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7. 큰사랑라이온스클럽 오교일 조문(노원 을지병원)
광해군과 이원익, 인조반정
광해군과 이원익, 인조반정
1.광해군(15대, 1575~1641)
@선조 후궁 공빈김씨의 아들로 태어난 “절반의 제왕”이다
.壬辰倭亂에 의주 피난을 떠나면서 선조는 分朝을 단행하게 된다(광해군을 왕세자에 책봉하였다. 당시 18세)
.선조 유언에는 광해군을 지목하면서 “兄弟 友愛”를 강조하였다
.선조 외교정책은 오직 再造之恩(재조지은)만을 강조하였는데,
이유는 망해가는 조선을 구해준 明나라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다
.선조 정비가 사망하자, 인목왕후(공빈김씨)의 중전으로 간택하여
불운의 영창대군이 출생하여 내유외환이 시작된다
@광해군 즉위(1608)
.대북파(정인홍, 이산해, 홍여순)은 소북파(영의정 유경영)를 몰아낸다
.소북파(김국진, 남이공)는 반역죄(영창대군 옹립)로 잘라내면서
.소북파는 홍여순(대북파, 1599 선조32년)의 대사헌 임명을 반대한다
.東人이 南人~北人으로 갈라서고, 南人이 몰락한다(서애 류성룡)
北人이 집권하면서 대북파 집권은 소수세력으로 개혁 성향이었다
2.계축사옥(1613년. 광해군5년)
@銀商 강탈 살인사건에서 서얼(7명)을 체포한다
.김계남의 역모고발로 영창대군을 강화도 유배후, 증살(강화부사)
.폐모살제(인목대비 김씨의 서궁/경희궁 석어당에 유폐), 도덕상 훼손
.중립적 외교 실패(명, 의리론 무시), 오랑케 유대강화로 비난을 받고
.왕권강화 차원으로 궁궐공사를 강행하였는데,
인왕산 기슭의 경덕궁(경희궁)+인경궁(서울고)을 건립한다
.선조 피난시, 정릉동 행궁을 이용하였으며
임진왜란 종료후, 창덕궁 보수공사를 하게되었기 때문이다
@江邊七友의 七庶之獄(1618, 광해군5년)
.7명 서출의 恨으로 정계진출을 상소(여강, 竹林七賢을 본떠...)
.허균은 솔직, 금욕강조, 서출등용 촉구를 상소하였다
.癸丑禍獄(계축화옥)은 대북파가 일으킨 七庶之獄 사건이다
@박응서의 거짓자백으로 폐모살제(영창대군, 인목대비)
.왜 상인을 죽이고 돈을 빼앗았나? ☛거사 자금이 필요했다
.무슨 거사인가? ☛영창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했다
.누가 주도한 거사인가? ☛인목대비의 아비 김제남이다
.영창군을 옹립후 계획은? ☛인목대비의 수렴청정을 이루려 했다
.훗날, 인조반정후 “이이첨이 조작했다” 하여 이이첨도 숙청된다
@허균의 인생역정
.허균은 七庶의 옥(서양갑, 심우영...)은 혁명이 들통났을때,
庶子들이 友情으로 감싸줘서 일시동안 살아 남았지만
.현응민의 거사벽보를 南大門에 붙이다가 체포되어
이이첨(친구)에게 부탁하여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庶子, 武士, 僧侶들의 혁명실패로 허균도 處刑된다
.허균의 “홍길동전” 혁명적 소설(1611,광해군)의 주제는
“적서차별의 철폐, 탐관오리 제거”를 강조하는 본인의 처지와 똑같다
3.광해군의 멸망(1623년, 인조반정 능양군)
@인목대비의 복귀
.내시의 등에 업혀 궁을 탈출하던중 체포되어 경희궁에 잡혀가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는다
36개항목의 실책을 낭독하여 광해군으로 강등된다
.인조(西人 정권)는 외교실패로 병자호란을 겪는다
.光海君(북인)가 강화도 유배되었을때,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아들은 탈출실패로 처형되고, 왕비는 끝내 자결해 버린다
.광해군은 활동력 좋아 유배(19년)에 적응하여 장수하였다
(제주로 이배되어 비참하고 지루한 즉음을 맞는다)
@광해군 업적(중립 외교정책)
.대동법, 호별~토지 면적기준 세금제도가 시작되지만
효종시대에 정착된다(김육)
.광해군의 명으로 동의보감(허준)을 편찬하였고,
.중립적 실리 외교정책(1618년, 명나라 파병요청에 융통성있게 지원)
강홍립/역관(어사통사), 사르흐 전투에서 후금에게 투항(1619년)
4.광해군 정권의 일등공신 내암 정인홍(남명 조식학파)
@폐모살제를 주동하고, 끝까지 광해군을 지원하여 승승장구한다
.東人을 탄핵하여 송강(정철), 윤두수를 축출시켰으며,
.南人 서애(류성룡)도 퇴출시켜 광해군을 돕는다
.조선5현 선정에 스승(남명 조식)이 제외되자, 불만의 상소를 올리며
퇴계(이황)와 일두(정여창)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다가
지방유생들의 집단 항의상소를 받아 혼쭐난바 잇있다
.壬辰倭亂에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참여한뒤 낙향한적도 있다
.훗날, 인조반정으로 유배되어 비참한 최후(극형)를 맞는다
@동강 김우옹(성주 출신)
.내암 정인홍이 폐모살제를 주동하여 광해군의 왕권강화의 후환으로
훗날 禍를 우려하여, 고향으로 낙향하지 않고 청주에 정착하여 정인홍(스승)과 결별해 버린다다
@동계 정온
.스승(정인홍)과 결별하였으나,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인홍의 극형을 받은뒤 장례를 치러준다(제자의 도리)
.거창 모리재의 주인이며 스승은 갈천(임훈)이다
.제주5현단, 추사 김정희가 유배해제후 한양으로 귀경길에
경남 거창을 직접 찿아와 忠臣堂 현판을 남긴바 있다
.丙子胡亂에 南漢山城에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하려 하였을때 적극 반대하여 활복을 시도하였다
.훗날, 4대후손(玄孫) 정희량의 반란에도 충심을 인정받아 살아 남았다
5.인조반정(1623. 3.13)
@西人시대 개막되면서 대북파를 대대적으로 숙청을 시작한다
.인조는 홍제원에 반란군을 집결~세검정~창의문~창덕궁 급습하였다
.당시 훈련대장의 협조(이흥립)로 궁궐을 순식간에 장악하였다
.이복형제 능양군(인조)의 동생(능창군) 처사약 “신경희 옥사”
@이괄의 난(1624, 인조2년)은 반정공신의 논공행상의 불만 때문이었다
.인조는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한다(임절미 유래?, 쌍수정 칭호 유래?)
6.인조반정의 공신
@이귀(李貴)의 딸(이예순)
.이귀(인조반정의 공신)의 동료 유몽인(어우야담)
.이예순은 김자겸과 혼인(인조반정 공신 김자접의 동생)
.불교심취(9년간)하여 깨달음 득도(他心通, 타심통)
.몸에서 향내를 뿜어내고, 영묘한 광채를 보였다
.남편과 서얼출신(오언관)의 교분으로 불교공부에 매진한다
.김자겸이 병들어 사망하자, 오언관과 덕유산에 출가한다
.대나무집을 짓고 수행하던중, 박치의로 오인(반역사건의 주인공)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어언관은 국문으로 사망하고, 이예순은 투옥된다
광해군 대동법, 이원익(발호치미 跋胡疐尾)
@“광해(15대왕)” 최근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 영화이다
.정치적 쟁점은 대내적으로 대동법(大同法) 실시,
.대외적으로 후금(後金)과 명(明)나라를 둘러싼 외교적 선택이었다.
.대표적 개혁정책 대동법은 세법이 갖는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시행하지 못한것은 지주의 세금 부담이 강화되는 세법이기에
당시 기득권층인 지주들의 저항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대동법 추진에 이원익(李元翼:1547~1634) 관료의 힘도 컸다.
.이원익은 선조~광해군~인조(3대)에 걸쳐 6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폐모론(廢母論)을 영의정 오리 이원익(李元翼)이 강력히 반대했다.
.홍천(洪川)으로 귀양, 여주(驪州)로 이배(移配)되어 10년간 고생했다.
인조반정 당일, 인조는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다시 불렀다.
반정직후, 민심이 안정되지 않아 여론이 흉흉했다.
.이원익이 부름받아 가마타고 동대문으로 들어서는것을 본 백성들이 “완평 어른께서 오셨다!”며 기뻐했다.
동요하던 민심이 즉시 안정되었다.
@훗날 임금이 국가의 원로로 높여 그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자,
.이를 축하하는 잔치에서 이식(李植)이 하례하는 시를 올렸다.
“풍운의 큰 운세 되돌아오니, 조정에서 원로에게 예를 표하네.
서울에선 다투어 절을 올리니, 동쪽 살며 오래도록 고생하셨지.(風雲回泰運, 廊廟禮高年. 自洛爭加額, 居東久跋前)”
“발전(跋前)”은 “시경” 빈풍(豳風) “낭발(狼跋)”에서 나온 말이다.
“이리가 나아가려다 턱을 밟고, 물러서려다간 꼬리 밟아 넘어지네.
공은 큰 미덕을 사양하시니, 신으신 붉은 신이 편안도 해라.”(狼跋其胡, 載疐其尾. 公孫碩膚, 赤舃几几)
@주무왕이 죽고, 성왕(成王)이 즉위했다 *한양별곡(허유,소부)참고
.주공(周公)이 성왕을 도와 섭정(攝政)을 했다.
.주공이 장차 어린 성왕을 밀어낼 것이란 유언비어가 퍼져, 성왕까지 주공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가만있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주공은 동요없이 동쪽으로 옮겨가 평상시와 다름없이 태연자약하였다.
“낭발”이란 詩는 환난에 임한 주공의 늠연한 태도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다.
.물러서면 배신자라 하고, 버티자니 이렇다 할 명분이 없다.
@발호치미(跋胡疐尾)는 진퇴양난(進退兩難)과 같은 뜻으로 쓴다.
.호(胡)는 늙은 짐승의 늘어진 턱밑 살로 멱미레라 부른다.
.늙은 이리가 나아가려다 제 멱미레를 밟아 고꾸라지고,
.뒤로 물러나려다 제 꼬리에 밟혀 자빠지고 만다는 뜻이다.
@광해군은 壬辰倭亂에 세자가 되어 분조(分朝)를 이끌며 전란의 수습에
.많은 공을 세워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선조 후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출생으로 왕위를 계승하는데 있어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608년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즉위 초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장자도 적자도 아닌데다가 형 임해군(臨海君)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건재해 있어서, 즉위 이듬해에서야 명(明)나라로부터 정식 왕으로 승인받을 수 있었다.
.광해군을 지지한 집권 북인세력도 서인이나 남인에 비해 권력기반이 안정적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왕실의 적통이 아닌 왕으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고
안정된 정국운영을 위해 무엇보다 민심 확보가 우선이었다.
.당시 광해군이 내린 전교(傳敎)에는 이러한 인식이 잘 나타난다.
@광해군일기(1608년, 즉위 원년)
“우선 목전의 긴박한 일로 말하면, 백성들의 일이 매우 안쓰럽고
측은하기 그지없다. 산릉(山陵)의 역사(役事)와 조사(詔使)의
사행(使行) 때 드는 비용을 털끝만한 것도 모두 백성들에게서
걷어내고 있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만약 위로하고 구휼할 대책을 서둘러 강구하지 않는다면
방본(邦本)이 먼저 동요되어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이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니, 경들은 백방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조금이나마 은혜를 베풀도록 힘써야 한다.
예컨대 해묵은 포흠(逋欠), 급하지 않은 공부(貢賦), 군졸들의
도고(逃故), 세도를 부리는 호강(豪强)들의 침릉(侵凌)은 물론
이밖에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모든 폐단은 일체 견감하고 개혁시켜
혹시라도 폐단이 되는 일이 없게 하라.
공상(供上)하는 방물(方物)과 내수(內需)의 일에 대해서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감하겠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에서 소회를 다 진달하게 하여 가언(嘉言)이
감춰지지 않게 되면 더없는 다행이겠다.
이런 뜻으로 대신에게 말하라”
@광해군은 당시 백성들에게 커다란 부담이었던 선조의 산릉 역사(役事),
.중국 사행 비용 등을 비롯하여 부세의 각종 포흠이나 공부(貢賦),
군역, 토호들의 침탈, 진상 방물, 내수 비용 등을 감면해주거나
개혁하도록 하면서 아울러 국정쇄신책에 대한 광범위한 의견수렴도 꾀한 것이다.
.광해군 즉위 초의 현안은 민생안정을 통한 국정운영 기반의 확보였고,
특히 공물 변통은 백성들이 실제 체감할수 있는 중요한 개혁책이었다.
.광해군은 영의정 이원익의 의견을 받아들여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광해군일기의 기록, 대동법 실시의 배경과 함께 이원익이 주도적인 역할
“선혜청을 설치하였다. 전에 영의정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貢物이 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어, 기전(畿甸)의 경우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매년 봄ㆍ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전(田) 1결당 봄ㆍ가을에 8두씩 거두어
본청(本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두 가운데 매번 1두씩을 감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一路) 곁의 고을은 사객(使客)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해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山陵)과 조사(詔使)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하니, 따랐다.
그런데 전교 가운데에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선혜청이라 이름 하였다. 의정(議政)을 도제조로 삼고,
호조 판서가 부제조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낭청 2원(員)을 두었다.
이후 수령이 적임자가 아닌 경우에는 불법으로 더 거두어들여도
금하지 못하였고, 또 연호(烟戶)를 침해하더라도 법의 취지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전의 전결에 대한 역(役)은 이에 힘입어 조금 나아졌다”
@이원익의 주장은 대동법을 전담할 관서로 선혜청을 설치하고
.그에 걸맞은 관원을 배치한 다음 결당 쌀 16두를 봄ㆍ가을로 나누어
8두씩 징수하며 이를 봄ㆍ가을로 7두씩 수납, 경기도가 부담한 일체의
경납물가(京納物價)로 사용하여 방납의 폐단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또한 봄ㆍ가을로 거둔 1두씩은 각 군현에 유치하여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충당케 하는 방안이었다. 선혜청은 당시 물가를 참작하여
방납인에게 급가(給價)하고 방납인은 지정된 물품을 각사에
납품토록 하며, 산릉ㆍ조사의 역을 제외하고는 쌀 16두 이외에
일체의 징수를 허용치 않는다는 것이 이원익 주장의 핵심이었다.
.그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지주들의 저항으로 오래도록 실시되지 못한
대동법은 광해군의 개혁 의지와 현실을 진단한 이원익의 노력으로
그 빛을 보게 되었다.
.조선중기 학자 이식(李植)이 쓴 이원익의 시장(諡狀)에도 대동법 실시에
큰 기여를 한 이원익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식의 글
“광해군이 육경(六卿)을 자택으로 보내 백성의 일에 대해 물어 보니,
공이 선혜청을 설치하여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매년 봄ㆍ가을에 백성의 전지(田地) 1결당 각각 백미 8두씩 거두어
모두 경고(京庫)에 납부하게 한 다음, 때맞추어 각사(各司)의
사주인(私主人)에게 나누어 주어 스스로 상공(上供)하는
공물을 사서 바치게 하되, 시장 가격의 고하를 고려하여 여유가
있게 자금을 내줌으로써 사주인으로 하여금 자급하게 하였다.
이밖에는 한 자의 포목이나 한 되의 쌀이라도 민호(民戶)에서
추가로 징수하지 못하게 하여, 사주인이 방납하는 행위를 통해
열 배의 이익을 독차지하게 되는 폐단을 혁파하였다.
그 조항들이 참으로 정밀하여 앞으로 계속 시행할 만하였다.
광해군이 우선 경기 지방에서 시험해 보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거실(巨室)과 호민(豪民)과 사주인들 모두가 방납으로
얻는 큰 이익을 잃자 백가지 방도로 저지하고 소요를 일으켰다.
광해군이 여러 번 이를 그만두려고도 하였으나,
경기 백성들이 다투어 그 타당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행해지면서도 폐단이 없다”
@이원익은 선조~광해군~인조시대의 대표 관료로 6번 영의정을 지냈다
.평소 검소하게 살아 청백리(淸白吏)에 오를 정도로 성품과 능력에서
뛰어난 인물로써 관료이자 학자로써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선조는 죽음을 앞두고 광해군에게 말하였다
“여러 신하 중에 오직 모(某:이원익)에게만 큰일을 맡길 수 있다.
나는 후한 예로 그를 대우하지 못하였다.
(너는) 성의를 보여야 그를 쓸 수 있을 것이다
(群臣惟某可任大事 予不能用優禮以待 示以誠意 可以爲用也)”
.이 말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선조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원익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부친의 뜻을 이어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이원익은 남인이라는 소수 정파에 속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대동법을 강력히 추진하였고 붕당의 폐단 극복과 능력위주의
인사정책 등 국정전반에 걸친 과감한 개혁책을 주장하였다.
.이는 즉위 초 민심수습과 국정쇄신책으로서의 의미 뿐 아니라
대북 세력의 일방적인 정국운영을 견제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학자의 면모보다 학문적 능력을 실무 정책에 반영한 관료로의 성향이다
관료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그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았다.
관료로의 실무능력보다 학파적ㆍ당파적 입장을 중시하며
조선 중ㆍ후기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국방의 다양한 현안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수습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당파에 기울지 않고 국가의 현안 해결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의 합리적인 처신은 3대에 걸쳐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맡는‘진기록’을 세우게 했다.
.이원익과 같은 인물이 그리운 것은 국익이나 민생보다는 명분이나
이념, 당론이 우선시되는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 때문은 아닐까?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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