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27.세종로라이온스클럽 북한산, 연극관람
*북한산 단풍구경(인수봉 숨은벽),
*연극구경(허생전, 강북구 삼각산 문화예술회관)
*클레오파트라(파라오) 이집트의 찬란한 역사
클레오파트라(파라오) 이집트의 찬란한 역사
@西洋을 대표하는 美人 클레오파트라7세 女王
.東洋의 대표 美人은 단연 楊貴妃(唐, 현종, 755년)로 통한다
.클레오파트라7세 女王은 暗殺되었을까? 독사(뱀)를 이용 自殺했을까?
.최고 權力家(카이사르~안토니우스)와 戰略적 사랑의 염문을 뿌려
權力의 화신으로 우뚝 일어선 傳說적인 여인이다
.히스토리 history~허스토리 herstory를 만든 神話적인 여성이다
.야망과 매력의 영원한 상징으로 기억되는 절세가인으로 기억된다
.옥타비아누스와 일부 비평가의 격하된 이미지로 평가하고 있는
“팜므 파탈 femme fatale(요부)”의 색채로 볼수도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살아있는 傳說, 神話의 반열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로써
왕국의 權力과 宗敎를 체화한 살아있는 女神으로 통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존재, 王家숭배가 傳統이었다
.그녀는 전통적인 王家숭배보다 自身에 대한 個人숭배를 강조하여
신비의 광채가 클수밖에 없었다
.로마의영웅을 사로잡은 “여성 공포증”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가치”를 위해 “친숙한 요부”의 이미지로
포장하여 평가절하로 역사에 기록하게 했다
.그러나, 이마가 좁고 턱이 뽀쭉하고 입술이 앏아 미인형은 아니었다
.지성인으로 마케도니아어, 그리스어, 민간 이집트어, 라틴어를 능통하고
아랍인, 히브리인, 메데스인과 통역없이 그들의 언어로 직접 대화를
구사할 정도의 격조높은 수준이었다
.독약의 종류와 효과를 깊이 연구하였고, 미용, 화장술에 조예가 깊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政治的 行步
.이집트 라지드 王家의 마지막 파라오로 기록된 인물이다
.라지드 왕조는 征服者(마케도니아)의 피를 이어온 王家출신이다
그리이스 피를 이어받아 그리스어, 그리스풍의 옷을 즐겨입었으며
민간 이집트어, 이집트의 宗敎와 傳統을 이해하여 어느 왕보다
이를 政治的으로 잘 活用한 것이다
대부분 라지드 王家사람들은 이집트어를 할줄 몰랐던 것이다
.bc323년, 알렉산드로스 大王이 死亡하였다
동료 장군출신(프톨레마이오스)이 이집트 統治權을 장악하였다
이집트 “파라오” 이름은 계속 프톨레마이오스로 이어 내려오는데,
공주들의 이름은 “클레오파트라”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先王(프톨레마이오스12세)이 죽은뒤, 동생(프톨레마이오스13세)와
공동으로 등극하여 이집트를 統治하였다(18세, 남동생:10세)
.王家의 近親婚 傳統은 이집트 信仰에서 오시리스 神과 이지스 神이
男妹(오누이)이지만, 夫婦로써 神의 계보에 속하는 存在들에게는
극히 자연스런 傳統이었다
.로마인들은 非倫理性(근친상간, 간통)을 비난하면서 간과한 이유는
男妹사이의 結婚은 종교적인 傳統으로 억지로 이해하였으며,
權力의 維持와 配分을 위한 政治的 考慮의 산물로 판단하였다
.이집트에는 여성왕족의 統治를 인정하는 유연성이 있는게 특징이다
.王子들과 동일한 고급수준의 敎育을 받은것이 큰 정치적 산물이 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와 전쟁에서 패배, 점령을 당한뒤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14세)와 結婚한후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남동생이 폐위시켜 추방해 버린다
@카이사르 시저와 운명적인 만남(bc48)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宮殿에 머물고있는 카이사르의 힘이 필요했다
.카이사르도 이집트의 政治的 安定을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와 和解가 긴요하여 2명을 소환하였으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군사들의 방해작전으로 가로막아
클레오파트라가 궁전으로 들어올수가 없었던 것이다
묘책으로 노예(아폴로도르)가 둘러맨 선물 보따리(양탄자)에 숨어
궁궐 경비병을 속이고 카이사르와 극적인 만남이 성사되어
戀人으로 아들을 낳아 女王으로 復歸한다
.스스로 카이사르의 진상품을 자청한것이다
.비너스의 女神처럼 아름다운 자태와 미모와 관능적 매력에
카이사르는 감동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게 도착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화난 표정으로
왕관을 궁전바닦에 내동댕이치고 분노와 두려움에 질겁하였던 것이다
@여왕으로 복귀한 마지막 파라오(클레오파트라7세
.카이사르 시저(로마,52세)는 이집트 정벌(군비지급 조건)으로
여왕(19세)을 위해 남동생을 축출하여 복수를 하지요
.4년후 로마를 방문하였을때 돌변사태가 발생한것이다
.최고의 後援者(카이사르 시저)가 피살되자 歸國하여 자녀을 낳는다
.로마 內戰의 정치적 혼란기에 카이사르파(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수)와
공화파(부루투스, 봄페이우스)의 중간입장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안토니우스와 만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카이사르파에 대한 忠誠心을
체크하려고 클레오파트라를 소환하였다
.안토니우스가 머물고 있는 소아시아 타르수스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다
.권태가 없도록 새로운 快樂을 개발, 산해진미, 악사, 무희를 동원하여
안토니우스의 즐길거리를 철저하게 준비한 執念과 熱情으로 가득찬
요부가 되어 새로운 權力으로 재탄생 한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勇氣와 대담성도 볼만하다
안토니우스는 사랑에 빠졌어도, 그녀가 마련한 음식은 먹지않았다
그녀의 毒藥에 대한 해박한 지식 때문이었다
.술잔에 꽃잎을 띄워 안토니우스에게 권하자, 마시려고 하는데
그녀가 빼앗아 하인에게 줬더니, 그잔을 마신 하인이 毒死하였다
“언제든지 죽일수 있다”고 겁을 준것이다
.과단성에 안토니우스가 다시한번 놀랐다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로마 화폐)를 투자하여 초청 만찬을
준비하겠다고 자랑을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설마 거금을 들여 식사 준비할까? 의심스러웠다
당시 로마정병 연봉이 900세스테르티우스 수준이었다
첫째코스 요리는 보통식사와 비슷했으나,
둘째코스 요리는 식초 한사발 뿐이었다
귀고리, 목거리를 풀어 식초 사발안에 넣자마자 녹아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식초사발을 단숨에 마셔버린 것이다
.안토니우스(40세)와 結婚(29세)하여 아들 2명을 낳는다(bc36)
.안토니우스는 로마에 귀국후에 옥타비누스 여동생과 結婚해 버린다
.그리이스 약티움 海戰 패배후 보물선(60척)과 이집트로 도주해 온다
@39세, 클레오파트라7세 女王의 파라오 時代를 마감한다
.안토니우스(40세)는 클레오파트라(39세)와 함께 最後를 맞는다
.카이사르의 피를 물려받은 카이사리온은 處刑되었고,
.안토니우스의 血肉은 그의 아내(옥타비아)에게 보내진다
.아들 3명이 모두 死亡하는 말년에 悲運을 겪으며
.그의 딸은 아프리카 王과 결혼하게 된다
.指導者를 잃어버린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해 버린다
@그림, 小說, 神話... 作品속의 클레오파트라
.강력한 미적, 관능적 매력, 매력보다는 마력으로 봐야한다
.비판적 시각의 두 얼굴: 퇴폐성과 음모의 그림자, 동방의 괴물,
노예에게 몸을 바치는 암컷, 요부, 창녀들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살로메, 밧세바...인류 역사상 最高의 요부로 통한다
*마법세계의 女王처럼 그려진 초상화의 머리에는 “티아라” 왕관을 쓰고
女王은 옥좌에 반나체로 기댄 요부의 관능미가 물씬 풍기며,
손에는 양귀비같은 꽃가지를 들고 있으며,
뒷배경에는 스핑크스와 피라미드가 있어 統治者의 威嚴을 보여주고,
먼곳을 응시하는 눈매는 남다른 至誠을 자랑하듯 반짝인다
오른쪽에서 새까만 뱀이 다가오는데, 그녀의 運命을 예고한 것이다
*作品(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에도 시도노스 江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안토니우스의 선박에 접근하여 유혹하는데,
클레오파트라의 갑판 옥좌에 비너스로 분장하고,
黃金과 寶石으로 화려하게 향기롭운 모습으로 치장하였다
안토니우스가 궁금하여 들여다 보았을때 감탄을 한것이다
“이동식 黃金 닫집 안의 클레오파트라, 한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死刑囚들에게 毒藥을 먹여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태연한 태도
곁에는 부채를 든 시녀, 앞에는 잘 길들여진 표범,,,
마치 아름다운 美女와 야수를 그린 그림이 연상될 것이다
女王이 毒藥을 테스트를 하면서 표정하나 변하지않는 냉정한 태도는
독약의 효과에만 관심이 있는것처럼 묘사한것이 돋보인다
*그림 “클레오파트라와 농부”
옥타비아누스 황제(아우구투스)의 개선 행진후에 로마로 끌려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毒蛇)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bc30, 농부가 무화과 열매를 담아왔을때,
바구니 속에 뱀을 숨겨 전달했다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페르시아 침공이후 알렉산드리아 왕의 지배가 시작되는데,
.1대 파라오(베너스)은 500년전 바다속 마을로~나일강으로~사막으로
.제재르 왕은 계단식 피라미드를 건축하였고,
.해피 2세는 가장 오랫동안 통치(94년간)하였다
.6대왕조기간 7명의 파라오가 집권하고(6대왕 유토크리스 마지막 왕)
.가장 위대한 왕은 마지막 “람세스 3세”이다
@古代이집트 파라오(神)은 약 350명이며, 피라미드는 80개이다
.미라의 무덤은 왕의 막강한 權力과 인생의 無常을 상징한다
“파라오” 언어의 유래는 “王의 宮殿~위대한 居處”를 말한다
@미라는 영원한 인생의 시작으로 “오리시스 神話”의 내세관을 알수있다
.그들 사생관은 생명은 일시적이며, 죽은후에 제2의 인생을 믿고있다
“오리시스”는 지상의 모든 인류를 잘다스려 尊敬받는 神이다
.질투한 동생이 오리시스를 죽인뒤(토막살인) 나일강에 버리는데,
.獻身的아내(이시스)는 남편의 유해를 찾아 관에 모신다
.동생이 또다시 유해를 조각내어 이집트 전역에 뿌리지만,
.아내(이시스)는 남편의 유해를 다시모아 본래모습으로 만든다
.아폴론(太陽神)은 아비누스(죽은자들의 神)에게 命하여
남편(오리시스)의 유해를 (미라)로 만들었다
.아내(이시스)는 自身의 날개를 오리시스 미라에
바람을 불어넣어 소생시킨다
.소생한 오리시스는 죽은자들의 王이 되었으며,
.아들(호루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王이된다
@신화는 王이 죽은뒤 부활하여 神이 다스리는 세계의 王으로써,
.永遠히 산다고 고대 이집트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파라오(이집트 王)는 神과 같은 존재로써
.國家의 모든권력을 갖으며, 國土는 王(파라오)의 땅인 셈이다
따라서 死後를 위해 피라미드를 건설하게 되는것이지요
.영혼이 아무나 돌아오지 않기에 아무나 미라가 될수는 없었다
.즉, 영혼이 돌아오도록 미라를 만드는 것이다
.고대 중국 왕국시대 귀족들도 영혼이 돌아온다고 믿고있었지요
@미라는 많은돈이 필요해서 가난한자는 불가능했다
.미라를 만드는 方法은 둥그럽게 굽은칼로 遺骸 콧구멍에서
腦까지 찌른다음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버리고 香料를 칠한다
.7일간 天然소다수에 담구고, 좋은 삼베로 온몸을 감고, 고무를 바른다
.유가족에게 돌아와 상징적 의미로 입을 벌리는 儀式을 한다
즉, 장례준비가 끝난셈이다(죽으자가 먹고~마시고~말할수 있다)
@교훈은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은 없으며,
.이집트는 정치보다 하늘과 땅간의 自然의 조화를 중시했으며,
.神들의 대화에는 질서와 조화, 理想的인 꿈을 기대하고 있었다
.神의 의지가 종교적 계율을 열심히 지키다가 죽은뒤에는,
.내세에 부활하는 행복한 삶이 있다고 믿었다
이집트의 유구한 歷史
@이집트 歷史는 古代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로마 지배시대...
.古代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하류~제벨 바르칼(수단 북부)까지
번성하였다(bc15세기)
.古代 3대문명 발생지: 이집트 문명(나일강), 인도 문명(인더스강)
메소포타미아 문명(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中國 문명(황하강)
.이집트는 bc3200~bc343(약 3000년간)까지 존재했으나,
알렉산드로스 大王에게 점령당하여 古代 이집트는 폐망하게 된다
나일강 河口에 알렉산드리아 都市를 세우고, 아몬 신전에 참배하였다
@bc305~bc30어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가 시작된다
.알렉산드리아 大王이 바빌론에서 死亡한뒤,
.부하 장군(프톨레마이오스)이 이집트로 건너가 大王이 임명한
아미르(군사령관, 황제, 총독을 뜻하는 아랍어) “클레오메네스”를
추방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것이다
.이때부터 이집트가 번영되고 首都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간다
學者와 商人들을 그리이스에서 이주시켜 헬레니즘 文明의 중심지로
삼았으나, 점차 그리이스 세계와 접촉이 줄어들어 이집트의 색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와 연합하여 유지해 왔다
@bc30,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뒤,
.700년간 비잔틴 제국의 통치 이전까지 로마의 속주가 되어 滅亡한다
.이집트는 행정적으로 東로마 제국(이후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이 시기에 이집트는 로마에 곡물등 資源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이에 백성들은 궁핍해지고 도망자가 속출했던 것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基督敎를 허용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리고,
.황제도 改宗을 하였지만, 초기에는 基督敎人들이 박해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보호속에서 급격하게 발전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신전을 파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비잔틴 제국의 통치시대
.642년, 비잔틴 군대는 아리비아 침략군과 3년간의 전쟁끝에 철수하였다
.지도층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집트는 東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이후 비잔틴 제국이 基督敎를 國敎로 공인하자,
이집트의 土着宗敎는 설자리가 없어진다
.642년, 아라비아의 統治를 받아 200~300년간 지난후,
현재처럼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국가로 된것이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아바스 왕조에 의하여 統治되었다
.969년, 맘루크 출신의 將校들이 국가를 세워 1517년까지 유지하였다
(맘루크: 9c중엽, 이슬람 사회의 軍人 엘리트층을 형성한 백인 노예)
.1517년,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어 버린다
@1914년, 제1차 世界大戰에 오스만 제국의 主權이 상실되어 버리자,
.英國의 보호령으로 主權이 이양되지만,
.1922년, 民主主義 봉기로 영국에서 獨立하여
형식적인 立憲君主國으로 이집트 國家로 태어난다
.1952년, 가말 아브델 나세르: 구테타로 大統領으로 취임하였고
사다트: 구테타로 장기집권후 군사 퍼레이드 행사장에서 암살된다
무바라크: 2011년 중동지역 民主化 분의기에 강제 퇴임하였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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