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16.세종로라이온스클럽 번개모임(종로구청 병천유황오리) *회장 조흥식
*연강재 문후(練江齋 文後)
연강재 문후(練江齋 文後)
@문후의 자(字)는 행선(行先), 호는 연강재이다
*三樂
1)詩書로 마음 수양하는 즐거움(詩書養心之樂)
2)전원에 취미 붙이는 즐거움(田園寓味之樂)
3)고기와 새 등 물상 관찰하는 즐거움(魚鳥觀物之樂)
*五愼
1)조정의 정치와 관청의 일은 삼가 말하지 말라(愼不言朝政官事)
2)남의 장단점을 삼가 논하지 말라(愼不言人之長短)
3)부와 귀를 삼가 경영치 말라(愼無營富貴)
4)점술과 묘수의 학을 삼가 현혹되지 말라(愼無惑術數)
5)성색 기예를 삼가 사귀지 말라(愼無交聲色技藝)
*연강재(練江齋) 문후(文後: 1574~1644)
.경남 사천시 곤명면 금성리 덕천강가에는 연강정(練江亭)이 있다
.연강정은 練江齋 文後(문후)가 29세(1602년)에 연강정을 세웠다
.일생 동안 벼슬하러 나가지 않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하기 위함이다
.여러번 중수하여, 현재의 모습은 1991년에 재건한 형태이다
연강정 좌측, 제자들을 가르쳤던 삼락재(三樂齋)가 있는데,
후손(문영소, 문영건)들이 주축되어 복원하였다
.연강정 앞 초입에는 연강재 유허비와 연강정 뒤편에 금릉사가 있다
유림에서 연강재를 추모하는 향사를 올린다
.현재 연강재의 13세손(문희규, 문갑규)이 유지와 관리를 하고 있다
@연강재 문후(강성문씨, 江城)는 삼우당(三憂堂) 문익점의 9세손
.연강재는 어려서부터 비범한 자질을 바탕으로 학문에 힘쓰다가
20세에 母親喪을 당하여 도로변에 묘를 쓰고 시묘살이를 할 때,
당시 壬辰倭亂, 父親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권유하자, 울면서 말하였다
“왜적을 걱정하지 마소서. 적들도 또한 사람의 자식입니다”
.끝까지 상을 마치니 적들도 근접하지 못하였다고 한며,
.壬辰倭亂과 丁酉再亂때문에 과거시험를 포기하고
.29세, 금성리 덕천강가에 연강정을 짓고 평생 학문에 매진하였다
@연강재의 학맥
.각재(覺齋) 하항, 모계(茅谿) 문위를 사사하였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생을 사숙(私淑)하였다.
.학문 토론과 종유(從遊)한 선비는 부사(浮査) 성여신, 동계(桐溪) 정온,
무민당(无悶堂) 박인, 겸재(謙齋) 하홍도, 오봉(五峯) 이호민...
.당대의 석학들과 명망있는 국사(國士)들이었으나,
초야에서 학문에만 종사한 연강재의 학덕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회재(이언적)과 퇴계(이황)를 위한 상소에 앞장선다
.내암(來庵 정인홍)이 회재(이언적)과 퇴계(이황)을 훼척하자,
.영남학자(73명)들이 연명 상소를 작성하여 한양에 상경하여
대궐앞에서 항소한 일은 역사에서 전하는 유명한 일이다
.당시 동리(東籬) 김윤안, 월간(月磵) 이전, 모계 문위, 동계 정온,
상암(霜 ) 권준 등의 명유들이 앞장섰다
.곤양현의 대표는 연강재였고, 한양에서 연강재가 선두로 주창하였다
@五賢(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오현에 대한 신원과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두 번 비답하였고,
.영남유생들이 낙향길을 위로키 위해 대궐뜰에서 정시(庭試)를 열었다
영남 유생들은 헤어지는 기로에서 각자 이별시를 지어
작별의 정을 나눈 일이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데,
연강제(문후)~동계(정온)의 詩를 소개한다
@거창 성초역에서 연강재의 詩
“신 매고 상소문 봉하여 북쪽하늘 향했다가
임금의 은혜입고 돌아오는길에 채찍을 함께하여 읊조리네
석양에 손잡고 이별하기 어려우니
버드나무도 다정한양 푸른 물가에 섰구나”
@동계 정온의 詩
“천 리 먼 길 한 목소리로 구천에 호소하고
남으로 돌아오는 행색 또한 채찍을 연이었네
이제 어찌 차마 갈림길에 임하여 이별할까
해 저무는 청산가에서 이별의 말을 못하노라”
@연강제, 덕천강변 언덕 위에 자리잡아...
.연강정은 겸재 하홍도의 안계 모한재(慕寒齋)와 무민당 박인의
봉계 산해정(山海亭)으로부터 30리 이내에 위치해 있고,
부사 성여신의 허백정(虛白亭)은 연강정에서 5리 거리에 있다
.연강재는 이들과 교유하며 서로 왕래하고 강마하면서,
시대를 이끄는 학문과 사조를 일으켜 국가의 기강을 견지하였다
.최초 송로정(送老亭)이라 부른것은 벼슬하지 않고 노년까지 보내겠다는
의미였으나 훗날 연강정으로 개명한 것은 정자주변의 자연환경 때문이다
.지리산에서 흘러오는 덕천강물이 금성에 이르러 평야를 이뤄,
완사(浣紗) 들판으로 불렀다
.덕천강물이 비단을 씻을 정도로 맑다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었다
연강의 연(練)은 “씻을 연( )”자로도 흔히 쓰였던 것으로,
넓은들 맑은물이 있는 곳이라서 연강이라 하였고, 자호로 삼았다.
.훗날 월계(月溪) 심일삼은 천석정(天石亭)이라 불렀다
자연으로 형성된 암반을 지칭한 것이다
@추연(秋淵) 권용현이 지은 연강재 유허비문
“강가의 승경은 동남의 으뜸이고,
종유하고 강론한 자는 한때의 명유들이었다”
“한강(정구) 선생의 학통을 이었으니,
한강의 학통은 실로 퇴계(이황)와 남명(조식),
양 선생의 것을 계승하였다. 연원의 정맥이 여기에 더할 것이 없다”
.현재 허백정의 “허백정 동취록(虛白亭同醉錄)”이 남아 있고,
연강정에는 “연강정 동유록(練江亭同遊錄)”이 남아있다
.연강정 현판 글씨는 연강재 7세손 문상권이 12세에 쓴 글씨이다
@연강제 문후의 저서는 전란으로 없어져
.역학회통(易學會通),사례촬고(四禮撮考),유거록(幽居錄),동영지(東瀛志)
.훗날 연강재는 학행으로 통훈대부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
.남명(조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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