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13.소백산 종주(8,13~8,14 희방사, 옥여봉, 비로봉, 국사봉, 초암사, 삼본 정도전생가, 무섬마을)
단장지애(斷腸之哀)
단장지애(斷腸之哀)
@홍세태(洪世泰 1653~1725) 유하집(柳下集)
“제망녀이씨부문(祭亡女李氏婦文)”
“슬프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자식잃은 슬픔을 겪어서 마음이 상한 지 오래다.
네 동생을 잃은 뒤엔 몸은 마르고 정신은 사그라져 넋이 다 망가졌다.
살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죽지 않았던 것은 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또 네 죽음을 보았으니 내가 다시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겠느냐.
마땅히 빨리 사라져야 시원할 것이다.
네 어미에게 듣자니 너는 병이 위중해지자 흐느껴 눈물을 흘리며,
어미에게 말했다지.
“아버지를 못 보고 죽으려니 눈이 감기지 않아요.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죽으려 할 텐데,
그러면 저 어린 다섯 아이는 어떡해요.
어머니 죽지 마세요.”
아아! 설령 목석같은 사람일지라도 이 말을 들으면 혼절할 텐데,
하물며 그 부모임에랴!……
아아 너는 이제 가면 돌아오지 않겠구나.
잠시라도 머물러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곁으로는 아이들을 이끌며,
이 술과 음식을 맛보고 평소처럼 기쁘게 웃어 보일 수는 없겠느냐?”
@자식의 죽음은 눈이 머는 상명(喪明)의 고통이며, 창자가 끊어지는 단장(斷腸)의 비애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는 자식이 죽자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고 밤낮으로 소리쳐 울다가 눈이 멀었다.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한 아버지는 딸이 입관하던 날에
창자에서 피를 쏟아냈고, 하도 울어서 성대가 녹아내렸다고 한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슬픔이자 가장 고통스런 절망이다.
@시인 홍세태는 이러한 참척(慘慽, 자식을 먼저 떠나보냄)의 고통을 열한 번 겪었다.
유하(柳下) 홍세태는 조선 후기의 여항(閭巷) 시인이다.
다섯 살에 책을 읽고, 일곱 살에 글을 지을 만큼 총명했지만
과거를 치를 수 없는 중인의 신분이어서 벼슬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만 하지는 않았다.
제자에게 준 글에는 그가 세상을 어떤 태도로 살아갔는지 알수있다.
“재주가 있고 없고는 내게 달렸고,
그 재주를 쓰고 쓰지 않고는 남에게 달렸으니 나는 내게 달린 것을 할 뿐이다.
어찌 남에게 달린 것 때문에 가난하고 부귀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다가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없앨 수 있겠느냐?”
그는 시로써 세상에 떨치리라 마음먹고 김창협, 김창흡 형제 등
저명한 시인들과 어울리며 시 창작 훈련을 쌓았다.
23살에 역과에 합격, 역관이 되어 일본과 중국에 가 이름을 크게 알렸다.
가는 곳마다 그의 시, 글씨를 받아가려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일본과 중국에선 한류 붐을 일으켰지만 조선에서의 그는 천대받는 중인 시인이었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자식들이 있기에 행복했다.
자그마치 8남 3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 자식들로 인해 홍세태는 가장 참혹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자식들이 하나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이다.
종국에는 열한 명 모두 저 세상으로 보냈다.
자식이 하나만 죽어도 애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을진대
열한 명의 참척을 당했으니 그 마음은 너무도 참혹했으리라.
그의 말을 빌리자면
“겉은 멀쩡해도 속은 다 타서 없어진” 삶이었고,
“남의 아비가 되어 자식 하나도 키워내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다가 한을 머금고 죽게 했으니,
말만 하면 가슴이 찔려 잠시라도 아프지 않을 때가 없는” 시간이었다.
아들들에 이어 차례로 떠나보낸 딸에겐 ‘어엿한 치마 한 벌’ 못 해 주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나보낸 자식은 큰딸이었다.
그는 특별히 큰딸을 아끼고 사랑했다.
큰딸은 유달리 외모가 예뻤고 온화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부모에겐 효성을 다했고 아버지에겐 늘 순종했다.
더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간 딸은 집안을 꾸리느라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막일을 했다.
그럼에도 빚 독촉을 하는 사람들이 툭하면 들이닥치곤 했다.
홍세태는 어떻게든 딸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어 홀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딸은 병든 몸으로 남자아이를 낳았다.
손자를 본 기쁨은 잠시였다.
서울 갈 일이 생겨 몸조리를 당부하며 떠난 지 열흘도 안 되어,
가던 도중에 딸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서둘러 돌아왔지만 딸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는 겨우 기력을 내어 눈물로 붓을 적셔가며 딸을 위한 제문을 지었다.
윗글은 딸에게 쓴 제문 일부이다.
눈이 감기지 않는다던 자식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임종을 지켜주지 못한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딸의 마지막 소원은 부모가 오래도록 살아 자신의 어린 자식들을 잘 돌보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홍세태는 딸의 마지막 소망마저 이루어 주지 못하고, 7년 뒤에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부모는 자식을 잃으면 당신이 하늘에 큰 죄를 지어
그 벌이 자식에게 옮겨간 것이라는 죄책감을 평생 짊어진 채 살아간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은 막내아들 면이 왜적과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내가 지은 죄로 인해 재앙이 네 몸이 미친 것이냐!”라며 울부짖었다.
조선 전기의 문인 양희지(楊熙止, 1439~1504)는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죽자
“내가 평생에 지은 죄악이 이 아이에게 옮아가 그 목숨을 짧게 줄였다.” 라며 비통에 젖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채 피지도 못하고 떠났을 때 부모 마음은 어떠할까?
이 세상에 자식을 앞세운 한보다 깊은 슬픔이 있으랴!
@안산 합동분향소 벽에 붙었던 한 어머니의 통곡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너는 돌 때 실을 잡았는데
명주실을 새로 사서 놓을 것을 쓰던 걸 놓아서 이리 되었을까.
엄마가 다 늙어 낳아서 오래 품지도 못하고 빨리 낳았어.
한 달이라도 더 품었으면 사주가 바뀌어 살았을까.
엄마는 모든 걸 잘못한 죄인이다.
몇 푼 벌어 보겠다며 일 하느라 마지막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엄마가 부자가 아니라서 미안해.
없는 집에 너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에 가.”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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