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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라이온스클럽(354-C지구)

2016-0312.세종로라이온스클럽 2016년도 시산제

by 조흥식 2023. 4. 14.

2016-0312.세종로라이온스클럽 2016년도 시산제

*당고개역 공원~수락산 귀임봉

*자치통감 8(修身7)

 

 

 

자치통감 8(修身7)

3.공을 세우고도 오만하지 않다

@육항(, 육손의 아들)20세에 부친이 죽었다

*육손은 이릉전투(222)에서 유비를 격파한 명장이다

*육항은 서릉수복 전투의 혁격한 전공에도 겸허하고 오만하지 않았다

272, 양조가 전투중 도주하였는데 육항은 즉각 추격하지않고

북을 울려 추격하는 시늉으로 기만작전을 펼친뒤,

이후 추격하여 적(양조)을 섬멸하였다

즉각 추격하지않은 이유는 보천의 후미 습격을 우려했던 것이다

 

*보천은 주군 손호와 갈등으로 이 투항하였는데,

훗날 양호, 육항은 보천과 공모한 장수를 주살하고 3족을 멸하였다

*진무제(사마염 236~290)시절, 양조(형주자사)에게 보천을 도와줘라

진무제는 서윤을 시켜 수군을 통솔하여 건평을 공격케 하였는데,

북방 노장(양호)은 군사 5만명으로 강릉에서 보천과 호응하여

서릉을 지원하여 육항()과 교전하여 참패를 당한다

 

@前燕, 태제 모용각은 조심스럽고 근엄하였다

*항상 사도 모용평과 상의하여 업무를 처리하였다

주요 공직자의 자기절제력과 도덕성 함양의 표본으로 전해진다

(고대 정치윤리에서 덕치와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였다)

*열조 모용준(319~360)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동진에서 전연을 공격하려 했을때, 환온이 이를 제지하였다

모용각이 건재하니, 앞으로 우환이 더 걱정이다라고 한탄하였다

 

@육항은 방어에 주력하는 작전스타일(으로 을 제압한다)

*나라 대군이 도착전에 서릉주변에 높은 성벽을 세워

안으로 보천을 고립, 밖으로 진나라 군의 방어용으로 판단하였다

*부하들이 빨리 서릉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고 건의하였으나

일시공격으로 서릉 함락이 어렵다면서 공격을 서둘지않았다

이때 나라 군대(양호)가 부근에 도착한다

*육항은 장함에게 명령을 내린다

강에 제방을 쌓아 물을 가둬라

*이작전을 눈치챈 양호()는 강물을 역이용하는 계략을 사용한다

강물을 이용하여 군량과 물품을 미리 강건너편으로 손쉽게 수송하면서

거짓정보를 흘린다

강물 때문에 나라가 위험해 질 것이다

우리가 강뚝을 공격하여 강뚝을 풀어야한다

*이때, 육항은 역발상으로 강뚝을 붕괴시켜 나라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의 병참선을 막아 적의 공격속도를 둔화시킨다

 

@招式(초식): 싸움의 틀(전투대형), 고수들이 적을 공격하는 초식

*진나라 대군이 도착시 담장(성벽)에서 방어하면서 적 공격을 지연시키고

오나라 장군이 일부 진나라로 투항하지만,

*육항은 적진으로 도주한 오나라 장군의 정보제공을 역이용하여

오나라 취약지역으로 공격을 대비하여 정예 전투력을 집중 재배치한다

*양조()는 오나라 포위망을 돌파했으나,

서릉(보천)이 고립되어 합류가 불가능하자 작전에 큰 차질을 빚는다

 

@양조()은 식량부족으로 몰래 철군을 강행한다

*육항()은 즉각 추격을 하지않고 북을 울려 위장추격을 하면서

양조 군대가 중무장을 풀고 도주하게 한뒤, 가동대 추격으로 전멸시킨다

*사실은 후방(서릉에 주둔한 보천)의 습격을 우려하여

즉각 추격을 하지않았던 것이다

*육항의 승리원인은 단호한 의지, 정확한 판단, 충분한 인내력 때문이다

 

@육항은 서릉전투 승리후의 모습

*“얼굴에 뻐기는 기색이 없었고, 여전히 평상시처럼 겸허하게 처신하였다

 

고귀한 품성(畵龍點睛 화룡점정)

@육항()가 죽은뒤,

*양호()는 진무제에게 남반정벌은 건의하였으나 대신들이 반대하였다

*양호가 죽기전에 후임자로 두예(222~348)를 천거하였는데,

끝까지 양호계책을 시행하여 오나라를 멸만시킨다

 

@516, 前燕(337~370)

*태제 모용각(선비족 귀족출신)은 군사재능이 탁월하여

15세부터 많은 전투공적을 쌓아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부친 모용황(297~348)前燕을 건국아여

*큰아들 모용준이 왕으로 즉위하였으마 병으로 죽었다

태제 모용각에게 즉위를 권했으나, 양위를 거절하였다

고명대신(숙부 모용평, 귀족 모여근)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모용준이 죽자마자, 東晋에서 前燕을 침공하려했으나,

모용각이 버티고있어 동진의 앞날이 우려된다며 환온이 만류하였다

*결국, 모용준의 아들(11, 모용위 350~384)이 즉위하였는데

모용각에게 섭정을 부탁하여 승낙을 받게된다

모용각은 추호도 사심이 없다는 성인다운 모습을 보였다

*모용각은 주무왕()이 죽은뒤, 주공단이 조카 주성왕을 보좌하듯

내란을 평정하고 관직사회의 부패일소와 전심전력으로 섭정하였다

 

@모용각이 죽고난뒤 前燕의 국력이 쇠퇴되고

*3년만에 前陳(350~394) 부견(338~385)에게 멸망한다

*모여근(귀족대신)은 모용준이 죽자,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다

모용각 면전에서 황태후(모용준의 부인)

왕태후가 지나치게 정사에 관여한다라고 비방하였는데,

어린조카(모용위)대신 모용각이 황제에 즉위하라고 건의하였으나,

모용각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모씨가문에서 모여근(귀족대신)을 주살하라고 주장하였으나,

전연의 상황이 현재 국상중이고, 외부 강적의 침공이 우려되며,

재상간의 살육내전은 안된다며 걱정하였다

*모여근은 황태후에게 모용각을 이간질하는데,

모용각은 어린황제에게 위협적인 인물이며, 중원을 버리고

요서(선비족 발상지)로 돌아가려 하고있다고 모함하였다

이때부터 前燕정권 기반에 금이 생겨 쇠락의 길을 걷는다

 

@모용각은 모여근 가족(일당)을 모두 주살하여 없앤다

*모용각은 평소 어린황제에 군신간의 예절을 준수하고

주요업무를 처리할때에는 고명대신(모용평)과 상의하였고

늘 부드럽고 겸손하게 처신하면서 국정안정을 위해 헌신한다

 

@모용각이 죽은뒤,

*모용평(고명대신)은 아랫사람을 백안시하고

독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였다

*3년후, 前燕이 멸망한다

 

@前燕과 모용각(현인)의 교훈

*정권의 흥망성쇠는 賢者(1)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었다

*사마광의 계고록

한나라에서 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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