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04.세종로라이온스클럽 인왕산, 청와대길 탐방(회장 조흥식)
*성균관 유림회관 김경선교수 문화해설
*대로(大老),이원익은 누구인가?
대로(大老), 이원익은 누구인가?
@인조실록(仁祖實錄) 7년 3월 3일
*왕이 하교하였다.
“옛날에 은(殷)나라 임금 수(受)가 극악무도하였지만 삼인(三仁)이
떠나버리고 나서야 나라가 망하였다.
*삼인이란? 仁者로써 은나라 왕 주(紂)의 이복형 미자(微子)와 종실인
비간(比干), 기자(箕子)를 말한다
이를 보면 나라에 仁人이 존재하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고
가뭄에 비가 내리는 일에 비유할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영부사(領府事) 이원익(李元翼)은 누구인가?
선왕조의 훈구 대신으로서 충성과 정절(貞節)이 크게 드러났으며,
청렴한 덕이 옛사람들보다 뛰어났으니, 진정한 이 나라의 大老이다.
그런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서 마음을 돌려 조정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으니 이는 과인이 무도하고 성의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아! 그렇지만 만약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면 어떻게 감히
“나는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었으므로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겠으며,
또 훗날 저승에서 선왕(先王)들을 뵙고 뭐라고 사죄할 수 있겠는가.
영부사가 조정을 떠난 후로 나의 죄와 허물이 날로 쌓여,
하늘의 꾸지람이 거듭해서 이르고 백성들의 원망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 때문에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지만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겠으니, 그 형세가 다급하고 심정이 절박하다고 하겠다.
내가 영부사를 한 번 만나 도(道)를 논함으로써 개과천선의 발판을
삼고자 하니,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를 지어 사관(史官)에게 주어
보내 정중하게 유시(諭示)하게 하라.”
@1629년(인조7) 왕이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있던 83세의 원로대신
이원익(1547~1634)을 조정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하교한 내용이다.
이원익은 선조와 광해군, 인조대에 걸쳐 40여 년간 재상을 지냈으며
영의정에도 다섯 번이나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임진왜란에는 도체찰사 직책을 맡아 국난 극복에 큰 공을 세웠고,
광해군 때는 김육(金堉)이 건의한 大同法을 경기지방에 실시하는 등
민생의 부담을 경감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임해군(臨海君)을 처형하려는데 반대하여 귀향하였고,
인목대비 폐위를 강하게 반대한 죄로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인조반정후 西人 정권은 반정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남인계 인사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발탁하였다.
이원익은 인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갔지만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이에 반대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였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80세에 가까운 나이로 왕을 公州까지 호종하였고,
정묘호란 당시에도 도체찰사로서 세자와 왕을 호종하였다.
그 후 노쇠함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다가 그대로 귀향하였는데,
인조는 다시 조정에 나와주기를 이렇게 정중히 요청하였던 것이다.
@大老는 무슨 뜻일까?
대로는 단순히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도덕적으로 만인의 귀감이 되고, 시국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세상을 바르게 이끌 수 있는 경륜을 지닌 사람을 지칭한다.
*孟子가 周의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을 “천하의 대로”라고 말한 고사로써
“나라의 큰 노인, 나라의 큰 어르신”이라는 뜻이다.
이원익은 오랫동안 벼슬살이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두어 칸짜리 초가집에서 생활하였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끼닛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고 한다.
그를 인조가 ‘대로’라고 일컬은것은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뒤로 가면서 ‘대로’ 라는 어휘의 성격이 달라졌다.
왕이 국가의 최고 원로대신을 극진히 예우하는 뜻으로 사용했던
일반명사 ‘대로’가 특정 정파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갔다
효종~숙종에 老論의 당수로 활약했던 宋時烈이 여기에 해당한다.
조정의 공식 석상이나 상소문 등에서 송시열을 지칭할 때
모두가 그의 이름 대신 ‘대로’라고 부르는 것이 관행화되었다.
국왕 앞에서는 자기 아버지의 이름도 피휘(避諱)하지 못하고
그대로 불러야 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로 대로는 곧 송시열의 또 다른 명칭처럼 굳어졌으며,
*정조(正祖)는 노론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그의 사당에
‘대로사(大老祠)’라는 편액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인조는 집권후 남인이지만 국민적 신망이 두터운 이원익을 기용함으로써
반정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희석시키고 그의 풍부한 경륜을
십분 활용함으로써 반정 초기의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인조가 그를 ‘대로’로 극진히 예우한 것이겠지만,
이는 당시 서인과 남인이 원만한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숙종대 이후로는 상황이 달랐다.
당쟁이 격화됨에 따라 정치 세력 간의 공조나 연대는 사라졌고,
국정은 편파적이고 독선적으로 운영되었다.
송시열은 ‘대로’로 한 세상의 추앙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후에도 노론의 사상적 지주로서 오랫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조선 후기 정치계와 사상계의 거장이었던 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당쟁의 상징적 인물로 각인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 우리는 전례 없이 큰 갈등을 겪고 있다.
매사 이해관계에 따라 각 집단의 주장이 상반되고,
보수와 진보 진영이 갈리어 극단적인 대립을 거듭하고 있다.
모두가 내 주장만 내세울 뿐 다른 쪽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 않는다.
상대편을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는 편향된 시각, 아집과 독선은
격렬한 당쟁의 시기보다 더 심해진 듯하다.
누군가 나서서 대국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를 바라지만,
사회 대통합은 고사하고 불신과 분열을 조장하기 일쑤이다.
과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거나 구성원들의 의견이 대립될 때면
집안 또는 고을의 큰 어른을 찾아뵙고 고견을 들었듯이,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지닌 큰 어른의 말씀이 듣고 싶어진다.
모두가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진정한 ‘한 나라의 어르신’을 나날이
갈망한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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