)의 별서(別墅)라고 하였다.

.이윽고 윤수찬(尹修撰)이 나와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상공(相公)이 안에 계신다.”고 하였다.

.나는 이때 문밖에서 머뭇거리다가 우연히

도원의 골 안에는 일천 이랑이 펼쳐 있고, 녹야의 정원에는 여덟 용이 깃들었도다

(桃源洞裏開千畝 綠野庭中有八龍)라는 시() 한 구절을 얻었다

.시를 미처 더 짓지 못한채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꿈을 깨었다.

.문창은 이미 훤해졌는데, 그 시원하던 기분은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고

모발(毛髮)에는 서늘한 풍로(風露)의 기가 있었다.

 

@마침내 일어나서 그 경치를 마음속으로 더듬어 찾아서 화공(畵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이 시를 붙여 쓰려다가 갑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

도원(桃源)의 뛰어난 경치에다 천묘(千畝)의 부()를 얻고

녹야(綠野)의 한적함을 누리며 팔룡(八龍)의 복을 소유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지극한 소원이다. 다행히 내가 이런 기이한 꿈을 꾸었으니

왜 굳이 오음(梧陰)에게 양여(讓與)하고 스스로 곁에서 구경이나 하는

냉객(冷客)이 된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푸줏간을 지나면서

고기 씹는 시늉이나 내는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니 비밀에 붙여 남에게 말하지 않고 인하여

스스로 취하는 것이 낫겠다정자를 필운별서(弼雲別墅)”라 고치고

.절대로 윤씨(尹氏) 집 사람들에게 천기(天機)를 누설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기록하다

이달 27일밤 꿈에 재차 이 별서에서 오음과 함께 평소와 같이

즐겁게 희학질하며 노닐었는데, 산천의 뛰어난 경치는 지난번의 꿈과

같았으나, 다만 정사(亭舍)의 체제(體制)가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하늘이 오음에게 내려준 곳을 내가 사사로이 훔칠 수 없으므로,

인하여 오음별서(梧陰別墅)”로 복호(復號)시켰다

.오음의 성명은 윤두수(尹斗壽)이다.

 

@이항복은 자신이 꿈속에서 본 별서가 윤두수의 것임을 알고도,

.그것이 너무나 탐이 나 필운별서로 그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하늘이 윤두수에게 내려준 곳을 자신이 훔칠수 없다하여

오음별서로 고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곳이 백사실로 전해지는 것을 보면

.결국 이곳 최후의 소유자는 이항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인왕산 자락의 필운대(弼雲臺)에 거주하면서,

.백사실을 별서로 삼은 이항복의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이다.

.이항복은 서인(西人)으로 활약했지만 당색이 뚜렷한 인물은 아니었다

.실무 관료로 자질을 발휘하고, 임진왜란에 의주로 피난을 가는

선조를 호종(扈從)하여 전란후에 호성공신(扈聖功臣)1등에 책봉된다

.그러나 극심한 정쟁의 소용돌이는 이항복에게도 예외가 되지는 못했다

.광해군 즉위후에 폐모론(廢母論)이 전개되자,

.이항복은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결국 유배지 북청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배지에서도 이항복은 그토록 풍취가 좋았던 인왕산의 필운대와

북악산의 백사실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백사실은 북악산 뒷자락에 조성된 동천(洞天: 경치 좋은 곳)으로,

.비교적 높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백사실 입구의 큰 바위에 새겨진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자는

이곳이 별세계임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백사실의 중심부에는 정자를 지은 터와 연못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선비의 별장으로 매우 적합한 지역임을 알수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배경이 되었던

.인왕산 자락의 무계동(武溪洞) 계곡과도 인접해 있어서,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곳의 절경이 형성되었음을 체험하게 한다.

.백사실은 명승 유적과 함께 자연 생태가 어우러진 지역으로서

.도롱뇽, 버들치, 가재 등이 서식하여 청정무구의 공간이다.

.도심 지척의 거리에 있는 선경(仙境)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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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