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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위원장 동우회(2015-2016)

2015-1111.김영일 지대위원장 김밥집 개업

by 조흥식 2023. 3. 29.

2015-1111.김영일 지대위원장 김밥집 개업(별내)

고전으로 보는 음식의 재발견

 

 

 

고전으로 보는 음식의 재발견

@가을 전어도 이제 거의 끝 무렵이다.

전어철만 되면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

말을 지겹도록 듣게 되는데, 이 속담에 대해 한 번쯤 곱씹어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있다.

가을 전어구이가 그만큼 맛있다는 뜻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궁금한 것은 오히려 며느리가 왜 집을 나갔느냐는 것이다.

집 나갔다는 표현으로 보면 무단가출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짐작건대, 시집살이가 너무 힘들었거나 고부간의 갈등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돌아오면 시어머니한테 엄청 꾸지람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돌아온다는 것은 나중에 삼수갑산을

갈지언정 전어구이가 그만큼 먹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소리다.

이쯤에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다.

전어가 그 정도로 맛있는 생선일까?

입맛 따라 다르겠지만 혼날 각오를 하고 돌아와 먹을 만큼은 아닌것 같다.

게다가 그렇게 맛있으면 밖에서 사 먹으면 된다.

 

@며느리가 돌아온 이유는

전어구이의 고소함 이상의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어는 돈 전()’ 자를 써서 전어(錢魚).

생김새부터 돈과는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청어목 청어과의 작은 생선을

하필 돈과 연결지어 전어라고 이름 지었을까?

전어 이름속에 전어가 왜 특별한지를 알려줄 비밀의 열쇠가 숨어 있다.

집 나간 며느리가 왜 돌아왔는지에 대한 배경을 추측할 수 있고

옛날 전어라는 생선의 가치와 심지어 조선 시대의 어업과 어물 유통 구조,

그리고 공납(貢納) 제도와 문제점까지도 엿볼 수 있다.

 

@전어라는 생선 이름의 유래

18세기 후반(정조), 서유구의 난호어목지(蘭湖魚牧志)에 내용이 실려있다.

전어는 고기에 가시가 많지만, 육질이 부드럽고 씹어 먹기에 좋으며

기름이 많아 맛이 좋다. 상인들이 소금에 절여 한양으로 가져와 파는데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모두 좋아하므로 값을 생각하지 않고 사기 때문에 전어라고 한다

 

@경제학적으로 풀이하면 가을 전어의 인기가 워낙 높아서

사 먹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공급이 미처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고

그러기에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는 말이다.

때문에 돈 전() 자를 써서 전어가 됐다는 것인데,

전어가 비싸 봤자 얼마나 비싸다고 전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조선 시대 문헌 곳곳에서 전어 값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전어 이름의 유래가 보이는 난호어목지보다 약 150년 앞선

17세기 초의 기록을 보면 전어 값이 비싸기는 진짜 비쌌다.

 

@임진왜란 때 오희문이 전란을 겪으면서 쓴 피란일기인 쇄미록(瑣尾錄)

듣자니 시장에서는 전어 큰 것 한 마리에 쌀이 석 되라는 기록이 있다

쌀값이 크게 떨어진 지금 기준으로도 전어 한 마리가 쌀 석 되라면 무지하게 비싼 편이다.

하물며 쌀이 지금보다 귀했던 조선 시대 중기에, 그것도 별미보다는 곡식을 먼저 챙겼을 난리통에

전어 값이 이정도였으니 괜히 전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아니겠다.

 

@임진왜란 의병장 조헌이 남긴 동환봉사(東還封事)에도

전어 가격에 대한 기록이 있다.

경주에서는 전어를 명주 한 필과 바꾸고 평양에서는 동수어를 정포 한 필과 바꾼다고 적었다.

명주는 비단이니 전어를 비단과 교환했다는 말이고,

동수어는 평양의 특산물로 겨울에 잡아서 말린 숭어다.

동수어를 무명 한 필과 바꿨다니 역시 비싸도 보통 비싼 것이 아니다.

 

@사실 동환봉사의 기록은 전어나 숭어가 맛있어 찾는 사람이 많았기에

그렇게 비싸다는 뜻으로 적은 것은 아니다.

당시 조정의 물자 수급구조가 잘못됐다는 것을 지적한 말이다.

옛날에는 경상북도 경주에서 조정에 보내는 진상 품목에 전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경상북도 바다는 전어가 많이 잡히는 곳이 아니다.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선조 무렵만 해도 이미 전어가 거의 잡히지 않았다.

전어가 주로 잡히는 곳은 서남해 바다다.

지금도 가을철 열리는 전어 축제 중에서는 충남 서천의 홍천항,

전남 광양의 망덕포구, 전남 보성의 율포항 등이 잘 알려져 있는데,

조선왕조실록과 지리지 등에서 모두 특산물로 전어를 꼽았던 지역이다.

그런데 공물로 전어를 바쳤던 곳은 엉뚱하게 경상북도 경주였으니

비단 한 필 가격을 지불하면서라도 시장에서 전어를 사다가

한양으로 진상하는 터무니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경주는 특수한 사정이었다고 치더라도 한양 역시 전어 값이 비쌌던 데는

단순한 수급 구조 차이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정조 때의 실학자 서유구가 상인들이 전어를 소금에 절여

한양으로 가져와 판다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떠나서 400년 전 상인들이 전어를 당시에는

귀했던 소금에 절여서 한양까지 운반해 팔았으니

원가 구조가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다 수요까지 넘쳤으니 전어 한 마리가 쌀 석 되 값이 나갈 정도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지금과 달리 18세기까지만 해도 생선을 비롯한 해산물은

바닷가가 아니면 정말 귀했다.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겠는데,

기본적으로 어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획량이 적었다.

어업 구조 역시 하천어업 중심이었다.

유통 구조의 문제도 있다.

복잡한 문제를 짧게 설명할 수 없지만,

단적인 사례를 18세기 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새우젓을 비롯한 젓갈을 예로 들었지만,

전어를 비롯한 어물에도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영남에 사는 아이는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 백성은 아가위[]를 절여서 장()을 대신하며,

서북 사람들은 감과 감귤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리고 연해 지방에서는 메기와 장어로 거름을 하는데,

이것이 어쩌다 한양까지 오면 한 줌에 1() 씩이나 하니

어찌 그리 비싸단 말인가?”

 

@집 나간 며느리가 전어 굽는 냄새에 돌아온 진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전어 맛을 떠나 전어가 그만큼 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어를 구워 먹을 정도로 시집의 살림 형편이 확 폈다는 표시일수도 있다.

무심코 흘려듣는 말이지만 옛 문헌을 바탕으로 재해석해 보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전을 통해 보는 음식의 재발견이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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