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3.청운산악회 도봉산
*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작사)
*병천유황오리(종로구청앞), 오비캐빈(종각역3번출구)
단장의 미아리 고개 이야기(반야월 작사)
*“미아리?” 하면 얼른 생각나는 노래 “斷腸의 미아리 고개”를 꼽을수 있다
어느 중년신사는 고도의 발전기의 산물로써 한때 환락가의 상징이었던
텍사스촌(홍등가)이 연상된다며 이미지 변신이 필요하다고 쓴 웃음을
짖는 기성 세대들의 삶의 애환과 설움을 토로했던 곳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匹夫든 猝富든 누구나 편한 기분으로 다녔겠지?
*관악구 봉천동은 얼핏 보기에 촌스럽고 빈곤층의 대명사처럼 비춰지는게
싫다면서 동네 이름을 靑龍洞(청룡동)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사실은 동네란? 마을 사람들이 한 우물을 사용하는 공동체 단위를
洞(동)이라는 마을 단위로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미아리동을 白湖洞(백호동)으로 불러야 한단 말인가?
*작사가 반야월은 한국동란에 남쪽으로 피난을 다녀왔을 때,
5살배기 어린딸이 굶어죽어 미아리 뒷동산에 뭍었다는 비보를 듣고
부인을 부둥켜 안고서 밤새 울었다고 증언한바 있던 고개이다
그날저녁 밤새도록 울면서 쓴 글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노랫말이다
離別(이별)의 고개, 눈물의 고개가 아닌 斷腸(단장)의 고개로 표현은
작사가 반야월의 찢어지는 아픈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다
*고대 중국의 전설같은 모성애 덕담에도 斷腸의 어원을 살필수 있다
강건너 어미 원숭이가 보이도록 어린 원숭이를 강 하구까지 유인했을 때
어미 원숭이가 지쳐 쓰러졌는데, 간장이 모두 녹았다는 어미의 애간장이
녹아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견디지 못했음은 당연한 사랑일 것이다
*미아리고개를 오르기전 돈암동 로타리는 한때 종점 로타리로 불렀는데.
20세기 초반에 운행하던 전차 종점이었기 때문이
돈암장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전 대통령)이 해방직후
귀국했을때 지인의 집을 제공받아 2년동안 기거했던 전통 한옥이다
백향목과 백두산 춘향목을 원자재로 사용하여 당시 최고의 목수였던
배희한 도편수가 3년간 건축한 돈암장을 건축한 유서깊은 목조 건물이다
이후, 배희한은 사육신 박팽년의 집터에 한국의집을 재건축하여 아직까지
전통한옥의 명소로써 진수를 뽐내고 있다
지금 돈암장은 대성그룹 김성배 회장과 부인 차정현 여사가 살고 있다
하여튼 미아리는 한국동란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겨진 동네이다
휴전이후 남북한의 葛藤(갈등)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것은
마치 칡과 등나무가 얽힌 듯 해법찿기가 쉽지가 않은게 현실이다
비련의 고개, 민족의 상처의 대명사인 미아리 고개정상에는 성곽같은
대문 모형이 서울 장안(종로)으로 들어오는 시민들을 반기고 있다
지금쯤 고개대문 현판에 “瑞氣集門(서기집문)”으로 부착하면 좋을까?
상서로운 氣運 들어오는 幸福이 가득한 대문으로 거듭나면 좋을텐데...
최근 추석명절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먼제 제의해왔던 북한은 특별한
이유없이 일방적으로 취소하여 신뢰없는 집단임을 또다시 보여줬던
참으로 염치없는 비상식적인 그들은 체면이나 기본적인 양심,
뻔뻔함을 분별할줄 모르면서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없는 소인배 집단이다
뻔뻔함을 모르는 동물은 人格이 없기 때문에 짐승이라 부르지 않는가?
알고보면, 힌 것은 검은색으로 바꾸기가 쉬워도
검은 것을 힌색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은게 사실이다
*노무현(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과 대화록 실종으로 난리 법석이다.
“e지원” 프로그램으로 입력을 했다는데 국민들은 “e지원”이 무슨 뜻인가?
志遠(지원)은 제갈량전에 나오는 고사로 안중근, 백범(김구)등 지식인
지도자들이 자주 인용했던 문구로 알려져 왔다
“큰 뜻을 품어라! 멀리 내다보라!...”
김형직(김일성의 父親)의 삶의 좌표이자 座右銘(좌우명)으로
금강산 仰止臺(앙지대)에 오르면 붉은 대형 암석문이 눈앞에 들어온다
하필하면 왜 志遠(지원)이란 용어를 택했을까? 문득 그런생각이 든다
*미아리 고개를 넘자마자 길음천이 흐른다
물소리가 옥구슬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워 “吉音(길음)”이라 했을 것이다
돈암시장 돼지머리고기, 국밥집은 60~70년대를 회상케 하는데 풍경은
비록 허름하지만 정겨운 식당이 즐비하다
오래된 극장과 뒷골목에는 순대국과 돼지머리 편육집이 많은 편이다
*돼지머리는 연산군 애첩 산홍과 상주군수 장순손의 희한한 사연도 있다
연산군의 질투로 장순손이 돼지를 닮은게 아니라, 돼지가 장순손을
닮았다며 억지를 부리면서 한양으로 압송하라고 했던 기록도 있다
그러나 돼지고기를 고사, 산신제, 굿당에 올리는 이유는 평범하다
財物과 多産의 상징이며, 윷놀이의 첫번째 “도”는 시작임을 의미한다
또한 神(하늘)과 人間의 중간 왕래자 역할을 해온 풍습에 따른것이다
우연하게 정릉부근 기슭마다 굿당이 많아 무속인들의 발길이 잦았는데
80년대 중반에 모두 분산되어 돈암동 부근으로 굿당을 옮겨진 처지이며,
아마 그 이후부터 미아리 고개 부근에 무속인들이 많이 터를 잡았다
굿당마다 돼지머리가 흔하게 제사용품으로 쓰여졌으며 북어와 실타레도
시장 가게마다 수북한 것도 인연이 각별하다
재액방지와 주술 관념적인 제사용품 북어는 우리 민족과 인연이 많다
*三角山에서 바라본 정동진(정동쪽 방향)은 현재의 정동진(강릉)이지만,
송악(개성)에서 바라본 정동진은 지금의 襄陽(양양)과 雪嶽(설악산)이다
襄陽(양양)이란?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마을”을 말하는데
양양을 품은 雪嶽은 백두대간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산이다
북쪽에는 해발 2000m 이상의 준령과 봉우리가 많지만 雪嶽처럼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岳”이 아닌 “嶽(큰산 악)”으로 표기한 것이다
설악은 금강산처럼 수려하진 못해도, 지리산같이 웅장하진 않지만
골고루 품은 큰 산임에는 틀림이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찿고있다
강릉 정동진과 설악 정동진 앞바다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어종이
명태이고, 그래서 東海(east)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보더라도 명태가 우리에게 얼마나 친숙한 물고기였던가?
*힌 실타레가 우리한테 주는 멧세지는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리도록
도와달라는 의미로 생각할수도 있지만, 좀더 깊숙이 들여다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사연이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도 등장한다
서양에서 실타래의 관습은 우리들의 생각과 약간 다르다
미노스왕은 바다의 神(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괴물아들을 낳았는데
아들 “미노타우로스”는 상반신은 “황소머리”, 하반신은 “사람”이었다
다이달로스를 시켜 거대한 미궁을 건축하고 미궁에 감금케 하였는데
*미궁이란?
構造가 매우 교묘하여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出入口를 찾을수 없어
탈출이 불가능 했던 미로였을 것으로 추상된다
괴물아들(미노타우로스)는 人肉을 즐겨먹기 때문에 아테나國에서 보내온
租貢(少年 7명, 少女 7명)을 먹이로 주었는데
테세우스(아테나이 王子)는 國家를 재앙으로부터 인간먹이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父王의 간원을 뿌리치고 스스로 租貢 供物을 自請하였다
*아리아드네(미노스 王의 딸)는 供物에 포함된 테세우스를 보자마자
짝사랑에 빠져 “실타래”와 “칼”을 몰래 건네주면서 미노타우노스를
죽이도록 알려줘 입구부터 실타래을 풀어 租貢백성들을 구하고
미궁을 빠져나올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실타레에 대하여 우리들은 생업이나 사업이 원만하고 순조롭게
잘 풀리기를 염원하는 것도 있지만, 어려운 난관이나 힘든 고비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지혜의 상징으로 서양인들은 믿고 있다
미아리 고개는 전쟁 未亡人의 울부짖는 절규가 연상된
어쩌면 共鳴(공명), 함께 울어야하는 恨스러운 고개인지도 모른다
눈물없이 볼수없는 신파극처럼 생각만해도 가슴이 뭉쿨하고 찡하다
오랜만에 오늘 미아리 고개를 찿아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막걸리 대포 한잔을 마시고 돼지 머릿고기 한접시를 안주삼아 주문하여
수작을 시작하니 어둠발이 내리기 시작한다
*술잔을 주고 받으면서 상대에게 권하는게 수작인데 취하지 않도록
술잔의 양을 헤아리며 알맞게 고려함이 참작인 것이다
우리가 생업에 열심히 살아오던 시절에 미아리고개를 넘었던 옛추억의
봉제공장의 재봉틀 소리와 여성 노동자(가칭 공순이)들의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아마, 당시 사람들은 종아리와 장단지에 털이 없어질 정도로
주경야독으로 꿈을 키워왔던 현장이기도 하다
*아마 그들은 많은 세월속에서 이미 중장년 세대가 되었지만 수고했던
脛無毛(경무모)의 씁쓸한 추억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고대중국 禹임금의 치수사업 때문에 혼인후 10년동안 고향집 대문 앞을
3번이나 지나갔지만 대문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전설적인 교훈이다
순임금은 우(禹)에게 명하여 홍수를 다스리게 했는데,
禹는 바로 요임금 때 처형된 곤(鯀)의 아들이었다.
우(禹)가 이 기간 동안 직접 답사한 곳은 몇 군데인지 헤아릴수도 없고,
그가 겪은 곤경은 또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장딴지에는 솜털이 없었고, 정강에는 털이 다 빠졌으며,
세찬 빗줄기에 머리를 감고 빠른 바람으로 머리를 빗었다”
(腓無月丈 脛無毛 休甚雨櫛疾風. 비무월장 경무모 휴심우즐질풍)
비록 12자 간단한 글이지만 오랜 세월 야외에서 홍수와 분투하는
禹의 모습을 아주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다시 줄여 즐풍목우(櫛風沐雨)라고 간추렸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미아리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 것은 한국동란 당시에
피눈물을 흘렸던 치욕의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후손들에게
반복하여 교육해야하는 기성세대들의 무거운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지금 미아리 고개 부근에는 목련나무의 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하얀목련에서 배워야할 지혜를 더듬어 봐야 한다
*近雪迎春(근설영춘)이란 무슨말인가?
“지금 창밖에 첫눈이 내리는데, 벌써부터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철두철미하게 미리미리 준비하고 대비한다는 깊은 의미의 문구이다
옛 어른들이 하얀목련을 측간(야외 재래식 변소) 주변에 심었던 이유는
3월 하순쯤이면 동지섣달에 얼었던 인분이 슬슬 녹기 시작하면서
집안에 구린내가 진동했을 것이다
목련꽃은 10월 하순경 잎이 지자마자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데
무려 6개월 동안 꽃망울을 키우면서 봄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왜 측간옆에 심었을까?
인분녹는 냄새가 나지 않을 정도로 목련꽃 香氣가 진했기 때문인데
물고기 비린내 같은 진한 향기를 일컬어 香鱗(향린)이라 불렀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청운산악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1208.청운산악회 2013년도 송년산행(도봉산) (0) | 2023.01.23 |
---|---|
2013-청운산악회 북한산(독바위) (0) | 2023.01.23 |
2013-0921.청운산악회 도봉산(추석 번개산행) (0) | 2023.01.19 |
2013-0908.청운산악회 도봉산 (0) | 2023.01.19 |
2013-0629.청운산악회 북한산 의상봉 (0) | 2023.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