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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위원장 동우회(2015-2016)

2015-0805.지대위원장회 월례회

by 조흥식 2023. 3. 23.

2015-0805.지대위원장회 월례회(베누스타)

白衣從軍이란?

 

 

 

 

 

白衣從軍이란?

@박성(朴惺 1549~1606), 시폐를 논하는 상소

지난 계미년(1583, 선조16), 북쪽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하였습니다.

당시 대신은 식견이 좁고 해이하여, 공을 탐내다가 패전한 자에게

관대한 법을 적용하여 함부로 군법을 흔들었습니다.

이른바 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워 속죄한다는 것이 여기서 시작되어,

이로부터 정해진 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장수와 병사들이 죽음을 면하는 것은 다행이지만

군율은 어찌하며 나랏일은 어찌하겠습니까.

법을 엄하게 만들어도 태만하게 여기는 폐단이 있는데,

법을 태만하게 만들면 폐단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익숙해져 모두 당연하게 여깁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수와 병사들이 도망치면서도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으며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식자들은 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워 속죄한다는 말이 장수와 병사들이

도망치는 길을 열었다고 여깁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5975

조선군 통솔하는 체찰사(體察使) 이원익의 참모 박성이 올린 상소

니탕개(尼湯介)의 난 이래 白衣從軍이 관례가 되자

장수와 병사들이 적을 만나면 싸울 생각은 않고 도망칠 궁리부터 한다는

것으로써, 도망쳐도 처벌은 백의종군에 불과하니,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으면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다.

白衣從軍의 폐단이다.

 

@백의종군은 흰옷을 입고 군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간다는 말이다.

죄를 지은 장수를 처형하는 대신 싸움터에 내보내 공을 세워 속죄할 기회를 주는 처분이다.

백의종군의 처분을 받으면 일개 졸병으로 싸움터에 나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장수의 능력이 아까워 처벌하지 않고 싸움터로 내보내는데,

졸병으로 내보내면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있겠는가.

백의종군은 강등이 아니라 일종의 경고이며,

처벌하는 대신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는 특별 사면에 가깝다.

 

@중국 측 연구에 따르면,

종군을 조건으로 범죄자를 사면하는 일은 고대부터 존재하였으며

관원에 대한 처벌로서의 백의종군은 위진남북조의 백의영직(白衣領職)’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백의영직은 흰옷을 입은 채로 직무를 수행한다는 말이다.

본디 문관과 무관 공히 적용되는 처벌인데, 무관의 경우는 자연히 백의종군이 된다.

 

@최초의 사례는 중국의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증조 도간(陶侃)이다.

도간은 반란군에게 패배하여 해임되었으나

권력자 왕돈(王敦)의 요청으로 백의영직한다.

재기의 기회를 얻은 도간은 마침내 반란을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백의종군의 또 다른 성공 사례는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이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고구려 멸망의 주역으로 三國史記에 등장한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처음 고구려 정벌에 나섰을 때,

유인궤는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군량을 실은 배가 침몰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당고종은 그를 처형하는 대신 백의종군을 명하였다.

백의종군 덕택에 목숨을 건진 유인궤는 고구려 멸망에 혁혁한 공을 세워

당나라 입장에서는 백의종군의 성공 사례이다.

 

@당나라를 혼란에 몰아넣은 안록산(安祿山) 역시 백의종군의 수혜자이다.

안록산은 본디 당나라의 장군이었다.

그는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다.

안록산의 용맹을 아낀 당현종(玄宗)은 처형 대신 백의종군을 명하였다.

그러나 현종의 배려로 목숨을 건진 안록산은 훗날 반란을 일으켜 현종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백의종군은 때로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백의종군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백의종군을 경험했다.

 

1)첫 번째는 1587년 조산 만호(造山萬戶) 시절이다.

녹둔도 전투 패배로 이순신은 선조의 특명으로 백의종군의 처분을 받는다.

이순신 역시 니탕개의 난 이후 관례화된 백의종군의 수혜자였던 셈이다.

 

2)두 번째는 1597년 통제사로 재직하던 때이다.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바다를 건넌다는 첩보를무시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는 이유로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된다.

간신히 처형을 모면한 그에게 다시 백의종군의 처분이 내린다.

원균이 전사한 뒤 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은 명량 앞바다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은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영웅서사시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백의종군이 과연 '고난'이었을까.

백의종군은 법에 규정된 처벌이 아니다.

어떠한 법전에도 백의종군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백의종군은 처벌이 아니라 특혜에 가깝다.

더구나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백의종군으로 재기의 기회를 얻은 사례는

이순신 장군을 제외하면 찾을 수 없다.

이순신 장군에게 두 차례의 특별 사면을 내린 선조가 그를 푸대접하였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순신 장군은 두 차례의 특별 사면에 힘입어 역사에 길이 남는 공로를

세웠지만, 특별 사면과 같은 초법적 조치는 늘 부작용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적과 맞서 싸워야 할 장수가 제 목숨이 아까워 싸움터에서 도망친다면 군법에 따라 처형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전선을 이탈한 장수에게 번번이 백의종군이라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결과, 장수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기보다 도망칠 궁리를 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드러난 백의종군의 폐단은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

적에게 항복한 장수를 백의종군시킨 사례도 발견된다.

백의종군은 죄인이 처벌을 모면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4.13 국회의원의 선거철이다.

여기저기서 백의종군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출마할 기회를 얻지 못한 정치인의 백의종군 선언은 그나마 양심적이다.

당직을 내놓고 물러났다가 슬그머니 선거판에 끼어드는 정치인이 내세우는 핑계 역시 백의종군이다.

심지어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하는 정치인도 백의종군을 말한다.

이순신 장군에 빙의라도 했는지 사뭇 비장하지만,

시키지도 않은 백의종군을 자청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백의종군은 정치 생명 연장을 위한 명분으로 악용되고 있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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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