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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갑총재(2020-2021)

2020-0804. 헌장규칙 개정위원회

by 조흥식 2023. 12. 17.

2020-0804. 헌장규칙 개정위원회

소윤(문정왕후, 윤원형), 乙巳士禍, 정난정(정경부인)

 

 

 

 

 

소윤(문정왕후, 윤원형), 乙巳士禍, 정난정(정경부인)

@중종반정(1506, 연산군12)

.진성대군(중종)은 성종계비(정현왕후)의 아들이며, 연산군(인성대군)의 이복동생이다

.연산군의 지방 유람때 거사를 계획했으나, 갑작스런 일정취소로 자칫 실패할뻔 했다

.반란군이 진성대군집을 포위하자, 겁에 떨면서 불안하여 자살하려 했다

 

신씨부인(단경왕후, 거창신씨)이 기지를 발휘하여 하인에게 물었다

머리 방향이 궁을 향했는지? 밖을 향했는지 보거라?”

하인은 대답하였는데 머리가 밖을 향해 있읍니다

단경왕훈는 우리(중종+신씨)를 보호하는 뜻으로 안심한것이다

.신하들의 중종반정 거사(성희안, 박원종...)에 성공한다

.연산군(31)은 교동(강화도) 유배에 적응하지 못하여 병사한다

 

@단경왕후(신씨부인, 12, 7일간 왕비)가 폐위된다

.역적 신수근(연산군의 처남)의 딸이 죄가 될수밖에 없었다

.힘없는 중종은 공신들의 등살에 어쩔수 없이 이별한다(권력무상)

.단경왕후는 중종의 부름을 기다리며, 인왕산 치마바위 유래가 되었다

.양주 장흥(溫陵, 온릉; 남편 손길이 그립다는 뜻, 70)

.죽은뒤, 단경왕후로 승격(명종)~온릉으로 승격(영조)되었다

 

@장경왕후(1계비, 대윤, 파평윤씨)

.중종은 장경왕후를 정실부인으로 세자(인종)를 낳지만,

7일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일찍 승하한다(25)

김안로 주장(헌인릉에 많아), 서삼릉(禧陵)으로 이장한다

 

@문정왕후가 득남을 하였다(명종, 경원대군)

.남동생(윤원로,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하여 온갖 계략을 꾸몄지만,

윤임(大尹, 장경왕후의 동생)의 반대로 극단적인 세력다툼으로 흘러간다

 

 

을사사화 乙巳士禍(1545)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였다

.외척 大尹(윤임) 장경왕후가 권력을 쥐었다

.인종(31)9개월간 재위후 돌연 사망하였다

효릉(서삼릉) 엄마곁(장경왕후)으로 잠든다

 

@명종(12)이 즉위하였다

.乙巳士禍(1545): 대윤의 숙청(장경왕후 오빠: 윤임)

.문정왕후 형제(윤원로), 김안로가 처형된다

윤임과 따르는 세력, 유관, 유인숙을 숙청하고

윤원형을 탄핵하여 파직시킨 송인수와 이약수(윤임의 친척)을 처형,

회재 이언적, 노수신, 정자,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등 20여명을 유배시킨다

 

.윤번 후손: 정희왕후(수양대군비)~윤사윤(2째아들)~윤사흔(3째아들)

.小尹: 윤사윤(2째아들)~아들(윤보)~

손녀(장경왕후, 1계비)인종

손자(윤임)+윤임 후손(아들2)이 숙청된다

.大尹: 윤사흔(3째아들)~2째아들(윤계겸)~

증손녀(문정왕후, 2계비)명종

증손자(윤원형, 문정왕후의 4째동생): 16채 가옥(정난정 애첩)

 

@양재역벽서 사건이 휘몰아친다(1547)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비난하는 벽보사건을 말한다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것이다

.100명이 처형된다(중종 아들, 봉선군 처형)

.윤원형의 일당들이 사전모의한 의도된 자작극 사건이다

 

@기묘사화~을사사화, 수렴청정으로 도둑이 들끓었다

.훗날 문정왕후(명종의 친모, 8년간 수렴청정)20년간 철권통치, 명종의 실권기간은 2년밖에 안된다

남명 조식(중종의 스승)이 상경하여 총언을 올린다

주상이 성장하였는데도, 아녀자가 조정일에 갑섭하느냐?”

소설 임꺽정(벽초 홍명희)의 삽화에 자주 등장한다

 

@문정왕후는 선정릉을 위해 봉은사를 증축한다

.2010, 조계종(총무원장)와 봉은사 주지의 밥그릇 싸움(공개토론)이 많았다

.보우 스님을 봉은사주지로 임명한다(1548)

.부우를 선종판서로 임명후, 상소(498)가 들끓었고, 성균관은 미출근 항의를 하였다

.도첩제(3년제)는 정원이 30명이었으나, 15년간 4000명을 뽑은것이다

*또한, 휴정/유정 스님도 배출했다(임진왜란 승병활동)

부우 스님의 제자는 서산대사이며, 서산대사의 제자는 사명대사이다

.9년간 수렴청정기간에 전국에 강도와 도적(임꺽정)이 들끌었다

 

@임꺽정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기에 의적으로 평가되었다

.성호 이익(3대 도적: 임꺽정, 장길산, 홍길동)

.벽초 훙명희의 소설에서 의적으로 강조되었는데

.혼탁한 조정의 혼란기에 대윤~소윤의 외척정치와 기묘사화~을사사화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전국에 도적이 들끌었다

.농민 수탈이 심화되고 3년간 자연재해(1559~1562)로 흉년이 농업 생산량을 감소시켰다

.악덕 수령 처단, 감금된 동료를 구출, 조직력을 강화에 중점을 두고 8~9개 제대(200)로 편성하였다

 

 

過猶不及(과유불급)

@過猶不及이란?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소박한 교훈이다

.지나친 욕심이 빚어낸 고독한 현장은 수없이 많다

 

@신덕왕후 (태조 이성계)의 지나친 욕심으로 곤혹을 치른다

.최초 정릉(貞陵)은 정동(貞洞)에 있었으나, 이방원은 貞陵으로 강제 이장하여 200년 동안 묘비도 없었다

.종묘에 배향하던 초겨울(1669,11,1)에 정릉(貞陵)일대에 세원지우(洗寃之雨),

 한이 맺힌 때아닌 겨울비가 되어 내렸으며, 아직도 쓸쓸하게 혼자서 정릉(貞陵)에 뭍여있다

 

@문정왕후(2계비, 소윤, 파평)

.문정왕후의 泰陵(태릉)도 고독하기 그지 없다

.예송논쟁으로 말도 많았던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로

서삼릉에 모셨던 중종을 강남 宣陵(선정릉)으로 강제 이장시켜,

결국, 죽은후 부부만의 공간을 만들려는 욕심이 화근이 된것이다

 

.宣陵(선릉)에는 부모(성종, 정현왕후)가 다정하게 잠들어 있으나,

욕심많은 며느리 덕분으로 靖陵(정릉)에는 아들(중종) 혼자뿐이다

.중종(靖陵, 정릉)는 서삼릉에 장경왕후(대윤)와 합장묘이었으나

선릉(성종, 삼성동 봉은사옆)으로 남편(중종, 정릉)을 이장했지만,

본인이 죽은후(65), 혼자 泰陵에서 잠들게 된다

.선정릉(중종)~온릉(단경왕후)~서삼릉(장경황후)~태릉(문정왕후)

 

 

 

윤원형은 누구인가?(小尹, 파평윤씨)

@윤원형(?~1565 문정왕후의 동생)

.乙巳士禍의 공신책록으로 大尹을 숙청하였다

.1547,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정치권력에 등장하여 이조판서, 우의정,

서원부원, 영의정(1563)을 지낸 인물이다

.1565, 문정왕후가 사망하여 삭직되어 강음에 귀양되어 죽는다

탄핵으로 재상에서 파직되어 심야에 부인행색으로 도성에 잠입하여

정난정()과 함께 강음 자신의 농가에서 거처하였으나

정난정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자, 분울해 하다가 죽는다

.명종은 위사(을사사화, 윤임 大尹의 숙청시킨 공신의 칭호)의 유공으로 3등 장례를 하사하였다

.윤원형은 사람들을 풀베듯 죽이며 흉악한 짓은 있는데로 다하였다

흉악한 죄는 머리털을 뽑아 헤아린다해도 다 셀수가 없다

 

@역사적 평가

.전대의 권간(간신)으로 중종말년에 인종(세자)가 동궁에 있을때

인종이 후손이 없는지라, (윤원로)와 함께 헛된 소문을 퍼트려

동궁의 마음을 동요시켰는데, 중심에는 문정왕후가 있었다

에에 중종이 걱정으로 승하했다는 것이다

.동궁이 실화한것도 윤원형의 흉아하기 그지없는 행위로 보고있다

인종이 승하하자 大尹(윤임)을 핍박해 몰아내고,

그것도 부족하여 윤임세력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무고로 상소하자,

강력한 항의를 했던 많은 사림을 역적의 무리라며 죽인다

 

.문정왕후의 강력한 수렴청정으로 모든일을 내통하여 문종을 위협하고

제재하여 임금의 걱정과 분노함이 언행과 안색에 나타났다

윤원형은 궁인들에게 후하게 베풀어 아첨으로 정보망을 확장하였다

.중종이 내시에게 상의했던 내용이 즉시 문정왕후에게 보고된바 있다

외가친척이 대죄가 있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문정왕후가 크게 명종을 꾸짖었는데

(문정왕후)와 동생(윤원형)이 없었다면 어떻게 임금이 되었을까?”

이에 명종이 감히 대꾸할 수가 없었다

 

 

@모든 권한이 윤원형에게 집중되자, 명종은 내심으로 미워하였다

.20년간 파평윤씨에게 임금의 정사를 빼앗겨 버리고

중외가 몰려가니 뇌물이 문전에 가득하여 국고보다 더 많았다

.친형(윤원로)의 권세가 높아짐을 우려하여 윤춘년을 사주하여 죄목을 열거하여 죽게하였고,

.(정난정)을 몹시 좋아하여 본처의 독살의 변을 빚었다

첩의 자식(庶子)을 모두 사대부에 혼인시키고

본인의 아들에게 벼슬을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모든 재상들이 순응했으나, 임권은 끝까지 거절하였다고 한다

 

@乙巳士禍 주인공, 살육의 주동자

.생원시,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김안로에게 파직되어 유배되었으나, 김안로가 사사된후 복귀한다

.당시 김안로는 힘있는 권력으로 공포정치의 인물이었는데,

문정왕후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던중,

윤임(大尹, 문정왕후의 숙부)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후 사약을 받는다

.그러한 공로를 무시하고 윤원형은 문정왕후와 작당하여

윤임(大尹)을 숙청하는 모략으로 경안대원군(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으로 등극시키는 乙巳士禍 사건을 벌려 성공한다

 

@윤원형이 죽었다

.한많은 백성들이 집에 들어가 재물을 빼앗았으며,

조정에서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이탁(대사헌)과 박순(대사간)의 상소문 윤원형의 죄악 26가지

정권을 쥐고 임금의 위엄을 빌려 생사여탈을 제맘대로 행하여...

양기(後漢, 외척으로 무소불휘의 권력을 남용)의 가문보다 빛나고

동탁(後漢말기, 삼국시대의 무장)萬歲塢보다 화려하다...

(만세오: 동탁이 장안성 동쪽에 세운 보루)”

.관비의 소생을 첩(정난정)으로 세우고...

 

 

 

정난정(정경부인)

@정난정(鄭蘭貞 ~1565, 초계정씨)은 조선 중기의 외척이다

.명종의 넷째 외삼촌(영의정, 재상 윤원형)의 둘째 부인(애첩)이다

.윤원형의 부인(연안김씨)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사후 사림파에 의해 惡女의 대명사로 몰렸다.

.父親(정윤겸 초계정씨 草溪)은 도총부 부총관을 지냈고,

정난정은 부친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한성부 출신 서녀였다.

.母親은 본래는 상민이 아니었으나, 관비 신분이었다

난신에 연좌된 부녀로서 노비가 되었어 정윤겸의 집에 분배되었다.

정윤겸과 노비(반가 여성) 사이에서 庶女 신분으로 태어났다

.정난정은 어릴 때 집을 나와 기생이 되었다.

 

@젊은 시절, 문정왕후(小尹)의 동생 윤원형의 눈에 들어 첩이 된다

.1551(명종6),윤원형의 정처(김씨부인)를 몰아내고

자신이 정처자리에 앉았고, 자신의 자녀를 적자녀로 올렸다.

.많은 재산을 모으며 부귀를 누렸고, 문정왕후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권세로 상권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윤원형과 정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사돈)을 놓았다고 한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다

.1553(명종8), 직첩(職帖)을 받아 외명부 종1(貞敬夫人)이 되었다

.윤원형이 상소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으며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정난정은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적극 추천하여 총애받게 한다.

.봉은사 승려, 보우(普雨)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선종판사(禪宗判事),

병조판서에 오르게 하여, ~(禪敎) 양종이 부활되고,

.도첩제도(度牒制度)가 다시 실시되어, 잠시 불교가 융성하였다.

 

@을사사화 장본인 윤원형이 이조판서에 오를 때 정부인이 되고,

.사실상 윤원형의 정치적동지이자, 모략가, 책사로 봐야한다

.의정부 우의정~영의정으로 등용될때 정경부인으로 작호가 올랐다.

.정경부인으로 오른 후 궁궐에 자주 들어 명종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반대도 극심하였고 정난정의 후원자인 문정왕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1565, 문정왕후가 죽었다

.승려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가 참형을 당하고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받아 본래 신분인 천인(賤人)으로 강등되었다.

.사림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남편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었으나 윤원형의 적처였던 김씨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서얼출신으로 정경부인으로 진출한 전무후무한 입지적인 여인이다

권력을 농단한 천하의 요부로 낙인은 남겼으나 서얼허통법으로 혁명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문정왕후가 죽은뒤,

.윤원형의 본부인(연안김씨)의 계모 강씨는 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했다며 의금부에 고발하였다.

.윤원형의 장모(본처의 모친, 김씨)가 상소하였다

정부인을 쫓아내고... 우리 딸이 매우 굶주려 정난정을 찿았는데, 구슬(여종)을 시켜음식에 독을 풀어...”

.정난정의 종들을 추국받던중 모두 죽었는데,

.명종은 대신들의 정난정에 대한 추국할것을 상소하였으나

종들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추국을 허락할수 없노라...”

.이 사건으로 점차 사대부의 공격이 심해지자,

1565, 몸에 지니고 있던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사후 사림파에 의해 악녀의 대명사로 몰렸다.

사대부는 정난정을 조선 질서를 어지럽힌 타락 여성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구전과 민담을 통해 작품과 희극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정난정의 야사

.윤원형의 본처를 독살시킨 직후, 등창이 심하였다

.의원(송윤덕)은 허리()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환심을 받았는데,

.정난정은 불심이 매우 깊은지라 절에서 공양을 할적에는

미모의 여인을 뽑아 윤원형과 동침을 시켜준것이다

.그사이 의원은 홀로 별실에서 거처하였는데,

밤이면 경계하는 방울을 울려 의원(송윤덕)과 간통한 것이다

.정난정의 투정이 야릇하다

여러 의원들의 침은 통증을 참을수 없지만,

오직 송윤덕의 침(살곶이)만은 아프지 않았다...”

 

@정난정이 죽었다

.묘지: 파주군 교하면 당하리 산 4-20번지(, 당하동 산4-20번지)

.윤원형과 본부인(연안김씨)이 매장된 묘소 뒤쪽에 매장되었으며

비석없이 전하다가 조선이 멸망한 뒤에 비석이 세워졌다.

.자신이 문정왕후의 측근인 점을 이용하여,

문정왕후에게 서자, 서녀도 능력있는 인물을 등용할것을 건의하였다

.정난정은 평소 독약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나를 잡으로 올것이다... ”

.급부도사가 평안도 장수를 압송하던중,

윤원형의 유배지 부근 역(찰방)에서 말을 갈아타는 것을

윤원형의 집종이 목격하고 지체없이 보고하였다

도사가 금방 오고있다...” 보고받은 윤원형은 울면서 어쩔줄을 몰랐다

.정난정은 남에게 제재를 받느니, 스스로 죽음만 못하다...”

 

@항재 정종석의 고모이다

.6조판서를 지낸 29명중의 한명이며,

29명 중에서 5명이 청백리에 포함되어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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