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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갑총재(2020-2021)

2020-0810. 중앙대병원 MOU 업무협약

by 조흥식 2023. 12. 23.

2020-0810. 중앙대병원 MOU 업무협약

고양이에게 생선을(칠왕의 난, 팔왕의 난, 이방원 왕자의 난)

 

 

 

 

 

고양이에게 생선을(칠왕, 팔왕, 왕자의 난)

@임광택(林光澤, 1714~1799), 고양이를 꾸짖다(責猫 책축)

不捉穴中鼠 常偸盤上肉 無肉餒我腹 有鼠竊我粟

養汝要捉賊 奈汝自作賊 快意一痛打 遠逐大路側

佪偟終不去 暗入床下伏 狡黠良可惡 題詩寄深責

불착혈중서 상투반상육 무육뇌아복 유서절아속

양여요착적 내여자작적 쾌의일통타 원축대로측

회황종불거 암입상하복 교힐양가오 제시기심책

 

@해설

쥐구멍의 쥐는 잡지 않고서 늘 소반 위의 고기만 훔쳐 먹는구나

고기가 없으니 내 배는 굶주리고 쥐가 있으니 내 곡식 도적질 당하네

너를 기르는 건 도적을 잡으라는 뜻인데, 어찌하여 너 스스로 도적이 되느뇨

속 시원하게 한 대 때려서 멀리 큰 길가로 내쫓았더니

빙빙 돌며 끝내 가지 않다가 몰래 마루 밑으로 들어와 숨었네

너의 교활함은 참으로 밉거니와 시를 지어 깊이 꾸짖어 보노라

 

@고양이를 기르는 이유는 쥐를 잡으라는 것인데,

저놈의 고양이는 잡으라는 쥐는 잡지 않고 늘 밥상의 고기만 노리고 있다가 훔쳐 먹습니다.

그 덕에 내 배는 고프고 창고의 곡식은 축이 나니,

그 꼴이 얼마나 미우면 저놈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시원하게 한 대 때려서 내쫓았을까요.

그런데 고양이란 놈, 멀리 가지도 않고 주위를 빙빙 돌다가 어느 틈에 마루 밑으로 들어와 숨어버립니다.

 

@네 본분이 무엇인지 좀 알고 제대로 행동하라는 뜻이다

.고양이만 꾸짖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쉽게 알수있다.

.어려운 백성을 보살피라고 높은 자리에 앉혔더니

정작 백성의 뒤통수나 치고 협박하고 뜯어내고 ……

.제 본분을 망각하고 권력, 지위를 악용하여 자기 잇속만 챙기는 인간들

고양이라면 차라리 시원하게 한대 때려주기라도 하련만...

 

 

 

팔왕의 난(八王之亂)

@전란에 참가한 8명의 왕

1)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선제 사마의의 5, 무제 사마염의 숙부

2)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 무제 사마염의 5

3)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선제 사마의의 9, 무제 사마염의 숙부

4)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제헌왕 사마유의 아들, 무제 사마염의 조카

5)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 무제 사마염의 16.

6)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무제 사마염의 6.

7)하간왕(河間王)사마옹(司馬顒): 안평헌왕 사마부의 손자, 무제 사마염의 6

8)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사마욱의 손자, 무제 사마염의 6촌, 고밀문헌왕 사마태의 차남,

*사마의: 조조(), 조비의 책사

 

@서진(西晉)의 제위 계승문제를 둘러싼 황족들의 대결이 내란으로 번진다

.內亂의 영향으로 西晉(서진)은 멸망에 이르렀고,

이후 나라가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250년간 전란의 시대를 말한다

.진무제(사마염)는 전국을 통일한 후,

.사마씨의 천하보전을 위해 전국에 자식, 형제, 조카들에게 분봉해 주었다

뭇 별들이 달을 옹위하듯 자식, 형제들이 황실 보호를 원했으나

.진무제(사마염)의 생각과는 크게 변질되어 간다

.군권을 장악한 각지 번왕들의 야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서

끝내 큰 변란(팔왕의 난)을 초래하게 되었다.

 

@西晉의 초대 황제였던 진무제(武帝, 사마염)의 사망 이후,

.진무제의 아들 진혜제(惠帝, 사마충)가 즉위했으나 암우한 제왕이었기에

정치는 양준(楊駿)과 진무제의 황후양씨 일족이 독식하게 되었다.

.조정 대권을 쥐고 최고 권력에 오른 태후양씨의 父親(양준)

권모술수를 써서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밀어냈다.

.진무제(사마염) 황후가문 양씨에 대하여.

황후가씨 가남풍(賈南風)과 진나라 종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진혜제(사마충)이 즉위한 후, 팔왕의 난이 시작되는데,

.진혜제(사마충) 황후가씨(賈氏)는 양씨를 조정에서 추방하고 자신이 실권을 잡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진혜제(사마충) 황후 가남풍은 종실의 번왕들에게 상경하여

양준(진무제 사마염의 황후양씨)을 제거하라는 밀서를 내려보냈다.

.지방에 할거한 종실의 번왕들은 그러지 않아도 조정 대권을 쥐려는

야심을 가지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던 차라, 얼씨구나 하고 경성으로 올라왔다.

 

@황후가씨는 거대한 무력을 지닌 진혜제의 동생 楚王(사마위)와 협력하여

.낙양(洛陽)에 있던 양씨를 모두 죽이는 작전으로 시작된다

.밀서를 받고 가장먼저 초왕(楚王: 사마위 司馬瑋)이 상경하였다

혜제황후 가남풍은 즉시 진혜제(사마충)의 명의로 조서를 내려

양준(진무제 황후양씨의 부친)이 모반했다고 선포했다.

.초왕(사마위)는 황궁 경호대의 도움을 받아 양준을 잡아 죽이고

태후양씨 삼족을 멸하고, 양준의 심복 관원들도 모조리 목을 잘랐다

 

@황후양씨 가문을 조정에서 추방한 가씨의 정권이 들어섰다

.양준의 세력을 제거한 후 진혜제 황후(가남풍)는 정국을 안정시키려고

여남왕(汝南王 사마량)을 불러 황제를 보필하도록 했다.

.진혜제(사마충)의 대숙부였던 여남왕(사마량)에게 맡겼으나,

여남왕(사마량)은 황후가씨의 의도대로 정권을 운영하지 않았다.

.사마량(여남왕)도 권세욕이 강한 자라, 암암리에 초왕(사마위)의 군권을 앗으려고 획책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가남풍은 종실 왕들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예 모두 없앨 궁리를 했다.

.실망한 황후가씨는 진혜제(사마충)의 밀서를 이용해 사마위(초왕)사마량(여남왕)을 공격하게 만들고,

사마량(여남왕)을 궁지에 몰리게 해 자살하게 만들었다.

.황후가씨는 먼저 남편 진혜제(사마충)로 하여금 초왕(사마위)에게

밀서를 내리게 하여 여남왕(사마량)을 죽여버렸다.

그렇게 해서 황후 가남풍은 西晉의 대권을 틀어쥐었다.

 

 

@이용가치가 없어진 초왕(사마위)에게 토사구팽이 일어난다

.초왕(사마위)이 조정의 주요 대신(여남왕: 사마량)을 함부로 죽였다는 살해죄를 뒤집어 씌워서 죽여버렸다

.황후가씨는 자신의 지위를 안정화 시켰다.

 

@진혜제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황태자 사마휼(司馬遹)이 있었는데,

.황후가씨는 사마휼의 재능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사실 진무제는 아들 진혜제가 암우한 사실에 실망해서 황제제위를 양위할 생각이 없었다.

.무제는 손자(사마휼)의 재능을 인정해 진혜제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황후 가남풍은 아들이 없었다.

.황후가씨는 남자로써 만족스럽지 못한 진혜제와의 사이를 멀리하고,

낙양의 미소년을 모아 밤마다 자신을 시중들게 하고, 이용가치가 없으면 살해했다.

.황후가씨의 야심을 느낀 사마휼(황태자)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하였으며, 노점을 궁궐에 열 정도로 노력했으나,

황후가씨에게 모반 의혹을 받고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황후가씨는 조정의 대권이 남의 손에 넘어갈까 봐 우려했다.

.거짓 임신한 척하고 남몰래 여동생의 갓난아기를 자기 소생이라 했다

이후,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나중에 독약을 먹여 죽여버렸다.

그리고 안아온 그 아기를 태자로 삼았다.

.그 소식이 새어나가자 종실이 들끓었다.

사람들은 사마씨의 천하를 빼앗으려는 가황후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조왕(趙王, 사마륜 司馬倫)이 가장 먼저 군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궁으로 진격하여 들어왔다.

 

@300, 황후가씨에 의해 황태자(사마휼)은 살해당했으며

.조왕(사마륜: 진혜제의 대숙부, 사마량 여남왕의 동생)

진혜제의 종제(從弟)인 제왕(사마경)과 협력하여 진혜제의 칙서를 위조해 궐기했다.

.훗날, 황후가씨는 황태자(사마휼)를 살해한 죄를 물어 몰락하였다

황후가씨는 가씨일족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301, 조왕(사마륜)은 진혜제를 유폐하고 스스로 즉위하게 된다.

.조왕(사마륜)은 제왕(齊王, 사마경 司馬冏)을 폐위시키고

.황후가씨를 폐위시킨뒤, 곧 황후가씨를 독살시킨다

.당시 허창을 지키던 제왕(사마경)은 사마륜(조왕)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불만이 많았다.

.제왕(사마경)은 전국 각지에다 함께 군사를 일으켜 조왕(사마륜)토벌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조왕(사마륜)과 측근 손수(孫秀)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제왕(사마경)은 장사왕(사마애: 진혜제의 동생)

성도왕(사마영)과 하간왕(사마옹: 사마의의 조카의 아들)낙양에 소집시키다

.정권 탈취하려는 야심이 가득한 3: 성도왕(成都王, 사마영 司馬潁),

하간왕(河間王, 사마옹 司馬顒)이 제왕(사마경)과 연합 공격으로

조왕(사마륜)은 패배하였으며 결국 살해당했다.

 

@진혜제를 복위시켰던 제왕(사마경)은 정치실권을 자신에게 집중시킨다

.낙양에 들어온 제왕(사마경)은 조정 대권을 잡고 밤낮 주색에 빠졌다

.진혜제의 황태자 지명에도 독단으로 결정하기 시작하자,

.이때, 장사왕(長沙王, 사마애 司馬乂)가 반란을 일으켰다.

성도왕(사마영)과 하간왕(사마옹)이 장사왕(사마애)를 지지하였다

.제왕(사마경)은 장사왕(사마애)과 몇년을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여 목이 잘렸다.

.제왕(사마경)의 후임을 누구로 할것인가?를 두고 이해관계가 발생했다.

 

@제왕(사마경)을 죽인 장사왕(사마애)은 입궁하여 대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장사왕(사마애)은 혼자 조정을 독점하자, 하간왕(사마옹)이 불평하였다

.하간왕(사마옹)은 성도왕(사마영)과 연합으로 장사왕을 공격한다

장사왕(사마애)과 하간왕(사마옹)은 낙양 부근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렇게 쌍방이 어지럽게 싸우고 있을 때,

낙양성 안에 있던 동해왕(東海王, 사마월)이 장사왕(사마애)기습하여 불태워 죽여버렸다.

.이때 성도왕(사마영)이 낙양성 안으로 들어와 승상 자리를 차지하고 조정 대권을 틀어쥐었다.

 

@이제 성도왕(사마영)이 황태자이자 승상으로서 정치를 맡게 되었으나,

.낙양에 있는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성도왕(사마영)

하간왕(사마옹)의 부하 장방(張方)에게 낙양을 통치하게 하였다.

.서서히 성도왕(사마영)이 승자로서 정치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동해왕(사마월)이 가만 있지 않았다.

.장사왕(사마애)을 죽인 공로는 자신(동해왕)에게 있는데 ,

엉뚱한 성도왕(사마영)이 조정 대권을 독차지하니 불만이 많았다

.동해왕(사마월)은 진혜제(사마충)의 명의를 빌어 장사왕(사마영)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키는데, 동해왕(사마월)은 사마씨 일족인

예장왕(預章王, 사마직 司馬熾, 진혜제의 막내동생)도 합류한다

.예장왕(사마직)은 한때 사마영(성도왕)에게 패했으나,

흉노와 선비등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이번엔 성도왕(사마영)을 황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장사왕(사마영)은 진혜제를 데리고 낙양을 떠나 장안으로 도망쳤다.

.당시 장안은 하간왕(사마옹)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간왕(사마옹)은 도망쳐온 장사영(사마영)을 배제하고 자신이 진혜제(사마충)를 통제했다.

.결국, 나라 조정은 하간왕(사마옹)의 권력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해왕(사마월)은 낙양을 수호하던 張方과 하간왕(사마옹)을 공격하였다

.하간왕(사마옹)이 강화를 위해 나오자 그를 구속하였다.

.동해왕(사마월)은 왕준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왕준과 연합하여 관중을 공략한뒤,

계속하여 하간왕(사마옹)을 격파하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동해왕(사마월)은 진혜제와 동해왕(사마영), 하간왕(사마옹) 등을

모두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왔으며, 나중에 3명을 모두 죽였다.

.기어코 성도왕(사마영)을 살해한 동해왕(사마월)

진혜제(306년 사망)의 뒤를 이어 예장왕(사마직)

진회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그를 보좌하였다.

.황후가씨(진혜제)에 의해 황후양씨(진무제) 추방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팔왕의 난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307, 진회제 즉위(懷帝: 사마치 司馬熾), 연호는 영가(永嘉)이다

.황권을 빼앗기 위한 八王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매듭짓게 되었다.

八王之亂은 무려 16년간 나라를 전란의 도탄 속에 빠뜨렸으며,

八王중에서 7명이 죽어 국력은 형편없이 쇠약해졌다.

.팔왕의 왕들은 군사력의 강화를 위해 주변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장에 투입했다.

.이민족은 강력하다고 생각하던 西晉의 내부의 무력함과 약세를 느끼고,

제각기 독립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되었으며,

.손수, 장화, 양제 등 많은 인재와 무장들이 죽어 큰 혼란을 빚게 되었다.

.북방과 서부의 소수민족이 중원을 쳐들어왔고, 서진 왕조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304년 유연의 의해 전조가 건국되면서,

.중국 전지역을 포함한 거대한 내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칠국지란(七國之亂)

@바둑 한 판에서 비롯된 內戰

.한경제(漢景帝) 3(기원전154)

.오왕(吳王) 유비(?)는 초왕(楚王), 조왕(趙王), 교서왕(膠西王),

교동왕(膠東王), 치천왕(?川王), 제남왕(濟南王)과 결탁하여 공동으로 反亂을 일으킨다.

.도화선은 한경제 유계(劉啓)師父 조착(晁錯)에서 비롯된다.

 

@조착 삭번책(削藩策)”

.吳王등 제후()들의 봉지(封地)에 직접적인 威脅이 되었다.

.反軍에서 깃발을 내걸고, 兵力을 일으켜 조정을 압박했다

청주조착, 이청군측(請誅晁錯, 以淸君側

(“조착을 주살하여 皇帝의 측근에서 간신을 제거해 달라고 청하다)

 

@漢景帝(유계)는 장기판의 을 버려서 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가련한 조착은 이렇게 억울한 귀신이 된다.

.漢景帝(유계)는 조착과 원한이 있던 원앙(나라 宰相)의 계책을

받아들여, 시중을 巡察한다는 명목으로 恩師 조착을 동시로 유인하여 요참(腰斬)해 버린다.

.조착이 죽었으나 유비(吳王)는 반란군이 물러나지 않고,

스스로 동제(東帝)라 칭하며 皇位를 빼앗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하였다.

 

@칠국의 , 결정적인 원인은 육박(六博)”의 승부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역사상 바둑 한판으로 인하여 일어난 가장 유명한 내란이며,

조착은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장본인이다.

 

@吳王(유비)는 누구인가? “史記(오왕비열전)”

.吳王(유비)는 한고조(유방)의 형님(유중 劉仲)의 아들이며,

한고조 12(bc195)吳王에 봉해진 제후이다.

.당시 관상쟁이는 유방(한고조)에게 충고하였다

“50년후에 東南에서 반드시 이 일어날 것이다

오왕(유비)에게 反骨(반골)”이 있다는 뜻이다

 

@漢景帝(유계)의 태자시절(바둑놀이: 육박)

.나라의 世子가 경성으로 가서 漢景帝(유계)를 접견하였는데,

그 동안 태자(유계)가 함께 놀아주면서 육박놀이를 하였다.

.육박(陸博) 혹은 박()이라고도 하는데, 가장 오래된 바둑을 말한다

.출토문물에 기록된 육박의 구성물 기국(棋局, 棋盤), 바둑돌, (, 주사위), 박주(博籌)

*놀이방법은 대박(大博)과 소박(小博)의 두가지가 있다.

서한 및 그 이전에는 대박의 방법이었는데, ()를 잡으면 이기는 것이다.

육박을 하는 쌍방이 각각 자신의 바둑판에 6개의 돌을 놓아두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고, 나머지 5개는 ()”이라고 부른다.

()”6개를 사용한다다.

쌍방이 돌아가며 를 던져서, 의 수량에 따라 바둑돌을 옮기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상대방의 를 잡으면 승부가 난다.

.韓非子(한비자) “박자귀효, 승자필살효(博者貴梟, 勝者必殺梟)”

將棋板에서 을 잡아야 이기는 것과 비슷하다.

 

@육박을 좋아하던 태자(유계)나라 世子는 바둑판 결투를 벌인다.

.유비(吳王)의 아들(世子)이 모신 스승은 모두 나라 사람이었는데,

性格이 광망하고 오만하며 호승심이 강했다.

.바둑놀이를 하면서 서로 이기겠다고 싸우다보니 태도가 좋지 못하고,

말도 불손하여 황태자(한경제, 유계)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계(한경제)는 화가 내면서 바둑판으로 나라 世子를 내려친다.

급소를 맞았는지 世子는 갑자기 죽어버린 것이다.

 

@한문제(5)世子의 영구(屍身)나라로 돌려보내 葬事지내게 한다.

.유비(吳王)는 분노하여 소리쳤다

天下는 유씨일가의 天下이다. 長安에서 죽었으면 長安에서 묻어라.”

사람을 시켜 世子屍身(영구)를 다시 長安으로 돌려보낸다.

.吳王(유비)와 유계(한경제)간의 怨恨은 맺어지고,

吳王(유비)에게는 謀反을 일으키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吳王(유비)는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을 핑계로 가을에 長安으로 가서 皇帝를 배알하는

를 행하지 않고 使臣을 보내어 참가하게 하였다.

.나라 제후()은 매년 皇帝를 만나서 業務報告를 하여야 했다.

나라 시절부터 시작된 제도는 天子와 제후간의 약속인 셈이다

.제후가 감히 皇帝를 배알하지 않는것은 죽을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孟子

제후가 天子를 배알하는 것을 술직(述職)이라고 한다.

한번 배알하지 않으면 爵位(작위)를 강등시키고,

두번을 배알하지 않으면 그 땅을 빼앗고,

세번을 배알하지 않으면 軍隊를 끌고 가서 친다.”

 

@吳王(유비)는 이미 죽기를 각오한 행동이라고 볼수있다.

.조정은 나라 使臣을 구금하고 심문했다.

.使臣은 그저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왕(유비)世子를 잃고서 마음속 두려움으로 병이 들었다는 것이다

.한문제(5)는 마음이 인자하였다

吳王(유비)가 아들을 잃은 고통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오왕(유비)를 회유하려는 생각에서 용서하였다

오왕(유비)에게 선물을 하사하였다

궤안(벽에 세워놓고 몸을 기대는 방석)과 괴장(拐杖, 지팡이)”

한문제는 파격적인 배려심으로 아량을 베풀었다

유비는 나이가 많으니 다음부터는 배알하러 오지 않아도 좋다

.사건은 이렇게 평정되었고, 吳王(유비)는 그후 20년간 조정에 皇帝를 배알하러 가지 않는다.

 

@吳王(유비)의 유계(한경제)에 대한 怨恨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복수하겠다는 마음과 모반을 일으키겠다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항상 유계(태자)의 자리를 빼앗겠다고 생각을 했다

유씨의 天下이니, 皇帝도 유씨들이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

 

 

 

@나라는 구리()가 생산되는 바닷가였으며 소금을 만들었다.

.오왕(유비)는 전국각지의 유랑민들을 끌어모아 동전을 만들고,

나라에서 만든 동전이 전국으로 유통되어, 나라의 국력은 중앙조정에 필적할 만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여 오나라는 국내에서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면 오왕(유비)는 그들에게 대가를 주었고, 별도로 사람을 사서 일을 시켰다.

명절에는 돈을 풀어서 선비들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왕(유비)나라에서 명망이 아주 높았다.

거병시에도 유비가 명을 내리자 금새 20만명이 모여든다.

.오나라로 도망쳐 온 인접국가 도망범들도 모두 유비가 길렀다.

주변국가의 관리들이 오나라로 들어와서 체포하려고 하면,

오왕(유비)은 이를 막아주었기 때문에 유비의 은혜에 감격하였으며,

일단 유사시, 오왕을 위하여 기꺼이 견마지로를 다하려 했다.

유비는 금은보물로 다른 제후()들과 대신들을 회유했다.

.이와같이 오왕(유비)는 계속하여 모반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문제(5) 재위시, 오왕(유비)이 경거망동하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 한문제는 자신(오왕 유비)에게 잘 대해주었고,

.둘째, 反亂을 일으킬 적합한 이유가 없었다.

.당시 조착은 한문제에게 수차례 상소를 올렸는데,

오왕(유비)의 죄를 물으라고 요청하나,

한문제는 차마 유비를 징벌하지 못하여 큰화를 키운셈이 된것이다

 

@漢景帝(유계)가 즉위하였다

.조착의 예감은 일찌감치 유비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므로

하루빨리 삭번(削藩, 번국을 없애는 것)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조착은 漢景帝(유계)에게 충고하였는데,

吳王(유비)는 오늘 삭번해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삭번하지 않아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삭번하면 반란을 빨리 일으키고, 도 작지만,

삭번하지 않으면, 반란이 늦어지지만, 는 더 클 것이다.”

 

 

@조착의 뜻은 단호하였다

황제(漢景帝 유계), 당신이 유비의 아들(世子)을 때려죽인 이후로,

오왕(유비)反亂을 일으키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다.

반란을 일으키는게 늦어지면 질수록 그 는 더욱 커진다.

아예 빨리 반란을 일으키도록 한 후에 진압하는게 낫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칠국의 난의 도화선은 육박이었음을 알수있다.

.조착의 역할이라는 것은 그저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것이다.

 

@서한에 발생한 七國은 어떻게 진압되었는가?

.최종적으로 漢景帝(유계)의 동생인 양왕(梁王) 유무(劉武)전력을 다해서 막아내고,

.태위 주아부(周亞夫), 대장군(두영)36만명 군대를 이끌고

오왕(유비) 반군의 식량통로를 단절시키고, 3개월만에 평정한다.

 

 

 

王子(이방원의 擇賢)

@五賢帝(오현제 good emperor)는 폭군(tyrant) 황제로부터 선택받은

.후계자로써 어진정치로 존경받은 성공한 황제를 말한다

.훌룡한 후계자를 선택한 승계방식으로 위대한 제국이 탄생하지요

네르바 Nerva는 죽음앞둔 늙은이...

트라야누스 Trajan의 선의의 선택

하드리아누스 Hadrian 조카뻘 친척으로 조카딸과 결혼시켜...

후계자 안토니우스 피우스 Antoninu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마의 쇠퇴가 시작된다

 

@중국()에서도 장자를 고집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35명 아들중에서 옹정제(4째아들)를 선택하였고,

옹정제의 아들, 건륭제는 15번째 아들이었다

.堯舜皇帝, 임금은 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도전은 의안대군(방석, 8)을 세자책봉에 직접 관여하자(1392)

.1차 왕자의 난: 세자(방석)를 유배후 처형시킨다(태조7)

.2차 왕자의 난: 4째형(방간)을 주살한다(1400, 태조9)

.1째형(방우)은 병사하였고,

.2(방과,2대 정종)는 애주가,나약..양위받아

.태조(이성계)는 함흥으로 떠난다(1408년 사망, 74, 동구릉)

 

@이방원의 擇賢(택현)으로 세종대왕(3, 충녕대군)이 등장한다

.이방원의 무리수/악역(조선건국,왕권강화,완벽한 후계자 완성)의 성공

.고려말 충신 정몽주, 정적을 제거하였다(개성 선죽교)

.정도전은 신권중심주의(臣下), 議政府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면서

단양 삼봉태생(고향; 봉화)으로 종로구청 터에서 거주했는데,

당시 애첩의 집에서 급습을 받아 죽는다(, 한국일보 터)

.이방원(5째 아들)의 왕권중심주의와 세자책봉으로 격돌하는데...

.친모(신의왕후 한씨, 1331~1391, 권세가문)6형제 제외되고,

.계비(신덕왕후 장씨, ~1396,권세가문)2형제(방번, 방석)...

貞陵의 기초석을 해체, 홍수방지 청계천 교량 기초석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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